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햇살의 눈부심을 가까스로 참으며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목을 젖혀 하늘을 보니 철새의 비행을 구경하게 된다.가끔은 하늘을 가득 덮을 정도로 무수한 철새떼가 천둥 못지않은 소리를 울리며 지나가기도 한다.그럴 때는 철새 종족에 대하여 장엄함과 외경심이 느껴져 와아 하고 소리없는 탄성을 뱉는다.

 

무수한 새떼가 날아다닐 적에는 거대한 한 마리 흑조처럼 보인다.흑조를 보는 일보다는 열 마리 내외로 소규모 편대를 이루어 날아가는 철새 보는 일이 많다.보통 화살표 모양을 하고서 원톱시스템으로 비행한다.날아가는 철새가 하늘을 가득 메우다가 조각으로 떨어져 날아가는 변주를 바라보면 전체와 부분은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너와 나의 구분도 일체감으로 녹아버린다는 생각에 이르른다.

 

우리 아이들이 논두렁에서 풀을 뜯고 있을 때 이러는 풍경이 김포평야에서 흔히 보는 일이 아닌지라 철새도 날아가다가 시선을 내리꽂고 신기해하지 않을까?

 

승마장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 농로에서 수확을 하느라 지나다니는 농기계들과 맞닥뜨리는 일이 많아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농로에서는 농기계 우선인지라 승용차는 쭈삣쭈삣 말도 못하고 좁고 구불구불한 농로를 뒷걸음쳐야 한다.도심지에서 교통을 방해하는 차량이 있을 때 크락션을 울리고 머리를 내밀고 항의하는 일일랑 이곳에서는 먼 나라 얘기다.농로를 지나가다가 농사일 하는 동네어르신의 표정은 당당하기만 하다.급하면 알아서 지나가셔~ 난 신경쓸 일 아니고~ 표정이 얼굴에 역력할 뿐이다.요즘엔 동네에 들어서면 자라목을 하고 먼 곳의 동태를 살피는 일이 습관이 됐다.

 

운동 끝나고 풀뜯으러 나왔다.칸타는 내가 붙들고 아마르는 할방님이 붙잡았다.아마르는 호기심이 많아 계속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서 그렇게 각각 맡았다.

 

요즘엔 논에서 노는 일이 많다.농부들이 볼일을 보고 떠난 빈논이 승마인 차지가 됐다.네모 반듯반듯하고 판판하고 푹신푹신하기까지 하다.모래먼지 걱정도 없다.논에서 운동을 하니 특히 좌속보하기가 좋았다.마치 라텍스 매트리스를 밟고다니는 느낌이었다.

 

마장에서는 말의 보폭이 커지면 좌속보하기가 여간 힘든게 아닌데 논에서는 하나도 배기거나 튕기지 않고 출렁출렁하여 다른 말을 탄 건가 싶었다.바닥의 재질이 승마운동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건가 새삼 생각해 보았다.

 

뿐만 아니라 논은 야외이고 평소 생활하던 익숙한 공간이 아니라서 말에게 낯선 새로움을 느끼게 하니 말 발걸음에 긴장된 탄력이 부여됐다.다른 사람이 탄 말을 보니 평소보다 다리가 번쩍번쩍 들렸다.

 

게다가 벼 베어낸 밑동에서 새로운 벼 줄기가 올라오고 있어 논 전체가 파릇했다.아 꿈에도 그리던 잔디마장에서 운동하는구나 온전한 착각에 빠져 신나는 기분도 즐길 수 있었다.

 

운동이 끝나고 다시 논으로 나가 풀뜯기를 시키는 것은 말에게 주는 보상이면서 풀뜯는 동안 주변 환경에 더 적응하도록 해서 다음 번 이곳에서 운동했을 때 더 순조롭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다.

 

사진을 찍은 날이 칸타,아마르가 함께 풀뜯으러 나왔던 올가을 첫 날이었던 모양이다.

 

아마르는 세상사를 모두 잊고 어느새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고 있었다.

 

자신의 오감을 모두 열고 이 풀,저 풀 가능한 모든 풀과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럴 때의 아마르는 예술가가 작업에 몰두하느라 자신까지도 잊어버린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아 보인다.

 

칸타도 처음엔 그랬다.

 

눈앞으로는 제 아빠와 아들이 보이고 옆으로는 엄마가 줄을 연결하여 잡고 있으니 불안할 까닭이 하나도 없다.

 

아마 칸타는 마음을 푹 놓고서 하염없이 풀을 뜯어먹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 분이 오시기 전까지는.

 

풀뜯은 지 10 분이나 지났을까.칸타가 머리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고 빈 논에 큰 원을 그리며 한바퀴 돌았다.순간 나는 사태에 대비를 해야겠다는 비상경보를 마음속에서 받았다.

 

아마르는 엄마 칸타가 평정심을 지키지 못하고 동요한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할방님에게 얼른 칸타의 상태를 알리고 칸타와 아마르의 줄을 서로 바꾸어 잡았다.줄 잡은 사람이 바뀌었어도 아마르는 아직도 눈치가 하나도 없다.

 

 

결국 칸타는 아무래도 마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아빠가 말리는 데도 기필코 돌아가겠다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칸타가 이렇게 나오면 힘을 당할 수가 없어 그만 돌아가야 한다.이제부터는 잘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나는 칸타야 내 소관을 떠났으므로 아마르가 어찌 나올까 그게 궁금하여 초조했다.아직도 삼매경에 든 아마르의 등 뒤로 할방님이 칸타에게 이끌려 멀어져가는 모습이 보였다.칸타는 "내가 가스불 안 끄고 나왔다구요.아시겠어요? 얼른 안 돌아가면 큰 일이..." 하며 바락바락 우기는 사람 같았다.

 

말들은 외승 나왔다가도 돌아오는 길에 가스불이나 수돗불 안 잠갔다는 듯이 떼를 쓰며 설치곤 한다.간혹 등에 태운 사람은 버린 채 혼자 부리나케 가버리기도. 그래서인가 주변 아줌마들이 외출했다가 가스불 걱정한다는 얘길 들으면 말 친구가 떠오르기도 한다.아줌마는 기억이 깜빡거리지만 말은 기억력도 좋은데 왜 그리 집에 간다고 보채는 지 원.

 

칸타의 모습이 사라질 무렵 아마르도 눈치를 챘다.

 

(눈치챈 아마르의 표정 사진은 아래로 죽 내려가면 만나게 됩니다.)

 

엄마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더니 처음엔 어? 왜 돌아가지?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하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정말로 엄마가 다시 돌아가는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왕창 당혹스런 표정이 얼굴에 걸리고 말았다.

 

그때의 표정을 통역하자면 "이런 젠장! 미쳐버리겠네!" 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마르도 돌아가야겠다고 판단한 모양이다.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그런데 그날따라 나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기운도 없고 현기증도 있었다.나는 손주의 걸음을 따라잡지 못하고 뒤쳐진 할머니 꼴이 됐다.

 

내 걸음도 서두르고 줄을 잡은 손에 힘을 좀 주었으면 아마르와 함께 돌아갔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어느 순간 줄을 놓쳐버렸다.그러자 아마르가 뛰기 시작했다.

 

녀석이 뛴 방향은 우리가 걸어왔던 길이 아니라 가로질러가는 지름길이었다.아마르는 몇 걸음 뛰다가 물이 채 마르지 않은 논뻘에 발목이 푸욱 빠지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보고 어찌 되려나 머리가 곤두섰다.혹시 아마르가 당황하여 날뛸까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천천히 가던 걸음을 걷는 일이 나의 최선이었다.

 

(아마르 놀란 표정 )발목이 빠진 아마르는 날뛰지 않았고 대신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보았다.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은 "할머니 나 빠졌어.어쩌지?"하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아마르의 눈빛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읽으며 계속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한 오초 정도 지났을까.아마르는 알았다는 듯이 앞을 보더니 힘차게 뛰어서 뻘을 빠져나와 한달음에 승마장으로 향했다.

 

아마르는 할머니에게서 "아마르는 괜찮아.위험에 빠진 게 아니야.할머니도 거기로 가는 중이야."하는 메시지를 읽고 안심했다.그러자 움직여도 되겠다는 판단을 하고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내 느린걸음으로 마방까지 돌아가기는 꽤 긴 시간이었다.걸어가면서 모처럼의 풀뜯기기가 해프닝으로 끝난 상황에 우스워하며 무엇보다 아마르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의견을 살폈고 존중했다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나와 아마르는 연결되어 있다.

 

(가스불 끄러 간다는 칸타)??? 칸타는 그 후로 아빠를 태우고 할머니를 태운 아마르와 외승을 나왔다가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떨었다.그때의 표정은 "내가 깜빡 잊고 약을 안 먹고 나왔나봐 증상이 또... 어떡해!" 뭐 이쯤 되보였다. 다음 날에 칸타는 아빠에게 단둘이만 외승나가자는 요청을 받았다.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행진하는 군인처럼 씩씩하게 앞발을 번쩍번쩍 들고 자발적으로 외승길에 올랐다.그 다음 번에 아마르,엘도라도와 함께 외승길에 올랐을 때 여장부처럼 선두에 서서 수말 둘을 이끌었다.

 

할방님의 칸타심리 해석은 - 내가 볼 땐 꿈보다 해몽이지만 - 아마르랑 같이 나왔을 때 자기가 보여준 행동이 아들 보기에 너무도 부끄러운 승용마 처신이라고 반성하고 굳은 결심으로 환골탈퇴 한 거라나? 원톱시스템으로 날아가던 지나가던 철새들이 보고서 " 쟤 며칠 전 그 말 아냐?" "그날은 정신 나갔던 것처럼 보이던데 오늘은 정신이 돌아왔나봐 아무튼..."

 

 

*시시콜콜 할망 요즘

 

지난 저녁에 퇴근하던 - 회사가 아니고 승마장 - 할방님이 비닐봉지 한꾸러미를 들고왔네요.안에는 흙묻은 투박한 고구마들이 있더군요.한눈에 마트에 파는 매끈한 고구마는 아니었죠.웬거냐고 묻자 원장 사모님이 우리 거라고 캐서 주셨다는 답변이 돌아왔네요.우리 고구마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고구마 심은 기억은 없는데.할방님은 우리가 심은 게 맞기는 맞다네요.심은 후 즉시 고구마 존재를 잊었을 뿐.다음 날 두꺼운 냄비에 쪄낸 고구마 맛은 명품이었지요.기르느라 돌봐준 것도 없이 이리도 맛난 고구마를 먹다니 횡재한 기분이더군요.옛날 옷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 발견한 기분? 살다 보면 가끔은 잊고 살았는데 문득 튀어나와 기쁨을 주는 일이 있지요.너무 집착하고 살 일은 아니라고 고구마를 쩝쩝 먹으며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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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보이는 마방은 지난 겨울 깐돌이가 지냈던 방이다. 사면이 막혔지만 지붕이 없어

추울까봐 바닥에 보온덮개를 깔고 정미소에서 퍼 온 쌀겨를 두툼하게 깔아주었었다.

할방은 그 방에 날마다 드나들면서 똥도 치워주고 물도 주고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깐돌이는 할아버지가 늘 삽자루를 들고서 자기를 찾아오니 그 삽자루마저 정다운 친구나

장난감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삽자루쇼를 공연했는데 동영상으로 찍어

두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거나 말도 어렸을 때는 갖은 놀이를 궁리해서

재롱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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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좋아하는 책인데 표지조차 엔도르핀을 분비시키는 효험을 지닌 신통한 책이다.

언젠가 출판사의 동물 시리즈물로 신문광고에 난 것을 보고 구입해 내 슬하에 두고 아까워 누구 한번 빌려준 적이 없다.

말과 가깝게 지내다 보면 도대체 이 녀석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속을 알 수 없으니 너무나
답답해서 한번 머리 뚜껑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때가 종종 있다. 말이 보이는

행동의 대부분은 종의 유전자에 각인된 메모리가 실행되어 나타난 것인데 <말에 대하여>에

는 말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종에 고유한 특성이 무엇인지를 과학적인 근거하에 제시한

다, 스티븐 부디안스키가 들려주는 말 이야기는 고고학,유전학,생리학,수의학,생체역학 분야

의 첨단 연구성과를 근거로 삼기에 직접 말 머리의 뚜껑을 열어보고 싶은 욕구를 시원하게

해소해주는 큰 역할을 한다. 이 책을 읽고나면 말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저들이 왜 저러는

것인지 많이 이해가 간다.

바람이와 칸타가 제일 사이가 좋을 때인데 둘이서 서로 잔등을 입으로 쓰다듬어주고 있다.

사람 입장에서 이 장면에 대한 느낌은 둘이서 연애라도 하나보다 싶은데 책에서는 연애모드

상황으로 보지 않는다. 말은 침입에 대비해 1.5미터의 사적공간이 필요하고 이보다 가깝게

접근한다면

바로 이런 험한 눈총을 받게 된다. 1.5 미터 법칙의 교과서적인 예..폴이올시다..

그런데 털다듬기는 이러한 사회적 장벽을 낮추고 유대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또한 털다

듬기를 하면서 긴장을 감소시킨다고 한다.말들이 좋아하는 털다듬기 부위에는 자율신경계

의  신경절이 집중되어 있어서 이 부분을 어루만지면 심장박동율이 11~ 14% 정도 현저하게

낮아진다고 한다. 결국 털 다듬기는 이런 기분좋은 진정효과를 가지므로 자연스럽게 우정관

계를 공고히 하게 된다는 얘기다.

앞에 바람이와 따르는 칸타 이 둘은 당시 같은 우리 안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부부처럼 한방

을 쓴건데 바람이로선 싱싱하고 아리따운 아가씨랑 단둘이 한공간에서 지내게 되니 무척 행

복했을 것이다.자연에서라면 수컷의 서열싸움으로 얻어지는 결과물인데 말이다. 칸타도 이

상황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같은 주인을 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네들끼리도 돈

독한 우호관계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근거가 있으니 승마를 할 때에도 말이 뭔가에 놀랐을 때 목을 쓰다듬어주면 진정이

되고 다 타고나서나 잘해낸 것을 강화하기 위해 칭찬의 의미로 긁거나 안아주면 인간과 말

사이에 우호와 신뢰가 생겨 훨씬 더 나은 승마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새겨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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