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르는 승마장에 찾아오는 사람을 무척 좋아합니다. 사람을 발견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바라보고 다가갑니다. 아마르가 종종 이유없이 기분이 좋을 때 할머니에게 커다란 눈망울에 하트를 담아 뿅뿅 쏘아대기도 합니다. 엄마 칸타빌레랑 밖에 나와 놀던 이 순간도 무척 기분이 좋았나 봅니다. 혀가 신기하게도 하트 모양입니다. 저는 이 순간을 아마르가 세상 모든 말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보내는 거라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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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어릴 적 기억에 봄은 반갑지 않았습니다. 반갑기는 커녕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불쑥 찾아온 손님처럼 밉상이었죠. 손님은 찾아올 때마다 울긋불긋한 꽃들을 잔뜩 가지고 왔습니다. 꽃은 밉상 손님이 가져왔기에 예뻐보일리가 없었지요. 머릿속으로 '왜 꽃은 피고 난리래?' 싶은 퉁명스러운 기분만 가득했답니다. 어린 마음에 인생이 이다지 괴로운데 어쩌자고 화사한 자태를 난분분 뽐내는가 싶었던 겁니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흘러 소녀가 아가씨가 되고, 그 아가씨가 중년의 여인으로 변해하면서 서서히 봄과도 화해를 했나 봅니다. 어느 순간부터 꽃이 예뻐보이기 시작하더라니까요. 꽃이 예뻐 보이면 나이든 거라더니 딱 그런 모양입니다. 이른 봄에 승마장 사모님이 왔다갔다 하시며 화단을 살펴보시길래 나도 모르게 "올해도 꽃 많이 심어주세요!" 하는 말을 하고야 말았지요. 꽃타령이라니 나도 늙어가는가 보다고 한숨을 쉬고 말았네요.

 

 

 

 

지나온 인생에서 꽃이 예쁘게 보인 시간이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더 짧았지요. 이제는 '봄과 화해했다' 선언문이라도 낭독하고 싶었는데 올봄은... 지독하게 슬펐지요. 많은 이들의 기억에,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의 소금짐 같은 그런 봄으로 남게 될 것 같아 , 소금짐에서 배어나온 소금에 절여진  듯 마음이 싸르르 아립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서 산 정상에 누구보다 빨리 당도했지만 ,뒤늦게 알아차리기를 등에 업고 있던 아이를 어디다 빠뜨려 흘리고서  달려온 거 아닌가요? 아이를 빠뜨린 엄청난 슬픔 뒤에 몰려오는 암울함은 이 세상이 언제라도 다시 그런 슬픔의 무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예감 때문이지요.

 

 

 

 

 

 

 

하여 유난히 따뜻하고 무던했던 겨울의 뒤끝에 일찌감치 앞다투어 피어났던 꽃들이 그만 무색해지고 말았나 봅니다.

 

 

 

 

 

검정색 노트북이 있습니다. 가운데 삼성 로고가 박힌 좀 구닥다리 노트북이지요. 아마르가 태어나기 전 해에 샀으니까 아마르랑은 연년생쯤 됩니다. 인터넷도 되지 않고 아직도 처음에 깔았던 그대로 '한글 2007'이 사용하는 주된 기능이어서 더욱 구닥다리 분위기를 냅니다. 제 소소한 기쁨 한가지는 노트북을 켜면 삼성 로고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나는 첫 화면에 있습니다. 가장자리에 아이콘이 떠오르는 첫 화면에는 깐돌이(아마르 아명)가 갖은 인상을 쓰고서  자세 잡고 오줌 누는 모습이 보입니다. 털은 더부룩하고 꾀죄죄 하기까지 합니다. 시골 촌놈의 완전체라고나 할까요? 그 촌티가 풀풀 나는 망아지 녀석이 쉬 하는 모습이 어찌나 정겨운지 볼 때마다 웃음을 참기 어렵습니다.

 

시골 촌놈의 이미지를 완성하는 데는 녀석의 몰골 뿐만 아니라 배경도 단단히 한몫 합니다. 녀석이 오줌을 누고 선 장소는 얼기설기 끊어지다 이어지다 제멋대로 생겨먹은 철조망 울타리 안의 흙바닥입니다. 바닥에는 잔돌이 굴러다니며 그곳 시민임을 주장하고 있네요. 철조망 너머로는 야산 비탈의 공동묘지가 보입니다. 우리 산하 어딜 가도 야트막한 산자락엔 묘지가 차지하고 있지요. 사진의 배경만 보자면 보신탕용 개 사육장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바로 그곳이 지금의 아마르, 옛 깐돌이가 태어나 망아지 시절을 보낸 암울한 무대입니다. 왜 아마르는 그토록 황량한 장소에서 태어났는지, 왜 말인 아마르와 사람인 우리 부부는 그런 곳에서 운명적인 해후를 해야만 했는지요.

 

사실 이 세상의 시스템으로는 아마르는 태어날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승마장에 흔하디 흔한 말도 태어날 때는 극소수의 확률로 선택받은 종마의 씨를 받아 우수한 씨암말의 몸에서 태어난 존재들이죠. 아마르는 종마의 씨를 받은 것도 아니고 어쩌다 정처없이 팔려와 거세당하기까지 잠시 대기중이던 스텔리온, 지극히 평범한 퇴역경주마가 애비였던 ,우연한 생명이었던 겁니다.

 

 

 

 

 

다가올 7월이면 , 아마르가 6세가 됩니다.

 

 

 

 

아마르가 우리 품에서 자라온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탈도 많았고 우리에게 상상못할 기쁨도 안겨주었죠. 녀석을 키울 적에 가장, 항상 감동스러웠던 순간은 놈이 먹을 때였지요. 그악스럽게 와구와구 하며 흡입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먹구서 살아보겠다고 저 난리를 치는구나 싶어 그만 가슴이 뭉클해지고 뭔가 안에서 힘이 솟구치며 내 주먹이 불끈 쥐어지곤 했죠. 삶에 대한 열정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만.

 

 

 

 

녀석이 지금도 먹는 건 여전히 좋아하지만 , 과거에 더먹머리 머슴이 밭일 하고 와서 개눈 감추듯이 고봉밥 먹는 듯했다면 요즘은 선비가 점잖게 먹는 모습이라고 할까요? 선비님이라 해도 가까이서 구경 좀 할라 치면 귀를 뒤집고 눈을 부라리고 인상을 팍팍 씁니다. ' 내가 맛을 음미하는 거 안 보여? 난 사료를 즐기고 있으니 방해 말라니까!' 뭐 이쯤 되겠습니다. 아마르가 양반되기는 애시당초 글렀나 봅니다.

 

 

 

 

올해 들어 아마르에게도 자연스럽게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미국에서 날아온 내츄럴 선생님이 찾아와 두 번인가 직접 공부를 시켰습니다. 선생님에게 아마르를 맡기고서 녀석이 어떻게 하나를 지켜보는 제 가슴은 콩닥콩닥 했지요. 마치 집에서 얼싸얼싸 하던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킨 엄마 마음이 이렇겠지요. 아마르를 공부시킨 선생님 말씀이 녀석이 부모 앞에서는 어리광 부리고 떼쓸지언정, 학교와서는 선생님 말씀 잘 따르고 이해 잘하는 그런 학생이라고 하네요. 그 소리에 영락없는 학부모 심정이 되어 아이를 헛키우지는 않았구나 안도감이 들었답니다.

 

그런 후에 드는 생각은 내츄럴 선생님이 그 머나먼 미국에서 우리 아마르 가르치러 날아왔구나 싶은 인연의 필연적 연결고리를 떠올리게 되더군요. 뭐 선생님이 우리 아마르 가르치러 일부러 찾아올 까닭은 없겠지만서도 내 입장에서 보면  딱 그리 맞아떨어지니 어쩌겠습니까.

 

 

운동하고,목욕하고,상으로 풀뜯는 아마르

 

 

 

그리저리 아마르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홈스쿨을 졸업했나 봅니다.

물론 집에 와서 예습,복습 하는 거야 여전히 봐주긴 하지만요.

 

기왕 홈스쿨을 졸업했으니 마장마술 공부도 시키기로 했습니다.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서 조금씩 하는 공부인데 이 분야 역시 놀랍게도 어디선가 때맞춰 선생님이 나타났습니다. 아마르가 복이 많은 아이인가 봅니다.

 

신기하게도 아마르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공부할 준비가 갖추어지자 선생님이 등장했기에 그 타이밍이 절묘하다고 생각됐답니다. 이제 아마르는 다리도 제법 튼튼해졌고, 더이상 질질 울지도 않고, 좀 힘들고 불편해도 참아내며 교육을 받아들이는 그런 학생이 되었습니다.앞으로 어떤 멋진 승용마의 모습으로 자라가게 될지 희망이 피어오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러하니 말도 그렇겠지요. 너른 초원도 ,맘놓고 뜯을 풀도 주어지지 않은 삶입니다. 그래서 마방에서 머리를 내밀고 맑은 눈망울로 바라보는 그들을 보면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저 건초나 한무더기 집어다가 넣어줄 뿐입니다.

 

그런 말에게 매일 배우는 게 있습니다. 묵묵히 살아가기. 세상은 아름답지도 않고 충분히 기쁘지도 않고 오히려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많지만, 말은 좋다 싫다 내색을 하지 않네요. 그저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몫의 건초를 소중히 여기고 간절하게 씹는 것과 요구받은 일에 대하여 덤덤히 받아들이고 해내는 모습을 보일 뿐입니다.

 

 가끔은 아마르가 '끼야호~' 소리를 지릅니다. 사람의 언어로 '끼야호'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끼야호'를 표현한다는 편이 맞겠지요. 화창한 날에 밖으로 나들이 나가면 그런 기분을 표현합니다. 마방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일 뿐인데  소박하게도 햇빛,,바람,공기,새소리,꽃향기 만으로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있을까요.

 

 

호수공원에서

 

 

 

견공의 끼야호~   (공중부양 상태임)

 

 

4월 초에 호수공원에 갔습니다. 주인과 개가 한 조가 되어 산책을 즐기고 있어 무척 부러웠지요.나도 칸타나 아마르와 이 좋은 공원을 산책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때는 벚꽃이 난분분 흩날리는 광경이 한창이었고요. 무슨 생각이었는지 땅에 떨어진 꽃잎 하나를 집어들었어요.다섯 장의 꽃잎이 야무지게 손을 맞잡고 있더군요. 꽃잎을 뒤집어도 보았죠. 그랬더니 놀랍게도 다섯 장의 꽃잎을 단단히 고정시킨 꽃판은 오묘한 색깔의 별모양이었어요. 그러니까 꼭지가 다섯 개인 누구나 별이라고 떠올리는 그 형상 말입니다. 그때 별의 언어가 들렸지요.

 

 

 

 

언젠가 우리는 다 제각각 어느 별에서 지구로 살러 온거야. 살고나면 다시 별로 돌아가겠지. 별에서 왔다가 다시 돌아가기까지, 그러니까 사는 동안은 누구나 힘들기 마련이야. 꽃이 왜 피는지 알아? 살다가 힘들어 지쳐 쓰러질까봐 , 기를 쓰고 피어나는 우리를 보고 살아갈 힘을 내라는 의미야.

 

그러고 보면 존재와 존재가 맞부딪힐 때 기운이 생동하는 뭔가가 발생하는 모양입니다.

꽃이든, 말이든 가만히 바라봐주면 기운이 나지요.

 

 

사랑이

 

 

아마르는 할아버지가 오지 않은 날 내가 손이 딸려 저를 꺼내 놀아주지 못하면 귀를 뒤집고 마구 항의하며 화를 낸답니다. 칸타는 브러시로 목덜미 긁어줄 때 살살 하라며 화를 내지요. 칸타의 표현은 '콱 물까부다' 시늉이 바로 그거랍니다. 엉덩이 긁어줄 때는 시원하다고  하면서 목은 왜?  이놈들이 살아서 파닥파닥 거리는 게 참으로 좋네요. 그 파닥거림으로 인하여, 세상사 심란함으로 인해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려는 마음의 병을 이기고 사는 게 아닌가 싶어지네요.

 

 

                                     아마르

 

왜 아마르가 공동묘지와 철조망이 겹겹이 에워싼 황량한 땅으로 우리를 만나러 왔는지 꽃이 별을 보여주며 넌지시 건네는  무언가를 통하여 조금은 알듯도 합니다. 꽃의 아름다움은 얼어붙어 삭막한 겨울을 통과한 자리에서만이 찬란한 거지요. 아마르의 우연한 생명도 묘지에 드리운 죽음의 치맛자락 그림자에서 태어났기에 고귀한 게 아닐까요? 아마르가 하필이면 연중에 가장 무더운 날 질퍽한 진흙에서 태어난 것도 장차 가장 빛나는 희망을 모두에게 보여주려는 신의 뜻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가장 암울해 보이는 시간이 꿈과 희망을 발아하기에 가장 좋은 때가 아닌지, 말의 시간에 머물며 조용히  생각해 봅니다.

 

 

제이슨 (존 웨인이 탈 만한 거구의 순둥이 , 아마르가 혼내주겠다고 호시탐탐 벼르고 있음,사진은 소심하게 내다보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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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망아지가 태어났을 때 새 생명을 부르는 이름은 너무도 쉽게 정해졌다.친구 라라가 어미 칸타에게서 난 아들이니 '칸돌'인데 부르기 쉽고 친근감 있게 '깐돌'이라 부르면 된다 해서 그 순간부터 그대로 쭈욱 '깐돌'이라 부르게 됐다.만일 칸타가 딸을 낳았으면 '깐순'이가 되었을 것이다.라라가 깐돌이라는 이름을 입술에서 뱉었을 때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원래 망아지의 이름이 깐돌이었고 저 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이 세상으로 건너오는 입구여서 그곳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존재의 이름을 라라가 대신 알려준 것만 같았다.

 

깐돌이는 망아지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장난끼로 똘똘 뭉쳐서 눈알을 데굴데굴하고 혓바닥은 옆으로 낼름 빼물고 다니는 모습이 영락없는 까부는 아이였던 것이다.깐돌이가 두 살이 되었을 때 새로운 이름을 주고 싶었다.두 살이면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까불고 장난치는 모습은 여전해서 도저히 깐돌이 말고 다른 이름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깐돌이가 세 살이 되고,네 살이 넘어갈 때도 다른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깐돌이란 이름이 다른 이름이 오는 것을 철저하게 방어하고 있는 듯했다.우리 부부가 틈만 나면 깐돌이의 새 이름을 쥐어짜도 나오지 않았다.궁여지책으로 '깐'이 붙으면 더 까불 것만 같고 그러다 다치기나 할 것 같고 승용마의 본분에서 멀어지는 것만 같아 '깐'을 빼고 '돌이'라고만 부른지도 오래 되었다.그러다보니 편하기도 해서 돌이란 이름은 그대로 굳어져서 한평생 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돌이는 다섯 살이 될 무렵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몸도 어른말의 골격에서 비롯되는 자태를 갖추었고 무엇보다 얼굴에서 장난기가 증발해버렸다.오죽하면 '어덜트 키드'라고도 했을까.장안을 하느라 가만히 세워두어도 나대지도 않고 의젓,차분하기만 하니 도대체 우리가 아는 돌이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서운할 지경이었다.까불던 아이는 어디로 가버리고 그 자리에 다른 말이 섰다.세상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처음에 익숙하지 않던 돌이 모습에 차차 적응이 되고 보니 옛날 돌이는 지금 돌이의 모습으로 서기 위하여 잠시 입었던 옷이었고 때가 되어 낡은 옷을 벗어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여름 밖에서는 폭염에 달구어지는 날씨였는데 아랑곳없이 방에 틀어박혀 출판원고와 씨름하던 나는 틈틈이 시집을 읽었더랬다.그 옛날부터 좋아하던 시인인 류시화의 새로운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이다.시인이 15년 만에 낸 시집이라 시어 하나하나가 가슴속에 깃든 현악기를 퉁기는 것 같았다.틈나는 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나오는 시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시어 하나가 툭 던져졌다.나를 데려가세요 라는 듯이.그 시어는 '아마르'였다.

 

시집에 실린 시 중에 <옛 수첩에는 아직>이라는 시가 실렸는데 '아마르'는 거기에서 나와 나에게 전달되었다.그 순간의 기분은 저 우주에서 누군가 '이제 그 말에게 새 이름을 줄 때가 되었어'하고는 시인의 입으로 뱉어져 나의 가슴에 꽂힌 방식으로 온 것같았다.나는 애마의 이름을 받았다.

 

'아마르'는 시인이 밟았던 땅의 현지 언어로 '영원'이라는 말이라고 한다.왜 '영원'이라는 단어가 나의 영혼을 흔들었는가?

다섯 살이 된 돌이를 타면서부터 녀석의 잔등에서 어떤 영속성을 느꼈기 때문이다.어느 순간부터 나를 온전히 제 등짝에 받아주는 말에게서 제 마음을 온전히 내어주고 있다는 편안함이 밀려왔다.그 편안함 속에서 나를 태운 말 움직임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일일이 다 느껴볼 수 있었는데 그 느낌과 기분은 익숙한 것이었다.오래 전에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하던 애마가 태워줄 때의 바로 그것이었다.그러자 가슴에서 감동이 밀려들었다.애마는 떠나고 나는 남아서 슬픔에 잠겼었지만 함께 하던 그때에 나누었던 사랑은 시간의 유한함을 넘어서 다시 또다른 유한함 안으로 찾아들어 이어지는구나.

 

돌이의 등에서 그 옛날 바람이와 나누었던 만족스럽고 행복했던 그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되면서 세월은 돌고돌아 소중했던 것들을 영원히 이어준다고 깨닫게 되었다. 이 생은 사랑만 하기에도 짧은 시간이 아닌가.이러한 내면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이름 '아마르'가 나에게 왔다.

 

'아마르'와 나는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 속에 영원을 타고 흐르는 소중한 것을 이어가고자 한다.

'돌이'가 '아마르'가 된 사연을 늘어놓다보니 장황했다.본디 소중한 것은 언어로 나열해서 표현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다.

 

 

 

 덧붙이는 말

 

# 이제부터는 자판으로 '깐돌이'치다가 'ㄲ'이 삑사리 나서 '간돌이'가 되는 통에 고치느라 고생할 일이 없겠죠? 하하~

 

# 지금부터 '깐돌이' 혹은 '돌이'라 부르시는 분 벌금 5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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