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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점들이 즐비한 역전 제과점의 아들로 자랐기 때문에 나는 자영업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그들에게는 일의 반대가 휴식이 아니라 손해다. 그래서 그들은 휴일에도, 심야에도 가게 문을 닫지 않는다.

.

.

.

  그러니 어머니가 평생 만든 단팥죽과 팥빙수의 양이 얼마나될지는 상상조차 못하겠다. 그 그릇들을 쌓는다면, 아마도 꽤 높은 탑이 되리라. 내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된다한들, 그 탑 아래에서는 고개를 숙여야만하겠지. 그러고보면, 어머니는 참 여러가지를 만들었다. . . . 단팥죽 맛이 특히 일품이었다. 돈을 받고 팔아야만 하는 것이니 잘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비법은 내가 물려받았으니 나중에 소설이 잘 안쓰여지면 단팥죽 가게라도 차릴까보다. 팥죽을 만들때면 꼼짝없이 잡혀서 나무주걱으로 찜통에서 끓고있는 팥죽을 저어야만 했으니까.

 

  몇 년 전에 몽골에 갔더니 사람들이 마유주라는 것을 마시고 있었다. 내가 신기하게 여겼더니 말젖을 짜서는 밤새 나무주걱으로 휘저으면 술처럼 발효가 된다며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더라. 그래서 따라가봤더니 술에 취한 아버지들 뒤에서 팥죽을 저을 때의 내 나이 또래의 소년이 말젖을 젓고 있었다. 그 방에는 전등도 없었다. 어른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 소년은 말젖을 젓고 있겠지.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으나 어디를 둘러봐도 사방이 모두 똑같은 풍경이라 그게 더 무섭고 절망스럽던 몽골의 평원에서 나는 그 소년을 붙잡고 두 마리 망아지처럼 울고 싶었다.

 

                                                        

                                                                                   '소설가의 일'중에서

 

 

 


소설가의 일

저자
김연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5-01-13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매일 글을 쓴다. 그리고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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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몽골의 밤은 깊다. 반구의 하늘은 별들로 가득 차고, 광활한 초원의 점 하나처럼 찍혀있는 게르 의 촛불은 아늑하고 호젓하다. 빙 둘러 앉으면 그 중심에 술병 하나쯤 놓이게 마련이다. 둘러앉은 여행자들이 한 점을 응시하며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밖에서는 모래바람이 울부짖고, 밤이 칠흑처럼 깊어갈수록 게르 안은 방주처럼 아늑해진다. 술잔을 나누며 지나온 길들을 되새기노라면, 누가 시키지않아도 각자가 가슴에 차곡차곡 접어두었던 삶의 수첩들을 펼쳐 놓게 마련이다.

 

  취기에 못이겨 게르 밖으로 나서면, 끝모르게 깊은 어둠이 사방을 둘러싸고, 세상의 중심에서 덩그러니 선 자신을 만나게 된다.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모래바람만이 원귀처럼 울부짖는다. 무어라 악을 써도 그 소리는 이내 바람에 날아가버린다.

.

.

.

 

  세상의 모든 소리를 앗아가는 모래바람과  깊은 어둠에 기대어 여행자들은 자신의 가슴 속에 꽁꽁 쟁여놓았던 말들을 토해내게 마련이다. 바람은 세상의 어떤 비밀스럽고, 부끄럽고, 저주스러우며 참혹한 소리들일지라도 한 도막도 남김없이 빨아들여 어디론가 날려보낸다. 언제 어디에서 그렇게 가슴 속에 쟁여 둔 말들을 통렬히 외쳐볼 수 있었던가. 언제 어디에서 마음껏 비틀거려보고, 가슴을 쥐어뜯어가며 울어보고, 큰 소리로 악을 쓰고, 취해 볼 수 있었던가. 대개 그러한 절규의 끝은 울음이다.

 

  모래바람이 부는 고비사막의 밤은 모든 걸 허용하며, 그 광포한 바람으로 모든 걸 너그러이 받아들인다. 소리도 소멸하고, 형상도 사라진 황야에서 누구도 들을 수 없으며,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나를 만나게 된다. 고비의 벌판에서 모래바람이 부는 밤이면 , 술잔을 내려놓고 게르 밖으로 나가보라. 걷는다는 생각마저 느껴지지않는 깊은 밤의 중심에 서서,

 

자신의 가슴 속에 꿍쳐 두었던 말들을 바람에 하염없이 날려 보내보라

 

                                                                                             '당신에게, 몽골' 중에서 

 

 

 


당신에게, 몽골

저자
이시백 지음
출판사
꿈의지도 | 2014-07-04 출간
카테고리
여행
책소개
더는 물러날 곳이 없을 만큼 끝까지 와버렸다면, 이제는 몽골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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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은 말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원'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살다가 한번쯤은 몽골의 끝도 없는 초원을 밟아보고, 그 땅에서 태어나 자란 말을 타고서 바람처럼 달려보는 꿈을 꾸어본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아직 몽골땅을 밟지 못했다. 언젠가는 가봐야지 하는 생각만 책갈피에 끼워둔 나뭇잎처럼 마음에 묻어 두었다. 그런 내 앞에 몽골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 자꾸 나타나는 것을 보면 언젠가

몽골에 간다는 그 마음을 잊지 말라고 재촉하는 것 같기도 하다. 몽골에 가면 뭔가를 만나게 될 것 같다.

  위에 소개한 김연수의 산문과 이시백의 글은 모두 몽골에 갔던 경험담이 소재다. 각각 글의 장르나 다루는 이야기는 달라도 어떤 공통점이 느껴졌기에 한데 모아본 것이다. 공통점이란 바로 내면에 아로새겨진 맺혀있던 감정과의 대면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김연수의 산문에서 필자는 유년의 기억 한자락을 들추어낸다. 역전 제과점 아들로 자란 탓에 일손이 모자랄 때 고사리손이라도 필요했던 그 시절 말이다. 솥단지에서 끓는 팥죽을 젓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젓는 일을 게을리 하면 금세 죽이 바닥에 눌어서 탄내가 피어오른다. 어린 팔 근육으로 고단한 노동을 하면서 아픈 것은 팔뿐이 아니었을 터. 고단한 삶이 무엇인지 일찌감치 엿보아버린 후에 남겨진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 감정은 잊혀진 채 지나가버렸나 했는데 몽골에서 밤새 마유주를 젓는 아이를 보며 작가의 가슴에 되살아났던 거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두 마리 망아지처럼 울고 싶었다.'

 

  이시백 작가의 사색의 공간은 몽골 중에서도 고비사막에 지어진 게르 안이다. 게르는 유목민의 전통적 이동식 가옥이다. 이런 가옥에서는 바깥의 소음, 자연의 음향이 생생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어서 바깥에서는 바람소리 요란한데 그와 대조적으로 게르안은 사위가 조용하다. 그럴 때 사람은 차단했던 이성의 빗장이 저절로 풀어짐을 느끼게 된다. 자연의 소리는 내면으로 접속하여 들어가는 암호나 마찬가지다. 평소 겹겹이 두르고 살았던 거추장스러운 생각들이 사막의 바람에 훠이훠이 날려간 듯 마음이 가벼워졌을 때 필자가 만난 것은 역시나 울고싶어지는 맺힌 감정이었다.

특히나 한국땅에서는, 그것도 남자로 태어났다면 쉽게 울 수 없는 법이다. 남자는 평생 세 번 우는 것이고, 아무 때나 울면 고추 떨어진다는 삶의 지침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박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면서 울고싶어지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나와는 달리 남편은 이미 몇 차례 몽골에 다녀왔다. 다녀올 때마다 엄청난 얘기보따리를 풀어놓았었다. 듣고 지나간 얘기 중에 이런 대목이 떠오른다. 비가 오고 강물이 불었는데 몽골 말몰이꾼이 모는 말무리가 강물 앞에 다다랐고 그 강을 맨몸으로 건너야 했다. 몰이꾼의 노련한 신호에 따라 말들은 하염없이 몸에 차오르는 거친 물살을 마다않고 강을 건넜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했던가. 그때는 "울었어? 왜?" 했던 것 같은데 지금에야 그 마음자리가 조금이나마 짐작이 된다. 언젠가 나도 몽골에 간다면 몇 배는 더 울음바다를 쏟아내지 않으려나.

 

'데려다 준다.'

 

 말은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다주는 존재이다. 물론 옛날에야 아주 오랜 세월 말이 제 등에 사람을 태워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데려다주었다.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많이 옮겨주는가가 말의 효용가치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빠르게 ,많이 옮겨주는 일에서 다른 대체수단이 생겼으므로 그 일에서 말은 해방되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을 찾아나서고 말에게 빠져들곤 한다. 그 이유를 하나 알 것 같다. 사람들이 "뭐지? 뭔데 묘하게 빠져들게 만드는 거야?"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비밀 같은 거 말이다.

 

 말은 우리를 깊숙하고 은밀한 내면의 감정과 만나도록 안내한다. 말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가보면 내가 말라죽으라고, 숨막혀죽으라고 가두어두었던 내면의 지하실이 열려서 그 안의 것을 두려움 없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몽골로 여행을 떠난 감수성 풍부하고 예민한 작가 두 명이 전하는 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이 글에 실은 사진은 몽골의 사진작가 Oktyabri Dash 님의

' The beauty of mongolia' 에 실린 작품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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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5일 서울 나들이를 했다.소공동 롯데백화점에 있는 롯데갤러리에서 전시하는 말 그림을 보기 위해서다.(사진은 전시된 작품이 담긴 엽서)

 

전시회의 감동을 오래 간직하려고 도록도 샀다.

 

달력과 참여작가 소개지.

 

말띠 해가 되니 참 좋다.세상에 말 이미지가 풍년을 이루었다.여기를 봐도 말,저기를 봐도 말.말 이미지의 으뜸은 예술작품에 구현된 말일 것이다.소공동 롯데갤러리에서 한국,몽골,호주 작가의 말 그림 전시회를 한대서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갔는데 3국의 작품을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어서 더욱 즐거웠다.

 

그곳에 가기 전에 내가 늘 만나서 함께 생활하는 말이 어떻게 미술작품으로 형상화 되었으려나 너무도 궁금했다.말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동물이어서 미적 대상으로 바라보기에 손색이 없다.여기에 더하여 예술적으로 승화된 형상적 이미지로 만나는 말은 어떤 느낌으로 나에게 전해질까?

 

내가 하늘 만큼 땅 만큼 좋아하는 고 김점선 화가의 작품 앞에 섰다.우리 집에도 파란 말이 그려진 판화작품이 걸려있다.화가의 무수한 붓질이 가득 메워진 작품 앞에 섰다.

 

미술 전시회에 가면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작품을 골라본다.이 전시회에서 만난 '나에게는 최고!' 작품은 여인을 등에 태운 말이 서있는 그림이다.말의 표정엔 슬픔,연민의 감정이 차오름에도 타인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담겨 있는 것 같다.사람을 태우는 행위의 내면에 깔린 말의 마음이 엿보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말이 사람에게 주는 수많은 즐거움 중에서 예술작품으로 다가오는 것도 커다란 부분이다.화가에게는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영감의 원천이고 미술애호가에게는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기쁨에 취하게 하니까.

 

한국화가의 작품에서는 김점선 화가의 따뜻한 추상화가 참 마음에 든다.몽골화가의 세계에서는 말이 우리네 스마트폰 만큼이나 삶과 뗄래야 뗄 수 없이 공존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호주화가의 작품은 내 개인적인 취향과 아주 맞았다.그곳의 말은 사람의 친구로 인격화되어 동반자이자 내면의 벗이기도 했다.언젠가 호주여행을 했을 때 광활한 땅에 비해 매우 적은 인구가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어서 인상적이었다.사람과 부대끼기는 커녕 사람 구경하기조차 힘들게 살아갈 때 말이 좋은 벗이 되어주었으리라.나의 애마 칸타빌레도 호주가 고향이다.머나먼 고향을 떠나와 나의 곁에서 살아가는 칸타빌레는 현재 더할 나위 없는 내 벗이다.

 

새해가 시작하는 달 , 말 그림 보러 가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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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은 '소멸의 아름다움' ( 필립 시먼스 / 나무심는 사람 )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인류가 살지 않는 별 

그 별들 사이의 텅 빈 공간 따위는 두렵지 않다 .

그보다는 내마음 속 불모지가

훨씬 더 절실하게 두려움을 안겨준다

 

- 로버트 프루스트 '불모지' 중에서

 

 

 

 

 

 

  ... 우리는 멀리 떨어진 별들의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 원자.

텅 빈 우주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의 일시적인 결합에 불과하다.

 ... 우리는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중요한 존재인 동시에

 덜 중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나의 신비주의는

다른 세계에 접근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고

 이 세계를 더욱 깊이 경험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나의 신비주의는 일상 생활의 신비주의.

거기에 필요한 것은 상상력, 평범한 것에 대한 사랑과 관심

신의 은총에 대해 기꺼이 놀라는 마음뿐이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여기

낡은 구두와 장미꽃이 있는 세계에 있으면서

 내가 영원을 찾을 수 있는 곳에서

영원을 찾고 있다는 것 뿐이다.

 

 

 

 

 

 

 

어떻게 하면 이 영원한 현재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 우리의 호흡에, 우리 눈앞에 있는 우리 손의 움직임에 정신을 집중하면,

 삶의 빛 속으로, 평범한 것들의 핵심에 있는 신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아이가 빵에 버터를 바르는 것을 볼 때

 까마귀가 들판에 내려앉는 것을 볼 때 

 나이 든 묘목업자가 신나는 얼굴로 잡종 진달래를 열심히 설명하는 것을 들을 때....

그런 평범한 순간,

갑자기 다른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고...

 신발을 벗고 깊이 고개숙여 절을 하고 싶어진다

 

 

 

 

 

 

 

 

 

 

현재에 살면

 적어도 처음에는 과거와 미래를 잊고,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기억과

기대감의 회오리를 멈추고

 명상하거나 빵을 굽거나 숲속을 거닐거나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행복하고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수련을 거듭하면...

이번에는 과거와 미래가 불안이나 심란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대신 우리는 지금 이순간이

모든 시간의 흐름속에서 제 자리를 찾은 것을 깨닫고

 우리가 영원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지금 이순간만이 아니라

인생 전체 속에서 살게 된다

 

.

.

.

.

.

 

.

.

   

< 에필로그 >

 

 

 

 

모든 곳이 길이되는 초원  

 

 

 

 

 

 

 

몽골에서는

바람과 풀과 햇빛과 함께 걷는다

달릴 때는 온 초원이 함께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에게 잃어버린 원초적 기쁨과 자유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자연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게된다.

 

 

 

 

 

 

 

가다가 힘들면 걷고

걸음을 멈추어서서 아득한 풍경을 가슴에 담아두거나

그 풍경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도 좋다.

 

 

 

 

 

 

 

 

말들은 일사분란하게 나아간다

 

 

 

 

 

 

 자신의 소임을 정확하게 알고  행동한다.

스스로를 보호하지만 어떤 진창과 수렁도 마다하지 않는다  

 

 

 

 

 

 

 

모든 말들이 선두에 나설 수 있고

어떤 말도 뒤쳐졌다고 조급해하거나

 앞선 말을 쫒으려 내달리지 않는다.

 

 

 

 

 

 

 

 무리에서 떨어져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움직이되 개별적으로 자유롭다.

 

 

 

 

 

 

 

때로는 거친 강을 건너고,

 

 

 

 

 

 

 

건널 수 없는 강에 이르면 산을 넘어야 한다.

 

 

 

 

 

 

 

깎아지른 절벽을 끼고

 차마고도를 넘는 짐꾼들처럼 산을 넘는다.

 

 

 

 

 

 

 

 

아래로는 아름다운 강물이 흐르고 있다.

 

 

 

 

 

 

여기는 몽골이다.

 

 

 

 

 

 

 

 이곳 몽골인들도 이제는 초원의 삶을 많이 떠난다.

 

 

 

 

 

 

 

 이미 도시화가 심화된 울란바토르 시를 중심으로

초원을 떠난  몽골인들이  모여들고

 

 

 

 

 

 

 

 

유목민의 삶을 상징하며 초원의 삶을 지키던 아름다운 게르

가난한 빈민을 상징하는 주거공간으로 도심 외곽에 흉물스럽게 자리잡았다.

 

게르가 없는 초원은 주인을 잃은 듯 허허롭다

 

 

 

 

 

 

 

 

 

 대도시의 삶에 지친 우리는 초원을 꿈꾸고

초원의 삶을 살던 몽골인은 대도시를  꿈꾼다.

 

 

 

 

 

 

 

 

그래도..

세상의 변화와 격랑에도 불구하고

 여름이 돌아와 풀이 무성해지면  몽골인들은 초원으로 향한다.

 

 

 

 

 

 

 

 

 초원은 돌아가야할 영원한 고향인 것이다

 

 

 

 

 

 

 

 

몽골과의 인연을 위한 징표가 필요했던 것일까

 첫 번째 여행에서는 지갑을 잃어버리고

두 번째 여행에서는 믿기 어렵게도 구두를 두고왔다.

 

 

 

 

 

 

 

   

  가끔, 두고온 물건을 떠올릴때마다  

내가 몽골에 존재하고 있다는 기분이 찾아든다. 

 

 

 

 

 

 

 

초원을 감싸는 신비한 빛 

우주에 홀로 존재하는듯한 게르의 차가운 밤들

생성과 소멸. 순환의 모습을 너른 가슴에 펼쳐놓은  몽골의 초원

 

 

 

 

 

 

 

 말의 다리를 통해 전해지는 

풀의 살결, 물의 소리, 대지의 울림

 낯선 여행자들이 말을 몰아대는 어설픈  츄~ 츄~ 소리들

 

그 속에 여전히 함께 있다는 신비 속에 빠져든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몽골에 가게되면 자신의 무언가를 하나쯤 남겨두고 오는 것도 괜찮으리라.

그것이 무엇이든..

 

 

 

 

 

 

 

 

 

 현재의 삶이 버거울때나, 지루할 때나 ,의기소침해질때면

잠시 몽골에 두고온 것들을 떠올리게되고

 

 

 

 

 

 

그 기억들은 우리를 잊지않고 몽골로 데려다줄 것이다.

 

 

 

 

 

 

 

 

몽골의 초원과 빛속으로...

청아하게 울려퍼지는 초원의 노래소리로...

 말들의 잃어버린 낙원, 영원한 고향 속으로...

 

 

 

 

 

 

 

그러면 우리는

초원의 말들처럼 꿋꿋하고 굳건한 한걸음을

지금 이순간 영원 속에서

함께 내딛고 있을 것이다.

 

 

 

 

 

 

 

 

 

                

 

 

 

 이상 연재를 마칩니다

               사진에 등장하는 분들의 사전 동의없이 사진을 게재하였음에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사진을 제공하여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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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아마르가 깐돌이로 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난처하고도 신비롭게 서있던 그 새벽으로부터 5년. 깐돌이는 비로소 말horse이 되었고 나는 홀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오랜 도시생활로 야생성을 잃어버린지 오래인 중년의 남자가 20여년만에 홀로 여행을 떠나야하는 상황앞에서는 잠시 안절부절해도 좋으리라. 쉽사리 홀로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겁많은 말처럼... 말에게나 사람에게나 야생의 정신이 필요할 때다.

 

 

 

말이 맺어준 인연의 땅 '몽골' 그리고 '소멸의 아름다움' (필립 시먼스 / 나무심는 사람)

 

 

필립 시먼스 ( 1958 ~ 2003 )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며 평론과 단편소설을 쓰던 미국의 영문학 교수. 서른다섯의 나이에 '루게릭병'에 걸려 날마다 조금씩 죽어가야했던 저자는 죽음을 앞둔 불완전하고 결함있는 삶이 오히려 어떻게 충만한 삶이 될수 있는지를 깊은 성찰과 지혜속에서 온몸으로 보여준다.

 

 

 

비어있음으로해서 가득한, 완전하면서도 결핍으로 충만한 몽골이야말로 '소멸의 아름다움'을 읽어내기에 적합한 땅이다.

 

 

 

 해질녘 몽골의 초원을 바라보며, 탁탁 영혼을 깨치며 타들어가는 마른 장작불 소리를 들으며 그리고 동이 터오는 새벽녘. 게르의 이슬맺힌 풀밭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여기 아름다운 몽골에서 '합리적 신비주의자'가 전하는 삶에 대한 성찰을 소개해본다.  

 

 

( 아래부터는 '소멸의 아름다움'에서 인용된 글임)

 

 

 

삶은 어차피 죽음을 앞둔 상태다.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우리는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한다는 점에서 축복받은 존재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연의 섭리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도 우리와 무관한 이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유를 깊이 의식하면서 사는 것이다.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 명성,물질적 소유,우리의 육신- 들에 대한 집착으로부터의 자유...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자유...끝으로 우리의 고귀한 본성에 따라 행동할 자유.

 

 

 

 

 

아침에 침대에서 나올 수 있는 날은 하루하루가 나에게는 축복이다. 우리가 팔다리를 움직여 세상 일을 할 수 있는 날은 그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축복이다. 팔다리가 위축되고 말을 못하게 되어도, 여전히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다. 이 심장이 뛰는 한 나는 축복받은 존재다.

 

 

 

 

 

 

우리는 영원히 집을 완성할 수 없고 , 절대로 충분히 행복할 수 없으며, 집은 언젠가 우리를 완전히 떠나버릴 것이다

 

 

 

 

 

사람은 정착하기를 원하지만, 정착하지 않은 동안에만 희망이 있다(에머슨)...진정으로 살아있기위해 영원히 정착하지 말자

 

 

 

 

 

 

모든 종교적 감정은 우리의 진정한 집이 '다른 곳'에 있다는 깨달음으로 시작된다

 

 

 

 

 

 

그 '다른 곳'을 영적인 완전함으로 정의하든...자연계와의 조화로운 관계로 정의하든, 우리의 영혼과 신의 합일로 정의하든...우리는 되도록 멀리가기를 바란다. 이 삶의 고통에서, 미완성된 집에서, 미완성된 우리의 자아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삶속에 남아있는 한, 인간으로 남아있는 한, 우리가 갈망하는 그 '다른 곳'에는 결코 이르지 못한다

 

 

 

 

 

 

더 나은 삶에 대한 환상에 열중하면, 과거의 상처에 대한 기억에 얽매이고 다가오는 불행에 대한 두려움에 쫓기면, 우리가 갖고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을 잃게 된다

 

 

 

 

 

 

그것은 바로 현재의 순간이다...현재의 순간은 우리가 살고있는 미완성된 집이다

 

 

 

 

 

 

하루하루는 미완성이고 불완전하지만, 나는 손상되고 쇠약해지고 있는 이 몸뚱이속에서, 이 호흡속에서, 더듬거리는 이 말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려고 날마다 애쓴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여기, 현재라는 미완성된 집에 머물러있다. 기쁨은 집짓기 자체에 있다.

 

 

 

 

 

 

 

 

 

 

 

*** 돌이할방의 몽골사진과 '소멸의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이 글은 몇차례에 걸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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