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타의 얼굴

 

지난 겨울의 칸타.

 

칸타가 나를 바라본다.칸타는 방목중에도 한번씩 머리를 들고서 제 아빠나 엄마가 어디에 있나 눈으로 확인한다.확인하고서 곧 기승운동을 하게 될지 아니면 더 놀아도 될지 스스로 가늠해보고 그 후의 제 태도를 결정짓는다.

일주일에 한두 번 승마장에 오는 동생이 - 말 아이들 입장에선 이모 - 하루는 수장대에서 칸타에게 그루밍을 하다가 다급하게 언니,언니! 하고서 외쳐 불렀다.좀 떨어진 마구실에 있던 나는 또 무슨 일이야 싶었지만 말에 관해서라면 느긋해야한다는 태도가 몸에 배어 왜? 라고 입으로는 대답했어도 몸은 퍽이나 굼뜨게 동생에게로 갔다.가보니 동생은 상기된 얼굴로 언니,혼자 보기가 얼마나 아까웠는데요 글쎄 칸타가 제 품에 머리를 폭 파묻고 가만 있었지 뭐예요 이런다.그 소릴 듣고 난 픽 웃고 말았다.나의 싱거운 반응과는 달리 동생의 감동은 계속 남아 이어졌다.동생이 높아진 톤으로 늘어놓는 감동 소감을 한참 더 들은 후에 감동할 만하다고 생각됐다.그도 그럴 것이 일 년 전에 동생이 처음 우리 아이들 만나러 왔을 무렵 칸타는 뉴 페이스 이모에 대하여 까칠하기 짝이 없었다.어느 날인가는 칸타가 마방에서 건초 뒤적질을 하다가 슬그머니 제 방에 들어온 제 이모의 허벅지를 콱 문 적이 있었다.칸타 입장에서는 아직 점심식사도 끝나지 않았는데 제 방에 들어와 무슨 볼일을 보려는 이모의 처사가 못마땅하다는 표현이었다.그렇게 당한 동생의 서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칸타가 저에게 잘해주려는 마음도 몰라주고 물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속상했겠나.그런 과거사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러 칸타가 동생을 물었던 입을 포함한 얼굴 전체를 동생 품에 고스란히 내어주었다는 상황은 감동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거다.요즘 동생은 말에서 고양이로 변신하여 얼굴을 맡기는 칸타를 즐기는 재미가 쏠쏠한 것 같다.

나도 어제 칸타의 머리를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만끽하는 행운을 얻었다.아마도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분들은 동물의 머리를 품에 안은 게 무에 그리 감동이라고 그 난리를 피우는가 의아할 수도 있겠다.말의 머리가 작기나 한가 귀여운 맛도 하나도 없을 텐데 말이지 하는 생각도 들 것 같다.그런 분들에게 커다란 나무둥치나 딱딱한 돌덩이 같은 말의 머리를 감싸안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 가능해지는 지점에서 희열이 활화산처럼 터져나오는 거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되려나 모르겠다.

말의 근본은 초식동물이다.하루 종일 초원에서 풀을 뜯으면서도 언제 포식자가 나타나 자기를 낚아챌 지도 모르니 경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입장이다.말 눈이 툭 튀어나온 채 얼굴의 양 옆에 붙어있는 것은 분명 주변을 단단히 살피라는 의도이다.그러니 눈이 달린 얼굴을 어딘가에 내맡기면 생존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일이 된다.말에게 얼굴은 타자에게 내어줄 수 없는 절대적 무엇이다.

그래도 말의 입장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 사람 입장에서 인감도장을 내어주거나 은행 보안카드에 적인 숫자 전체를 입력하거나 개인신상정보를 노출시키는 위험에 비유하고 싶다.이런 패를 내보일 때는 상대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말이 사람에게 얼굴을 내맡길 때는 당신을 무조건 믿어요,이기 때문에 말에게서 그런 대접을 받는 존재가 된 자신의 존재감이 고양되고 그렇게 만들어준 말이 한없이 예뻐질 수밖엔 없다.

아,어제 일을 말하려다 옆길로 새고 말았다.어제 칸타를 탔다.요즘 칸타는 열 살이 된 기념은 아니지만 드로레인이나 사이드레인을 걸지 않고 운동하는 공부에 들어갔다.보조레인을 걸고서 너무나 잘하는 칸타지만 그걸 제거하면 양상이 달라졌다.보조레인에 너무 의존하게 된 결과다.말이 자신을 속박하는 보조레인에 심리적으로 얽매인 꼴이니 칸타가 그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를 살리기로 했다.서양에서 근대에 이르러 여성을 살인적으로 졸라매던 코르셋을 집어던지고 치렁치렁하던 치마길이를 싹둑 잘라버린 여성해방운동에 버금가는 혁신이 아닐까 싶다.

작년에도 한차례 혁신을 도모했었지만 그만 포기해버렸었다.보조레인을 제거가자 칸타가 멘붕에 빠져 코를 하늘로 향한 채 날아다녔기 때문이다.너무나 감당이 안되어 그냥 편하게 살자는 심정으로 관두었었다.그러다 올해 다시 시도해보니 칸타도 나이가 들었는지 가능성이 보였다.최소한 코가 하늘과 땅의 중간을 가르키고 있었고 제 아빠가 기승할 적엔 제법 굴요가 이루어진 양상을 보였다.칸타의 운동방향이 설정되었으므로 가끔 기승하는 나나 이모도 보조레인 없이 기승을 하게 되었다.

칸타는 제 아빠가 타면 특유의 조용한 엄격함 때문에 원하는 일을 많이 받아들이지만 엄마나 이모에 대해서는 응석을 많이 받아주는 편이라 제 하고싶은 대로 하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지킨다.

어제 내가 넓은 야외마장에서 혼자 칸타를 타고 운동을 시작했을 때 햇빛은 거침없이 신장되고  바람은 활발하게 - 신장? 활발?승마용어 아닌가 - 불고 하니 칸타가 신바람이 났다.코끝으로 하늘을 툭툭 밀어가면서 거침없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굴요의 반대상황에 있는 말이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 발레리나가 눈빛을 천상으로 향한 채 발끝으로 서서 가볍게 튕겨 날아오르듯 무대를 누비고 다니는 모습이 떠오른다.발레리나 놀이를 하는 말의 잔등에 붙어있는 일은 장대끝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고 매달려야 하는 것처럼 반동이 위태롭고 불안정하다.그렇다고 매번 고삐를 당겨 통제해서는 돌이킬 수 없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으니 고삐님께 애원할 수도 없다. 한 30분 이행을 시계추처럼 왕복하다보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그래서 햇빛과 바람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실내마장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칸타도 흥분이 가라앉는 듯 차분해졌다.뛸 거 어지간히 뛰었으니 구보에 대한 욕망도 해소된 상태다.곧이어 평보하는 칸타의 목이 부드러워져서 휘어진 버들가지처럼 낭창 숙여졌다.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삐 접촉을 단단하게 하니 칸타 머리가 목쪽으로 들어와 다소곳해졌다.자연스러운 굴요가 이루어진 거다.그 다음부터 한 십여분은 구름에 탄 것처럼 황홀했다.

말에서 내려 황홀한 기분 그대로 칸타의 머리를 품에 감싸안으니 칸타가 그대로 안겨왔다.운동으로 덥혀져 따뜻하고도 축축한 말 머리였다.내가 안아주는 대로 안겨오는 말 머리는 흡사 강보에 쌓인 갓난아기처럼 연약하고도 사랑스러운 존재였다.먼저 칸타의 귀에 내 볼을 대보았다.귀 안쪽에는 보드라운 솜털이 잘 조성해놓은 숲처럼 빼곡하게 나 있어서 볼에 비빌 때 감촉이 무척 좋았다.그 다음으로 칸타의 눈썹으로 내 얼굴 피부의 가려운 곳도 쓸어보았다.손바닥으로 말 눈을 만지면 꼭 계란 한 개 정도의 크기로 잡힌다.양 눈을 모두 비빈 후엔 콧잔등 주변의 실크처럼 부드러운 감촉도 느꼈다.그러는 동안 칸타도 기쁨에 충만하여 그 느낌 그 자체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었다.순간 오늘 내가 칸타와 기승운동을 하며 도달하고자 했던 목표가 이 일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말과의 포옹이 끝난 후 함께 실내마장을 걸어나가는 기쁨 또한 크다.수장대에 데려간 칸타의 머리에서 얼른 굴레를 벗겨주고서 수건을 가져왔다.수건놀이도 참 즐거운 시간을 선사한다.사각형의 수건을 펼쳐서 양손으로 잡고 말 얼굴 앞에 대고 들이대,하면 칸타가 얼굴을 수건에 묻는다.그러면 내가 양손을 좌우로 살살살 움직일 때 칸타는 머리를 상하로 움직여서 제 얼굴의 가려운 곳을 스스로 긁기도 했다.한바탕 얼굴을 문지르고 귀 주변이나 목 아래에 난 땀을 세심하게 닦아주면 칸타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개운한 표정을 짓는데 그때의 내 마음도 참으로 후련하다.

말이 무뚝뚝하다고?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사람과 교감을 나누는 말은 마음으로 귀여운 개나 고양이만큼 작아져서 사람의 품 안에 쏘옥 들어올 줄 아는 한없이 애교스럽고 사랑스러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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