5년 전 망아지가 태어났을 때 새 생명을 부르는 이름은 너무도 쉽게 정해졌다.친구 라라가 어미 칸타에게서 난 아들이니 '칸돌'인데 부르기 쉽고 친근감 있게 '깐돌'이라 부르면 된다 해서 그 순간부터 그대로 쭈욱 '깐돌'이라 부르게 됐다.만일 칸타가 딸을 낳았으면 '깐순'이가 되었을 것이다.라라가 깐돌이라는 이름을 입술에서 뱉었을 때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원래 망아지의 이름이 깐돌이었고 저 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이 세상으로 건너오는 입구여서 그곳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존재의 이름을 라라가 대신 알려준 것만 같았다.

 

깐돌이는 망아지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장난끼로 똘똘 뭉쳐서 눈알을 데굴데굴하고 혓바닥은 옆으로 낼름 빼물고 다니는 모습이 영락없는 까부는 아이였던 것이다.깐돌이가 두 살이 되었을 때 새로운 이름을 주고 싶었다.두 살이면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까불고 장난치는 모습은 여전해서 도저히 깐돌이 말고 다른 이름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깐돌이가 세 살이 되고,네 살이 넘어갈 때도 다른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깐돌이란 이름이 다른 이름이 오는 것을 철저하게 방어하고 있는 듯했다.우리 부부가 틈만 나면 깐돌이의 새 이름을 쥐어짜도 나오지 않았다.궁여지책으로 '깐'이 붙으면 더 까불 것만 같고 그러다 다치기나 할 것 같고 승용마의 본분에서 멀어지는 것만 같아 '깐'을 빼고 '돌이'라고만 부른지도 오래 되었다.그러다보니 편하기도 해서 돌이란 이름은 그대로 굳어져서 한평생 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돌이는 다섯 살이 될 무렵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몸도 어른말의 골격에서 비롯되는 자태를 갖추었고 무엇보다 얼굴에서 장난기가 증발해버렸다.오죽하면 '어덜트 키드'라고도 했을까.장안을 하느라 가만히 세워두어도 나대지도 않고 의젓,차분하기만 하니 도대체 우리가 아는 돌이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서운할 지경이었다.까불던 아이는 어디로 가버리고 그 자리에 다른 말이 섰다.세상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처음에 익숙하지 않던 돌이 모습에 차차 적응이 되고 보니 옛날 돌이는 지금 돌이의 모습으로 서기 위하여 잠시 입었던 옷이었고 때가 되어 낡은 옷을 벗어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여름 밖에서는 폭염에 달구어지는 날씨였는데 아랑곳없이 방에 틀어박혀 출판원고와 씨름하던 나는 틈틈이 시집을 읽었더랬다.그 옛날부터 좋아하던 시인인 류시화의 새로운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이다.시인이 15년 만에 낸 시집이라 시어 하나하나가 가슴속에 깃든 현악기를 퉁기는 것 같았다.틈나는 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나오는 시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시어 하나가 툭 던져졌다.나를 데려가세요 라는 듯이.그 시어는 '아마르'였다.

 

시집에 실린 시 중에 <옛 수첩에는 아직>이라는 시가 실렸는데 '아마르'는 거기에서 나와 나에게 전달되었다.그 순간의 기분은 저 우주에서 누군가 '이제 그 말에게 새 이름을 줄 때가 되었어'하고는 시인의 입으로 뱉어져 나의 가슴에 꽂힌 방식으로 온 것같았다.나는 애마의 이름을 받았다.

 

'아마르'는 시인이 밟았던 땅의 현지 언어로 '영원'이라는 말이라고 한다.왜 '영원'이라는 단어가 나의 영혼을 흔들었는가?

다섯 살이 된 돌이를 타면서부터 녀석의 잔등에서 어떤 영속성을 느꼈기 때문이다.어느 순간부터 나를 온전히 제 등짝에 받아주는 말에게서 제 마음을 온전히 내어주고 있다는 편안함이 밀려왔다.그 편안함 속에서 나를 태운 말 움직임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일일이 다 느껴볼 수 있었는데 그 느낌과 기분은 익숙한 것이었다.오래 전에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하던 애마가 태워줄 때의 바로 그것이었다.그러자 가슴에서 감동이 밀려들었다.애마는 떠나고 나는 남아서 슬픔에 잠겼었지만 함께 하던 그때에 나누었던 사랑은 시간의 유한함을 넘어서 다시 또다른 유한함 안으로 찾아들어 이어지는구나.

 

돌이의 등에서 그 옛날 바람이와 나누었던 만족스럽고 행복했던 그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되면서 세월은 돌고돌아 소중했던 것들을 영원히 이어준다고 깨닫게 되었다. 이 생은 사랑만 하기에도 짧은 시간이 아닌가.이러한 내면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이름 '아마르'가 나에게 왔다.

 

'아마르'와 나는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 속에 영원을 타고 흐르는 소중한 것을 이어가고자 한다.

'돌이'가 '아마르'가 된 사연을 늘어놓다보니 장황했다.본디 소중한 것은 언어로 나열해서 표현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다.

 

 

 

 덧붙이는 말

 

# 이제부터는 자판으로 '깐돌이'치다가 'ㄲ'이 삑사리 나서 '간돌이'가 되는 통에 고치느라 고생할 일이 없겠죠? 하하~

 

# 지금부터 '깐돌이' 혹은 '돌이'라 부르시는 분 벌금 5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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