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에는 발굽쿠키가 나온다.  빵집에서 파는 쿠키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이 아니다. 이 쿠키는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아니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보면 아이 손바닥 크기의 쿠키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일 이 쿠키를 접시에 가지런히 담아서 홍차와 함께 내놓는다면 성미 급한 손님이 집어서 덥석 베어물지도 모른다. 물론 덥석과 동시에 '에페페'하고 뱉어내겠지만 말이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발굽쿠키는 이름 그대로 말의 발굽이 찍어낸 것이다. 말발굽 바닥은 오목하다. 식당에 갔을 때 나오는 개인용 나눔접시 정도의 깊이랄까? 그렇게 오목하다 보니 마방 바닥에 깔았던 톱밥이 발굽 안에 갇혀서 단단하게 다져진다. 서로 뭉친 채 답답한 어둠의 세월을 보내다가 말이 마방 밖으로 나왔을 때 발굽의 탄력에 의해 톱밥은 광복을 맞이하여 환한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발굽쿠키란 이름으로!

 

물론 나만의 명명이고 세상 사람들이 이 사물에 대하여 주의깊은 눈길을 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발굽쿠키를 발견했을 때 기분이 좋아지고 발견한 갯수만큼 더 많은 행운이 나에게 찾아올 것 같은 주술에 사로잡힌다.

 

화요일에는 발굽쿠키가 나온다. 왜 화요일이야? 누가 묻는다. 승용마가 마방에서 지내다가 운동이라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발굽을 파낸다. 발굽에 낀 톱밥을 제거하지 않고 내보내서 운동이나 방목을 했을 때 습기를 머금은 톱밥은 서로 뭉쳐서 '공구리'라도 친 것처럼 단단해진다. 그러면 발굽이 불편해져서 기능에 제약을 받을 것이다.

 

보통 말이 하루에 한 번은 밖에 나오므로 발굽청소를 하게 되어 평상시에는 바닥에 가루나 조금 떨어질 정도다. 그러나 화요일은 상황이 좀 다르다. 일요일 저녁부터 월요일을 꼬박 지내고 화요일까지 말이 마방에 머물렀기 때문에 발굽바닥엔 톱밥이 잔뜩 껴서 다져지고 또 다져진다. 쿠키반죽의 숙성시간 정도라고 할까. 그러다 짜잔~ 밖으로 나오면 발굽 톱밥의 대부분은 으스러져서 뭉개지지만 용케 형체를 갖춘 채 형상을 남기면 발굽쿠키가 된다.

 

가끔 어떤  쿠키는 두툼하니 모양도 참으로 예쁘다. 그런 쿠키를 보면 들어서 앞뒤로 살펴보며 감탄을 하기도 한다. '음 정말 잘 생겼군!' 그 쿠키가 그렇게 특별한 까닭은 쿠키틀이 너무 소중한 존재라서 그럴 것이다. 말에게 발굽이란 생명이다. 말을 하나의 아이콘으로 나타낸다면 발굽일 것이다.

 

오래 만나지 못한 지인에게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준수하게 생기고 앞날이 창창한 젊은 말이 있었는데 그만 안락사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연이었다. 사람이 끌고 어딜 가다가 난데없이 지나가는 오토바이에 놀라 말이 화들짝 놀랐는데 운이 없었는지 발목을 접질러 부위의 뼈가 산산조각 났다고 했다.  지인이 마음 아파하고 안타까워한 대목은 그 다음 상황이다. 수의사의 진단 후에 말이 앞으로 승용마로서 살아갈 수 없는 지경이라면 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겠다. 관계자들은 무슨 결정이 그리 어려웠는지 일주일 이상 말을 방치했다. 그러는 동안 말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극심했고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지인의 심정도 참담했다고 한다. 관계자가 말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생각해보았다면 차마 그러지는 않았으리라.

 

(못난이 발굽쿠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어린말들이 다치거나 부상으로 죽음에 이르는 일은 흔한 모양이다. 뿐만 아니라 산통으로 세상을 하직하는 말의 소식도 여전히 들려온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말이 살아가는 세상이 힘들기 때문에 마방복도에서 만나는 발굽쿠키가 '오늘도 무탈하군요. 좋은 하루!' 하고 사인을 보내오는 것 같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말이 그 증표로 발굽쿠키를 보여줌으로써, 마찬가지로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내라며 행운의 부적을 보내주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카페가 있는데 커피맛도 좋을 뿐더러 사이드메뉴로 당근쿠키를 맛볼 수 있다. 그날 바로 구워낸 쿠키인데 한입 베어물고 커피를 홀짝거리면 말생각도 나면서 금세 기분이 달달해진다. 만일 내가 카페 주인장이 될 날이 온다면 꼭 발굽쿠키를 구워서 팔 것이다. 아몬드를 채썰어 넣고 통밀을 거칠게 빻아 반죽해서 구워내면 오리지날 발굽쿠키 느낌이 날 것 같다. 발굽쿠키를 먹으면 행운이 찾아온대요! 하고 메뉴판에 써붙이면 날개 돋힌 듯 팔리지 않을까? 아 ~ 오늘도 나의 상상은 날개를 달고 구만리를 날아간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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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말이 되자 보리에 이삭이 났다. 이삭이 일제히 돋아나자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줄기의 녹색과 이삭의 연두색이 조화를 이루며 빛을 받아 반짝이고 바람에 넘실거릴 때 바라보고 있으면 무아지경에 빠질 것만 같았다.

 

 

 

보리밭이 이렇게 목가적 낭만의 분위기를 선사할 줄은 몰랐다. 보리밭에서 만난 원장님이 ,보리 심어놓으니까 아주 멋지네요, 하신다.

 

 

 

작년에도 보리를 심기는 했다. 그런데 이삭이 달리기 전에 베어서 말에게 먹였으므로 이런 장관을 감상하지는 못했다.

 

 

 

 

이 보리는 지난 겨울이 오기 전에 심은 것이니 추운 겨울을 견디고 살아서 자란 보리다.

 

 

 

 

한겨울 동안 보리밭은 풀이 누렇게 말라죽은 형상이었다. 누가봐도 추위에 다 얼어죽었구나 했다. 그거라도 아쉬워서 우리 칸타랑 아마르는 종종 누렇게 동사한 보리싹을 뜯어먹곤 했다.

 

 

 

 

그러다 기적이 일어났다. 이런 일에도 기적이란 말을 써도 된다면. 대지가 따뜻해지면서 땅이 꿈틀거리는 듯하더니 초록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보리가 부활했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쯤 모습이다. 난 아직도 두꺼운 옷을 껴입었다. 칸타가 엄마가 어서 보리싹 갖다주기를 기다리며 바라본다.

 

 

 

 

칸타가 얻어먹는 녹색잎은 그야말로 어린싹 수준이다. 이런 사이즈 풀은 뜯어다주기도 애매하다. 손에 잘 잡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저 밭에 말을 데리고 가서 뜯기는 것이 좋은데 두 마리를 한꺼번에 풀뜯길 수 없어 아쉽지만 좀 뜯어다주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했다.

 

 

 

 

 

                                   칸타의 풀에 대한 갈망은 채워지지 않았다. 엄마 더 줘!

 

 

 

 

                                  에구~ 엄마 힘들단다

 

 

 

 

                                   더 먹었으면 좋겠는데…

 

 

 

 

칸타는 채워지지 못한 헛헛함을 끙끙이로 달래고 아마르는 잇몸의 빈곳에 혀를 밀어넣어 채우는 행동을 하니 ,말의 심리적 공허함이 그렇게 나타나는가 싶어 웃게 된다.

 

 

 

 

내가 보기에도 좀 그렇다. 보리밭이 보이는 곳에 말을 세워놓고 못가게 하니 말이다. 맛난 것을 눈앞에 두고 보고만 있으라니 아쉬운 마음은 나도 말 못지않다.

 

 

 

 

그러다가 이런 날이 왔다. 보리의 키가 내 하반신을 가릴 정도로 풍성하게 자랐다.

 

 

 

 

                   칸타,아마르가 곧 보리만찬을 한다고 기대와 설레임으로 흥분해서 들썩들썩 한다.

 

 

 

 

           맛난 것 앞에서는 어미고 자식이고 다 소용없다.  둘 사이에 신경전이 팽팽하다.

 

 

 

 

새치기 명수 아마르가 보리이삭을 제자리에 놓기도 전에 한입 콱 베어물었다.동작 한 번 참 빠르다.

 

 

 

 

그 정도에 지는 칸타가 아니다. 더 놀라운 필살기가 있다. 양동이를 자기쪽으로 확 쓰러뜨려서 유리한 상황을 만든 후 머리로 방어하는 전술을 구사한다. 혀를 내두르게 된다.

 

 

 

 

                                   아무래도 아마르가 칸타보다 공간점유력에서 밀려 보인다.

 

 

 

 

다른 말 같으면 칸타가 국물도 안 떨궈줬겠지만 그래도 제 속으로 낳은 자식이 아닌가. 결국 아마르가 맘껏 먹도록 하니 어느덧 사이좋게 만찬을 즐긴다.

 

 

 

 

 나는 아이들 뱃속으로 보리이삭이 꾸역구역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내 배가 불러오는 듯 흐뭇하다. 넘실거리는 보리의 물결을 바라보며 있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상태가 된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랬다. 나이 먹을수록 문화생활과 여행이 인생의 기쁨인 것 같다고.  그랬더니 상대는, 거기다가 맛난 것 먹으러 다니는 것도 추가해요,라고 말했다.

 

 

 

 

 말도 그런 것 같다. 말은 문화생활 대신에 운동 잘하고, 여행은 못가더라도 산이나 들판 등 자연을 원없이 바라보고, 사료나 건초 외에 특별한 먹거리를 맛보는 것이 삶의 낙이 될 것 같다.

 

 

 

 

                                  둘은 오늘 그런 날을 맞았다.

 

 

 

 

보리는 조금만 베면 한 양동이 가득이다. 이날 아이들은 각각 한 양동이씩을 먹었다. 이삭에 곡물이 함유된 먹거리이므로 말에게 줄 때는 많이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 또한 입맛이 원하는대로 무한정 먹을 수 없는 다이어트 현대인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칸타야 무슨 여자애가 그렇게 그악스럽게 먹어? 좀 예쁘게 먹으면 안되니?

 

 

 

 

 

                                           이렇게요?    그래 참 얌전하구나.

 

 

 

 

                                   아마르는 원래 얌전하게 먹어요,그쵸 할머니?

 

 

 

 

                                                    그래,얌전하면서도 엄청 빠르지

 

 

 

 

보리밭과 말이 나를 힐링하게 한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지난 겨울 얼어죽었다고 생각했던 보리가 부활하듯 살아나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존재감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혹시 인생도 그런 것 아닐까.

 

그저 지나가버린 것들, 실패했다고 끝나버렸다고 생각한 채 사라져버린 무수한 사건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잠자고 있는 상태로 머물러 있다가 미래의 어느 날에 보리처럼 찬란히 살아날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맛나게 먹는 동안에 이 주변에서는 할방님이 잔돌들을 수거한다.

 

 

 

 

                         아이들 밟고 다니는 길에서 하나라도 돌을 치워주려는 마음이다.

 

 

 

 

 

 

 

 

 

 

                                  돌들의  이산가족 상봉의 현장. 다시는 흩어지지 마세요!

 

 

 

 

열린 문으로 마방이 보인다. 요즘 문 근처 마방에서 지내는 말들이 밖을 내다보느라 넋이 나간 모습을 자주 본다. 시선으로나마 자연을 즐길 수 있어서 다행이다.

 

 

 

 

모심기 전의 논.

 

 

 

 

아파트 베란다에도 화초를 가꾸며 자연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처럼 승마장에도 식물이 자라는 공간이 있으니 휴식과 즐길거리가 되어 좋다.

 

 

 

 

기승운동 끝나고 마주님과 함께 산책나온 말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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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트 디즈니사의 새로운 <신데렐라>가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영화로 개봉했다. <신데렐라>라면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 아닌가, 그런 이야기를 다시 만들었을 때는 뭔가 새로움이 입혀져 있을 것이다, 과연 그 새로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나로 하여금 엄마와 함께 영화보는 여자아이들 틈에 섞여 이 영화를 보게 만들었다.

 

 

 

 

 

 

 영화를 보니 대표적인 새로움이라면 주인공 신데렐라가 어디를 갈 때 뚜벅이로 그냥 걸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다닌다

는 점이다. 나는 왕자나 공주가 나오는 영화를 볼 때 그들이 어떤 말을 타고 나오는지 유심히 보는 편이다. 그 말이 보여주는 개성이야말로 그 말을 탄 인물의 캐릭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신데렐라 상대역 왕자는 숲에서 처음 신데렐라를 만났을 때 자신을 견습생이라고 소개한다. 물론 견습일을 하는 직업이 훗날의 왕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지만 . 왕자의 말은 견습생(?)의 말답게 듬직하고 성실해 보인다.

 

 보통 동화에서는 남자주인공이 백마를 타고 나온다. 흔히 '백마 타고 나타난 왕자' 라는 말처럼 백마는 환상성의 이미지다. 뭔가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줄 구원자 이미지다. 그러나 이번 <신데렐라>영화에서는 왕자가  백마를 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남자가 아닌 여자주인공 신데렐라가 말타는 것으로 등장한다. 그 점이 새로워서  마음에 든다. 신데렐라의 성격은 디즈니사의 전작 <겨울왕국>의 공주자매처럼 주체적이고 강인하고 운명에 맞서 싸우고 개척하는 여성상이다. 신데렐라는 결코 신분상승을 꿈꾸다 운좋게 꿈을 이룬 여성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신데렐라는 수동적이거나 나약하지 않기 때문에 강인한 성격을 드러내는 서사적 장치로 신데렐라가 마구도 채우지 않은 알말을 타고 거침없이 달리는 모습이 잘 어울린다. 신데렐라가 강인한 면모만 지닌 것은 아니다. 내면에는 따뜻한 마음도 지녔다. 그것은 보잘것 없고 하찮은 동물에 대한 배려에서 잘 나타난다. 극중 신데렐라의 절친은 생쥐가족이다. 영화에서 생쥐들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표정이 자주 클로즈업 된다. 신데렐라는 엄마에게서 받은 유언대로 '용기' 와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으려 한다. 강함과 부드러움의 균형이야말로 신데렐라 캐릭터의 핵심이다. 그러한 양면을 통합시키는 이미지를 구현한 말로서 흰 바탕에 검은색이 바위빛깔처럼 얼룩덜룩한 모색의 말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여담으로 신데렐라의 말이 내가 알고 있는 '카포테' 라는 말과 너무 닮아서 영화를 보는 내내 이루 말할 수 없는 친근감을 느꼈다.

 

 

 

 

 

 말은 영혼의 동반자라는 의미에서 볼 때 파트너인 사람을 어떤 운명적인 상황으로 데려다준다. '데려다준다'는 모티브는 수많은 문학이나 영화의 스토리에서 반복된다. 이번 <신데렐라> 이야기에서는 신데렐라를 왕자에게 데려다준다. 신데렐라는 숲에서 사냥하는 왕자일행에게 쫒기는 사슴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런 후 신데렐라의 말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바람에 왕자가 그것을 발견하고 쫒아가 그녀의 말을 멈추게 한다. 신데렐라와 왕자는 그 순간 서로의 눈을 바라보게 되고 이끌리게 된다. 신데렐라와 왕자가 서로의 말 위에 앉아 빙글빙글 돌면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로맨틱하고 인상적인  첫만남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영화에서는 훗날 왕비가 되는 신데렐라가 로또 맞은 것처럼 신분상승한 바가 아니고 스스로의 내면의 가치를 고귀하게 간직하고 가꾸어온 결과물로서 그녀가 당연히 누릴 지위를 찾아간 것으로 그려진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나타난 대모요정이나 왕궁의 연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도와준 동물은 모두 신데렐라의 댓가를 바라지 않은 친절과 따뜻한 마음 때문에 그녀를 도울 수 있었다.

 

 

 

 

 

 

 

 부모님의 죽음, 새엄마와 언니들의 구박과 훼방 등 신데렐라의 앞길을 가로막는 운명의 장벽은 높았지만 신데렐라가 자신의 고귀함을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으며 자기를 넘어서서 타인에게 친절과 배려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해피엔딩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심리학적으로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부정적 의미를 넘어서서 ,신데렐라는 세월이 흘러도 다시 보게 만드는 고전이게 만든다.

 

 또한 우리에게 다가온 새로운 모습의 신데렐라가 말을 타고 나타났다는 것은 ,말이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잘 보여준다.

 

 

 

 


신데렐라 (2015)

Cinderella 
7.4
감독
케네스 브래너
출연
릴리 제임스, 리처드 매든, 케이트 블란쳇, 헬레나 본햄 카터, 홀리데이 그레인저
정보
로맨스/멜로 | 미국 | 113 분 | 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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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살아 있어!

 

 

 

 진짜 살아 있다구 ~ ~ ~

 

 

 

 

화창한 주말에 칸타와 아마르가 밖에 나왔다. 1주일 전 큰 비가 내린 이후에 운동장이 질퍽거려 나와 놀 수가 없었다. 이날 운동장은 보송보송, 햇빛은 쨍쨍하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날씨였다.

 

 밖에 나온 아이들이 처음엔 눈이 부신지 몇 번 깜박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고 킁킁 땅조사를 시작한다.

 

 

                                     

 

 뒹굴 자리를 고르는 것이다. 그런 후 둘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러덩 눕더니 힘차게 등을 땅에 비벼댔다. 그 모양은 바다에서 막 건져올린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바닥에 던져졌을 때 팔딱팔딱 뛰어오르는 격렬함과도 흡사했다.

 

 

 

 대여섯 번 정도인가. 가려운 곳이 시원해졌는지 드러누운 자세에서 엉덩이로 앉았다가 뒷다리 힘으로 벌떡 일어나는 순서로 몸을 세우더니 꼬리마저도 세웠다. 기분이 붕 떠서 매우 좋아진 거다. 그 다음은 기쁨의 세레모니를 할 차례. 이때 나타나는 발걸음이나 몸의 동작은 승마할 때에 나타나지 않는 자유롭고도 현란한 몸짓이다. 네 다리는 제멋대로 차고,뿌리고 난리가 난다. 우리도 한때는 그랬다. 어렸을 적에 기쁨에 사로잡혔을 때 '오도방정'을 떨며 마음껏 기분을 발산했다.

 

 

 

 

 

 요즈음, 아이들이 마방에서 나와 노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몸짓에서 새로운 언어를 발견한다.

 

 

                 '어? 우리 살아 있네. 살아 있는 거 맞네. 그치그치?'

 

 

  이런 정서적 반응은 어디서 조난을 당하여 구조를 기다리다가 막 구조되었을 때, 혹은 체력을 넘어서는 산행을 하고났을 때 그 상황이 해소되면서 찾아올 법하다. 그런데 칸타와 아마르는 그저 실내공간에 있다가 야외로 나왔다는 일상적인 변화에도 그토록이나 희열에 찼다.

 

 동물들이 대부분 그러한 것 같다. 오래 전에 집에서 키우던 말티즈 종 꼭지는  해가 떠서 식구들이 잠을 깨고 자기와 눈이 마주쳤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아침마다 난리법석을 피웠다.

 

 

 문득 생각해보았다.

매일매일 삶의 의미가 뭔가 하고 골똘히 생각만 하는 나보다는 그저 단순하게 사는 칸타와 아마르가 더 행복한 건 아닐까?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더 행복할 줄을 아는 건 아닐까?'

 

 

 

 행복할 줄 아는 능력에서 더 열등한 나는 아이들의 환희에 찬 몸뚱이와 나 사이에 연결된 투명한 대롱으로 그들이  발산하는 에너지를 흡입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르가 말을 할 줄 안다면

 

"할머니는 말야.내가 행복할 줄 아는 법을 그렇게나 가르쳐줬는데 만날 고민을 싸짊어지고 살아?" 이럴 것 같다.

 

 

 나에게 오래 된 책 한 권이 있다.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대담집을 엮은 <신화의 힘>이란 책인데 1993년에 구입하여 여지껏 소장한 책이다. 최근에 다시 꺼내어 펼쳐보니 군데군데 밑줄과 메모가 많았다.

 

옛 사진집을 들춰보는 기분으로 좀 읽어보니 그 책이 그간 살아온 내 인생에 길잡이가 되어줬구나 싶었다.세계적인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세상을 떠난 후 그를 기리기 위하여 기획된 책인데 대담집이니만큼 조셉 캠벨의 육성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어서 좀 옮겨볼까 한다.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이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예전에 나는 어느 글에선가 우리가 말과 만나고 승마를 하는 것은 '싱싱해지기 위해서' 라고 쓴 적이 있다. 조셉 캠벨이 말한다.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깊고,풍부하고,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는 책의 다른 부분에서 말하길 신화를 '도로표지' 나 '본'이라는 언어에 빗대어 표현한다. 만일 도로에 도로표지가 없다면 차들이 엉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현대인이라면 잘 알 것이다. '본'은 원형이란 언어에 가까울 것 같다.

 

 오래 전에 내가 퀼트조끼를 만드느라 지인이 갖고 있던 옷본책을 본 적이 있다. 셔츠,바지,스커트,원피스 등등 이런 옷들의 원형들이 모여있는 종잇장을 넘기며 신기했다. 길만 나서면 어딜 가나 즐비하게 늘어선 옷가게에 넘쳐나는 수많은 옷들, 그 옷들의 원단,색깔,무늬, 디자인은 모두 달라도 바지면 바지,셔츠면 셔츠일 수밖에 없는 원형이 있다. 그 옷을 만들려면 아무리 유행에 따라 변화를 주더라도 '본'에서 응용되어 파생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천차만별의 인생이 있지만 각각의 안에 깃든 공통점,바로 '본'이 어딘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본'을 조셉 캠벨 같은 신화학자는 신화가 그 '본'이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말은 우리 삶을 싱싱하게 만든다.

신화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에게서 어떤 '본'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의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의문에 따라오는 꼬리처럼 또다른 의문도 떠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순간 요즘 예매율 1위라는 <빅히어로>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주인공 히로가 아이디어가 꽉 막히는 순간에 확 뚫어주던 방법은 바로 '다르게 보기'였다. 익숙한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았을 때 여지껏 보이지 않던 뭔가가 확 보이기 시작했던 거다.

 

 

 

 

말을 다르게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조셉 캠벨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한다.

 

인디언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나무,돌,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나는 말에 관해서라면 그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한다.

다른 존재를 <그대>로 바라보면 그 존재가 가진 신성을 깨닫게 되고 그 신성에서 흘러나오는 생명력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만일 존재를  <그대>가 아니라 <그것>으로 바라보게 되면 비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메리카 신대륙 개척자들이 들소의 가죽을 벗기기 위하여 수십만 마리를 초원에서 학살한 사실이 있다. 들소가 <그것>들이었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만행이었을 것이다.

 

말도 그저 하등한 동물로서 '탈 것'으로 바라본다면 '탈 것'에 불과한 <그것>에서는 샘솟는 생명력 따위가 있을 수 없다.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할 소리가 있다. 말이 내쉬는 푸우푸우 하는 숨소리다. 칸타와 아마르가 환희에 차서 꼬리가 올라갔을 때 그 꼬리의 춤사위에 가락을 맞추는 소리가 확장된 콧구멍으로 울려퍼지는 숨소리.

 

 

 

그 숨소리에서 엄청난 원초적 기운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 뿐일까?

수많은 말 영화에서 말이 등장했을 때 코로 내뿜는 말 숨소리를 음향으로 크게 울리도록 효과를 집어넣는 것에서 거기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보편적 요소가 있지 않나 생각해보았다.

 

 

 

 

위에서 어쩌다 길게 주절주절 늘어놓은 장황한 이야기를 한데 그러모아 집약한다면 조셉 캠벨의 바로, 이 말이다.

 

삶의 황홀!

 

모이어스 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 있다는 것뿐입니다.

너무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그만 가장 중요한 내적 가치,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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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상점들이 즐비한 역전 제과점의 아들로 자랐기 때문에 나는 자영업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그들에게는 일의 반대가 휴식이 아니라 손해다. 그래서 그들은 휴일에도, 심야에도 가게 문을 닫지 않는다.

.

.

.

  그러니 어머니가 평생 만든 단팥죽과 팥빙수의 양이 얼마나될지는 상상조차 못하겠다. 그 그릇들을 쌓는다면, 아마도 꽤 높은 탑이 되리라. 내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된다한들, 그 탑 아래에서는 고개를 숙여야만하겠지. 그러고보면, 어머니는 참 여러가지를 만들었다. . . . 단팥죽 맛이 특히 일품이었다. 돈을 받고 팔아야만 하는 것이니 잘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비법은 내가 물려받았으니 나중에 소설이 잘 안쓰여지면 단팥죽 가게라도 차릴까보다. 팥죽을 만들때면 꼼짝없이 잡혀서 나무주걱으로 찜통에서 끓고있는 팥죽을 저어야만 했으니까.

 

  몇 년 전에 몽골에 갔더니 사람들이 마유주라는 것을 마시고 있었다. 내가 신기하게 여겼더니 말젖을 짜서는 밤새 나무주걱으로 휘저으면 술처럼 발효가 된다며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더라. 그래서 따라가봤더니 술에 취한 아버지들 뒤에서 팥죽을 저을 때의 내 나이 또래의 소년이 말젖을 젓고 있었다. 그 방에는 전등도 없었다. 어른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 소년은 말젖을 젓고 있겠지.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으나 어디를 둘러봐도 사방이 모두 똑같은 풍경이라 그게 더 무섭고 절망스럽던 몽골의 평원에서 나는 그 소년을 붙잡고 두 마리 망아지처럼 울고 싶었다.

 

                                                        

                                                                                   '소설가의 일'중에서

 

 

 


소설가의 일

저자
김연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5-01-13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매일 글을 쓴다. 그리고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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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몽골의 밤은 깊다. 반구의 하늘은 별들로 가득 차고, 광활한 초원의 점 하나처럼 찍혀있는 게르 의 촛불은 아늑하고 호젓하다. 빙 둘러 앉으면 그 중심에 술병 하나쯤 놓이게 마련이다. 둘러앉은 여행자들이 한 점을 응시하며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밖에서는 모래바람이 울부짖고, 밤이 칠흑처럼 깊어갈수록 게르 안은 방주처럼 아늑해진다. 술잔을 나누며 지나온 길들을 되새기노라면, 누가 시키지않아도 각자가 가슴에 차곡차곡 접어두었던 삶의 수첩들을 펼쳐 놓게 마련이다.

 

  취기에 못이겨 게르 밖으로 나서면, 끝모르게 깊은 어둠이 사방을 둘러싸고, 세상의 중심에서 덩그러니 선 자신을 만나게 된다.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모래바람만이 원귀처럼 울부짖는다. 무어라 악을 써도 그 소리는 이내 바람에 날아가버린다.

.

.

.

 

  세상의 모든 소리를 앗아가는 모래바람과  깊은 어둠에 기대어 여행자들은 자신의 가슴 속에 꽁꽁 쟁여놓았던 말들을 토해내게 마련이다. 바람은 세상의 어떤 비밀스럽고, 부끄럽고, 저주스러우며 참혹한 소리들일지라도 한 도막도 남김없이 빨아들여 어디론가 날려보낸다. 언제 어디에서 그렇게 가슴 속에 쟁여 둔 말들을 통렬히 외쳐볼 수 있었던가. 언제 어디에서 마음껏 비틀거려보고, 가슴을 쥐어뜯어가며 울어보고, 큰 소리로 악을 쓰고, 취해 볼 수 있었던가. 대개 그러한 절규의 끝은 울음이다.

 

  모래바람이 부는 고비사막의 밤은 모든 걸 허용하며, 그 광포한 바람으로 모든 걸 너그러이 받아들인다. 소리도 소멸하고, 형상도 사라진 황야에서 누구도 들을 수 없으며,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나를 만나게 된다. 고비의 벌판에서 모래바람이 부는 밤이면 , 술잔을 내려놓고 게르 밖으로 나가보라. 걷는다는 생각마저 느껴지지않는 깊은 밤의 중심에 서서,

 

자신의 가슴 속에 꿍쳐 두었던 말들을 바람에 하염없이 날려 보내보라

 

                                                                                             '당신에게, 몽골' 중에서 

 

 

 


당신에게, 몽골

저자
이시백 지음
출판사
꿈의지도 | 2014-07-04 출간
카테고리
여행
책소개
더는 물러날 곳이 없을 만큼 끝까지 와버렸다면, 이제는 몽골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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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은 말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원'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살다가 한번쯤은 몽골의 끝도 없는 초원을 밟아보고, 그 땅에서 태어나 자란 말을 타고서 바람처럼 달려보는 꿈을 꾸어본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아직 몽골땅을 밟지 못했다. 언젠가는 가봐야지 하는 생각만 책갈피에 끼워둔 나뭇잎처럼 마음에 묻어 두었다. 그런 내 앞에 몽골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 자꾸 나타나는 것을 보면 언젠가

몽골에 간다는 그 마음을 잊지 말라고 재촉하는 것 같기도 하다. 몽골에 가면 뭔가를 만나게 될 것 같다.

  위에 소개한 김연수의 산문과 이시백의 글은 모두 몽골에 갔던 경험담이 소재다. 각각 글의 장르나 다루는 이야기는 달라도 어떤 공통점이 느껴졌기에 한데 모아본 것이다. 공통점이란 바로 내면에 아로새겨진 맺혀있던 감정과의 대면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김연수의 산문에서 필자는 유년의 기억 한자락을 들추어낸다. 역전 제과점 아들로 자란 탓에 일손이 모자랄 때 고사리손이라도 필요했던 그 시절 말이다. 솥단지에서 끓는 팥죽을 젓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젓는 일을 게을리 하면 금세 죽이 바닥에 눌어서 탄내가 피어오른다. 어린 팔 근육으로 고단한 노동을 하면서 아픈 것은 팔뿐이 아니었을 터. 고단한 삶이 무엇인지 일찌감치 엿보아버린 후에 남겨진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 감정은 잊혀진 채 지나가버렸나 했는데 몽골에서 밤새 마유주를 젓는 아이를 보며 작가의 가슴에 되살아났던 거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두 마리 망아지처럼 울고 싶었다.'

 

  이시백 작가의 사색의 공간은 몽골 중에서도 고비사막에 지어진 게르 안이다. 게르는 유목민의 전통적 이동식 가옥이다. 이런 가옥에서는 바깥의 소음, 자연의 음향이 생생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어서 바깥에서는 바람소리 요란한데 그와 대조적으로 게르안은 사위가 조용하다. 그럴 때 사람은 차단했던 이성의 빗장이 저절로 풀어짐을 느끼게 된다. 자연의 소리는 내면으로 접속하여 들어가는 암호나 마찬가지다. 평소 겹겹이 두르고 살았던 거추장스러운 생각들이 사막의 바람에 훠이훠이 날려간 듯 마음이 가벼워졌을 때 필자가 만난 것은 역시나 울고싶어지는 맺힌 감정이었다.

특히나 한국땅에서는, 그것도 남자로 태어났다면 쉽게 울 수 없는 법이다. 남자는 평생 세 번 우는 것이고, 아무 때나 울면 고추 떨어진다는 삶의 지침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박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면서 울고싶어지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나와는 달리 남편은 이미 몇 차례 몽골에 다녀왔다. 다녀올 때마다 엄청난 얘기보따리를 풀어놓았었다. 듣고 지나간 얘기 중에 이런 대목이 떠오른다. 비가 오고 강물이 불었는데 몽골 말몰이꾼이 모는 말무리가 강물 앞에 다다랐고 그 강을 맨몸으로 건너야 했다. 몰이꾼의 노련한 신호에 따라 말들은 하염없이 몸에 차오르는 거친 물살을 마다않고 강을 건넜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했던가. 그때는 "울었어? 왜?" 했던 것 같은데 지금에야 그 마음자리가 조금이나마 짐작이 된다. 언젠가 나도 몽골에 간다면 몇 배는 더 울음바다를 쏟아내지 않으려나.

 

'데려다 준다.'

 

 말은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다주는 존재이다. 물론 옛날에야 아주 오랜 세월 말이 제 등에 사람을 태워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데려다주었다.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많이 옮겨주는가가 말의 효용가치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빠르게 ,많이 옮겨주는 일에서 다른 대체수단이 생겼으므로 그 일에서 말은 해방되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을 찾아나서고 말에게 빠져들곤 한다. 그 이유를 하나 알 것 같다. 사람들이 "뭐지? 뭔데 묘하게 빠져들게 만드는 거야?"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비밀 같은 거 말이다.

 

 말은 우리를 깊숙하고 은밀한 내면의 감정과 만나도록 안내한다. 말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가보면 내가 말라죽으라고, 숨막혀죽으라고 가두어두었던 내면의 지하실이 열려서 그 안의 것을 두려움 없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몽골로 여행을 떠난 감수성 풍부하고 예민한 작가 두 명이 전하는 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이 글에 실은 사진은 몽골의 사진작가 Oktyabri Dash 님의

' The beauty of mongolia' 에 실린 작품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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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에서 발견한 말(馬)

 

 

 

 

'참다운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삶일까?'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인가?'

 

언제부터인가 이런 문제들이 마음을 온통 차지하게 되었다. 내가 온전히 젊었더라면 배낭 하나 짊어지고 운동화끈 질끈 동여매고서 세상을 향해 길을 떠났을 텐데 나이가 들고보니 형편이 허락하지 않는다. 여러모로 현실에 매이다보니 그렇다. 하여 나를 발견하기 위한 탐구의 방법으로 문학여행을 떠나보았다.

 

작년부터 고전문학을 하나씩 찾아서 읽는 중이다. 고전이란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낡지 않고 살아남아 사람들이 계속 찾게 되는 텍스트를 일컫는다. 거기에는 인간 보편성의 뭔가가 있기에 자꾸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전을 읽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는 초등이나 중등과정 시절에 '간추린 고전'으로 선행독서를 하게끔 만든다. 그러다보니 성인이 되어서 고전에서 다루는 삶의 문제를 현실에서 맞닥뜨리고 진정으로 읽어보아야 할 순간이 도래했을 때, 고전이란 이미 읽은 것이란 착각에 빠져 읽을 생각조차하지 않는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인생에서 뭔가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휙휙 지나가는 인생의 여러가지 국면을 그저 사진 보관하듯이 현상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현상적으로만 바라보니 해결이나 나아가는 방향도 바람부는 대로 몸을 기우는 갈대 같은 건 아닐까 싶었다. 인생을 깊게 꿰뚫어보는 심미안을 갖고 싶었다.

 

그 옛날 그리이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에 대하여 모방충동설로 바라보았다. 문학은 삶의 재현이라는 거다.

'재현'이나 '모방'이라는 개념에 잘 들어맞는 문학의 장르는 소설이다. 소설은  내가 좋아하는 장르다.

소설에 대한 여러 정의 가운데 루카치의 정의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의 문제적 개인이 잃어버린 정신적 고향과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동경과 모험에 가득찬 자기 인식의 여정에 대한 형상화'가 소설이다.

 

그러니까 나는 배낭과 운동화 대신 문학책을 도구 삼아 삶을 이해하는 '자기 인식의 여정'에 참여한 거라 볼 수 있다. 소설 안에서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체험할 수 있다. 그 동경과 모험,즐거움과 환희로 가득찬 여정에서 덤으로 얻은 전리품이 있다. 인간의 삶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존재인 말(馬)이 어떤 모습으로 녹아들었는가에 대한 성찰이다.

 

내가 아는 말의 삶이란 고작 마방이나 풀밭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문학 안에서는 말이 등장인물과 구체적인 사건에 개입하여 인간이나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데 기여하고 있었다. 그만큼 말은 사람살이에 긴밀하게 함께 해왔다는 증거이므로 문학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모습이 하나도 이상할 것은 없다.

 

나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보다는 말과 가깝고도 깊은 유대를 맺고 사는 사람이므로 '문학 속의 말'이 드러나는 부분을 추려내어 기록해보고 싶었다. 이 의미있는 새로운 여정의 첫출발을 시작하려고 하니 설레고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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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난다.

 

 

 

 

가을에는 새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풀은 몸에 흐르던 수분을 점차 덜어가면서 몸피를 줄여나간다.

 

 

 

 

몸피를 줄이지 않고 부풀리는 것은  멀리 날아오르려는 꿈을 간직한 씨앗 뿐이다.

 

 

 

 

 

몸피를 줄인 식물에게서 추상화를 본다.

 

 

 

 

사물에서 보이는 부분을 덜어가다 보면 본질만 남게 되고, 마지막으로 남은 형상에서 더 뚜렷하게 솟아오르는 뭔가를 발견한다.

 

 

 

 

그래서 가을이 좋은 모양이다. 사물이 메말라가는 자취를 바라볼 때 마음이 헛헛하지만 그 사물의 본디 모습을 더 가까이 들여다본다는 느낌도 있다.

 

 

 

 

올해 가을빛은 들판에 아름다운 색채를 풀어놓았다. 올 가을은 유난히 그렇게 보인다.

 

 

 

 

가을은 색을 덜어나가는 계절이라 생각해왔고 사실 덜어간다는 것은 맞다. 더 들여다보니 덜어낸 자리에 더 아름다운 빛깔이 깃들었다.

 

 

 

 

그 빛깔은 보통 '내츄럴한 색이야!'라고 흔히들 부르는 베이지,브라운,바이올렛,오렌지,블루,크림 등의 색이다. 이 색깔조차 세심하게 보면 뭐라 형언하기 힘든 오묘하고도 알 수 없는 빛깔을 띄고 있다.

 

 

 

 

위대한 작가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라는 작품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새들이 왜 먼 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 주지 못했다.

 

 

 

 

로맹가리는 세상이나 삶이란 안다고 할 수 있는 영역보다 알 수 없는 영역이 더 많을진대 다 안다고,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의 자기기만을 비판하고 성찰로 이끌어간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통하여 '인간이라는 종의 정체성' 까지 나아갔다. 인간은 무엇인가?

 

 

 

 

들판이 가을로 물들어 가는 동안 말 아마르는 자주  할아버지와 함께 풀을 뜯으러 산책을 나갔다.

 

 

 

 

아마르가 풀을 뜯을 때 하늘에서는 새들이 분주하게 날아다녔다. 때로는 시끄러운 소리까지 내면서 말이다.

 

 

 

 

새들이 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지 알 수는 없다. 아마르도 풀밭에 나와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 할아버지는 아마르가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나에게 말하기로는 정확하게 "아마르가 한 곡조 뽑았어. 그리곤 한 곡조 더 뽑았어. 두 곡조를 뽑더니 더는 안 뽑더라구."

 

 

 

 

그게 무슨 소린지 안다. 나도 그 수상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끄으으으' 하고 들리는 목이나 코 어딘가에서 공기 빠지는 소리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전통민속음악에 구음시나위라는 게 있다. 재즈처럼 다채롭게 이어져나가는 노래같지만  언어 이전의 원초적 발성이라 의미는 깃들어있지 않고 가슴으로 그 느낌을 전달받아야 한다. 그 어떤 성악보다도 가슴을 훑어내리는 느낌을.

아마르의 노래가 그랬다.

 

 

 

 

정황으로 보아 아마르는 마방에 하루 종일 갇혀 있다가 밖에 나와 콧바람을 쏘이니 기분이 좋았다. 여기에 맛난 풀까지 진수성찬처럼 주변에 잔뜩 있으니 더할나위 없이 기분이 좋아서 곡조를 뽑았다 라고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말 어떤 이유에서 아마르가 곡조를 뽑았는 지는 알 수 없다.

 

 

 

가을 초입에 북촌 근처에서 열린 세계작가축제에 다녀온 일이 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작가들이 나와 낭송,토크를 하는 행사였다. 그 자리에 온 청중은 통역기를 하나씩 받았다. 통역기를 귀에 걸고 볼륨을 적당히 맞추면 뒤에 있는 통역부스에서 통역가가 앞에서 말하는 외국작가의 말을 통역한 내용이 들렸다. 듣기가 참으로 불편하고 어색했다. 외국작가는 자신의 모국어 뿐 아니라 표정과 몸짓으로도 의사표현을 했다. 언어도 어조에 다채로운 뉘앙스를 담아 표현했다. 하지만 통역기에서는 건조하고 기계적인 내용만 국어책 읽듯 읊어대니 내 귀에서는 뭔가 호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답답한 나는 문학에서 말하는  '행간과 여백을 읽으라' 는 구절을 떠올리며 온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르가 왜 노래를 불렀는지 진심으로 알 수가 없다.

 

 

 

 

지난 세월 말과 함께 지내는 동안 '종으로서의 말'에 대하여 이해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여름에 땅에서 자란 초목에 물이 오르는 것처럼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가을의 그림자를 밟고서 내 안에 저장된 '앎의 수분'도 비워내려고 한다.

 

 

 

 

삶은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잡았는가 싶었는데 저만치 달아나 있는 무지개 같아 보인다.

 

 

 

 

내가 말에 대하여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앎의 틀 안에 말을 가두어버릴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오만하고 우월해지고야 말 것이다. 그렇게 되어버린 나를 말이 슬픈 눈빛으로 바라볼까봐 두렵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머릿속이 지어낸 말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닌 말이다.

 

 

 

 

앞으로도 나는 말에 대하여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다. 또한 알면 알수록 점점 모르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말보다 우월하지 않다.

 

 

 

  

                                   아마르는 헝크러진 실타래 같은 덤불더미를 찾아가 들추고 헤집어

                                   긴 풀줄기 끄댕겨올려 씹어대는 것을 좋아한다.

                                   반대로 칸타는 덤불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땅바닥에 달라붙은 키작은 풀만 골라먹는다.

 

 

 

 

                                   아마르와 칸타가 입에서 위장으로 풀을 뜯어 날라 가득 채우는 시간에,

                                   나는 머릿속에 가득 채웠던 것들을 덜어낸다.

 

 

 

 

                                   이 가을에

 

 

 

 

                                    아마르는 진정,

 

 

 

 

                                  무엇을 보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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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5.27. 반가운 유예 님과 칸타의 만남. 사진 분위기 봐서는 주인과 애마구나 싶을 정도로 다정하다. 칸타는 왕새침떼기라 아무나하고 다정한 포즈를 취하지 않는 말이다. 말은 귀로 V 를 한다.

 

 

 옛날에 아이가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 라는 말로 울음을 뚝 그치게 했다. 그만큼 호랑이가 무서웠다는 얘기겠다. 그 호랑이에 해당하는 존재가 칸타에게도 있으니 , 그게 뭐냐면 어이없게도 양! 배! 추! 다. 양배추는 칸타에게 어마무시한 공포의 화신이다. 처음부터 양배추가 공포스러웠던 건 아니고 최근에 그렇게 됐다.

 

 양배추는 사람이 즐겨먹는 필수야채다. 샐러드에 빠질 수 없는 감초이며, 갖은 요리에 양배추가 들어가야 풍미가 살아난다. 양배추가 들어가지 않은 닭갈비를 생각해 보라. 주방에서 요리하고 나서 자주 생기는 야채 부스러기가 양배추이기에 칸타나 아마르는 매우 오래 전부터 양배추를 조금씩 시식해왔다. 그렇기에 그 맛에 대해서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고 오히려 즐긴다고 해야 맞다.

 

 얼마 전에 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양배추 값이 유난히 쌌다. 남자어른의 머리통 만한 양배추가 대략 천 원 정도. 이럴 때 한 통 사서 아이들에게 맘껏 먹여보자 싶어 말 간식용으로 한 통을 샀다. 문제는 먹이는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양배추를 어떤 모양으로 주느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양배추 짜투리를 줄 때는 딱딱한 꽁지이거나 좀 두꺼운 종잇장 형태였다. 이 경우에 쩝쩝 맛나게 잘 먹었다. 한데 어른 머리통(?)을 주려니 자를 때 1/2, 1/4, 1/8 순서로 분할했다. 양배추가 8분지 1 조각이 났을 때 말이 먹기에 편하겠다 싶어서 그 덩어리를 말 밥그릇에 넣어주었다. 양배추를 넣고 돌아서서 한두 걸음 뗐을까 우당탕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야 ,하고 소리가 난 칸타 방으로 갔다. 양배추에  날개가 달렸는지 최초에 놓아준 밥그릇에서 1미터는 떨어진 문앞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칸타는 좀 당황하고 있었다. 그때는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했다. 그 후로 아마르가 양배추 먹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먹을 때 늘 그렇듯 씩씩하게 입을 벌렸다 앙 다물며 양배추를 베어 물었는데 순간 아삭!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냉장고에 신선보관하는 동안 양배추가 밭에서 살 때처럼 싱싱해져서 그만 그런 소리가 났다. 아삭! 소리가 나자 아마르가 흠칫 놀랐다. 아하 그래서 칸타가 놀랐고 놀라는 통에 양배추가 날아갔구나 알게 됐다. 그후로 아마르는 조심해서 양배추를 먹었다. 칸타는 한번 놀랐으니 적응을 했겠지 했다.

 

 다음 번에 양배추를 주려고 꺼내니  저녁급식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말들은 모두 배가 출출했다. 내가 평소 들고다니던 스텐레스 그릇에 양배추를 담아오니 다들 마방에서 머리를 내밀고 나도 좀 주려나 기대가 귀 꼭대기까지 차올라 쫑긋거렸다. 눈알들은 내가 움직이는 동선을 줄기차게 따라왔다. 이럴 때 아마르나 칸타는 조바심을 친다. 내꺼를 딴얘들한테 나눠주면 안되는데 하는 마음이다. 칸타도 마음이 급했다. 밥통에 양배추를 놓아주는 순간 전에 놀랐다는 생각을 까마득하게 잊고 힘차게 양배추를 와삭! 물었다. 뒤이어 바로 꽈당 ~ 우당탕 소리가 났다. 다음은 내가 놀랄 차례다. 얼른 뛰어가보니 칸타가 총을 맞아서 피 흘리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곧 바닥에 고꾸라질 것 같았다. 정말 심각해보였다. 진짜로 총을 맞지는 않았지만 툭 튀어나온 눈두덩 위가 까져서 피가 배어나왔다. 상황은 뻔했다. 양배추 깨무는 소리에 너무 놀라 머리를 순간적으로 쳐들었고 그 순간 눈위가 창살에 세게 부딪혀 그리 된 거다. 어지간히 아파서는 칸타가 꿈쩍도 않는데 곧 쓰러질 것처럼 멍하니 넋이 나간 걸 보니 정말 아픈 모양이다.

 

 그 후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에 걸맞는 모습을 칸타가 계속 보였다. 지나가다가 뭘 주려고 비닐봉지만 좀 높게 든다 싶어도 머리가 흠칫 들리고 , 끙끙이방지 머리띠를 채우려고 가죽을 이마 위로 두르는데도 머리가 휘익 돌아가곤 했다. 꼭 마방 천장에서 누군가 칸타를 꼭두각시인 양 가는 줄을 붙들어매고 줄을 당겨올려 조종하는 것처럼 보였다. 칸타는 양배추가 와삭! 소리를 냈을 때 머리통 귀신이 둥둥 떠서 ' 내 머리 내놔라! ' 하고 유령놀음 하는 것처럼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소리가 언젠가 동물의 왕국에서 보았던,  사자가 사슴을 사냥해서 콱! 깨물 적에 뼈 으스러지는 소리처럼 들렸나 싶기도 했다. 칸타가 동물의 왕국을 보았을 리는 없고, 초원에서 동료가 사자에게 죽임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적은 더더욱 없을 텐데 도무지 알 수 없다.

 

 칸타는 클럽에서 몇 안되는 '놀라지 않는 말' 군으로 분류되어 있다. 바람이 쌩쌩부는 날 , 혼자 사람을 태우고 기승운동을 한다든지 하는 모습도 종종 보이는데다, 무슨 시끄러운 소리나 물체에 반응하여 놀라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는 여장부 스타일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칸타가 겨우 양배추 조각에 기절할 듯 놀란다고 말하면 칸타를 아는 클럽분들이 얼마나 어이없어 할까 싶다.

 

'양배추를 무서워하는 그녀' 혹은 '그'는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 양배추가 과연 무엇이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어쩌다가 나이트클럽 어장관리하는 조폭 분이 승마클럽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깍두기머리에 금줄목걸이를 한 근육질 몸매를 한 남자였다. 옷안에 어쩐지 문신이 잔뜩 그려져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분이 승마클럽에 왜 오셨는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인상도 험해보이고 해서, 나이트클럽이든 승마클럽이든 클럽이니까 그냥 와보고싶지 않았겠나 생각해보고 말았다. 그러다가 말 위에 체험삼아 잠깐 올라가보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말 등에 올라가자 갑자기 험한 인상은 온데간데 없고 ,골목길에서 깡패들에게 몰려 삥 뜯기는 순진한 초등학생이나 지을 법한 쩔쩔매는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상황의 급반전이 놀라워 나도 하던 일을 멈추고 그 모습을 더 바라보았던 거 같다. 잠시 후 말에서 내려온 그 형님(?) 께서 하시는 말씀 " 내가 살면서 세상에 무서운 거라곤 하나 없었는데 말 등에 올라가니까 막 쪼그라드네. 후달려서 혼났네. 휴우  "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게 아닌가. 나이트클럽 형님에게는 말등에 올라가는 일이 '양배추'였던 거다.

 

 주변에서 저마다의 '양배추'에 놀라는 어이없는 일은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맷돼지라도 때려잡을 것 같은 튼튼한 여자가 바퀴벌레 한 마리를 보고 패닉에 빠지는 일이랄지 , 헤라클래스처럼 다부진 장정이 키가 150 센티도 되지 않는 와이프가 나타나자 얼어붙었다든지 하는 일 말이다. 물론 와이프가 어떤 상황에서 헤라클래스 남편 앞에 나타났느냐가 문제겠지만.

 

 나 역시 나만의 '양배추'를 내면세계에 소장하고 있다. 밝히면 너무 부끄러워 차마 말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그럴 것이다.

 

 앞으로 칸타에게 양배추를 줄 적에는 그냥 낱장으로만 주려 한다. 와삭! 에 적응하라고 하기엔 좀 고문하는 게 아닌가 싶고 말이 꼭 양배추를 와삭거리며 먹고 살아야 할 필연적 이유도 없어서다. 이 세상에 말 식량이 양배추밖에 없다면 그땐 달리 생각할 것이다. 아무튼 양배추로 인해 흠칫 놀라는 트라우마가 생겼기에 , 칸타아빠에게 내츄럴훈련으로 둔감화를 시켜달라 요청해놓았다. 11살이 되어 대부분의 시간을 '하늘 아래 별반 새로울 것도 없고' 하는 태도로 느긋한 칸타가 오그라들어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이니 귀엽고도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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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어릴 적 기억에 봄은 반갑지 않았습니다. 반갑기는 커녕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불쑥 찾아온 손님처럼 밉상이었죠. 손님은 찾아올 때마다 울긋불긋한 꽃들을 잔뜩 가지고 왔습니다. 꽃은 밉상 손님이 가져왔기에 예뻐보일리가 없었지요. 머릿속으로 '왜 꽃은 피고 난리래?' 싶은 퉁명스러운 기분만 가득했답니다. 어린 마음에 인생이 이다지 괴로운데 어쩌자고 화사한 자태를 난분분 뽐내는가 싶었던 겁니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흘러 소녀가 아가씨가 되고, 그 아가씨가 중년의 여인으로 변해하면서 서서히 봄과도 화해를 했나 봅니다. 어느 순간부터 꽃이 예뻐보이기 시작하더라니까요. 꽃이 예뻐 보이면 나이든 거라더니 딱 그런 모양입니다. 이른 봄에 승마장 사모님이 왔다갔다 하시며 화단을 살펴보시길래 나도 모르게 "올해도 꽃 많이 심어주세요!" 하는 말을 하고야 말았지요. 꽃타령이라니 나도 늙어가는가 보다고 한숨을 쉬고 말았네요.

 

 

 

 

지나온 인생에서 꽃이 예쁘게 보인 시간이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더 짧았지요. 이제는 '봄과 화해했다' 선언문이라도 낭독하고 싶었는데 올봄은... 지독하게 슬펐지요. 많은 이들의 기억에,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의 소금짐 같은 그런 봄으로 남게 될 것 같아 , 소금짐에서 배어나온 소금에 절여진  듯 마음이 싸르르 아립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서 산 정상에 누구보다 빨리 당도했지만 ,뒤늦게 알아차리기를 등에 업고 있던 아이를 어디다 빠뜨려 흘리고서  달려온 거 아닌가요? 아이를 빠뜨린 엄청난 슬픔 뒤에 몰려오는 암울함은 이 세상이 언제라도 다시 그런 슬픔의 무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예감 때문이지요.

 

 

 

 

 

 

 

하여 유난히 따뜻하고 무던했던 겨울의 뒤끝에 일찌감치 앞다투어 피어났던 꽃들이 그만 무색해지고 말았나 봅니다.

 

 

 

 

 

검정색 노트북이 있습니다. 가운데 삼성 로고가 박힌 좀 구닥다리 노트북이지요. 아마르가 태어나기 전 해에 샀으니까 아마르랑은 연년생쯤 됩니다. 인터넷도 되지 않고 아직도 처음에 깔았던 그대로 '한글 2007'이 사용하는 주된 기능이어서 더욱 구닥다리 분위기를 냅니다. 제 소소한 기쁨 한가지는 노트북을 켜면 삼성 로고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나는 첫 화면에 있습니다. 가장자리에 아이콘이 떠오르는 첫 화면에는 깐돌이(아마르 아명)가 갖은 인상을 쓰고서  자세 잡고 오줌 누는 모습이 보입니다. 털은 더부룩하고 꾀죄죄 하기까지 합니다. 시골 촌놈의 완전체라고나 할까요? 그 촌티가 풀풀 나는 망아지 녀석이 쉬 하는 모습이 어찌나 정겨운지 볼 때마다 웃음을 참기 어렵습니다.

 

시골 촌놈의 이미지를 완성하는 데는 녀석의 몰골 뿐만 아니라 배경도 단단히 한몫 합니다. 녀석이 오줌을 누고 선 장소는 얼기설기 끊어지다 이어지다 제멋대로 생겨먹은 철조망 울타리 안의 흙바닥입니다. 바닥에는 잔돌이 굴러다니며 그곳 시민임을 주장하고 있네요. 철조망 너머로는 야산 비탈의 공동묘지가 보입니다. 우리 산하 어딜 가도 야트막한 산자락엔 묘지가 차지하고 있지요. 사진의 배경만 보자면 보신탕용 개 사육장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바로 그곳이 지금의 아마르, 옛 깐돌이가 태어나 망아지 시절을 보낸 암울한 무대입니다. 왜 아마르는 그토록 황량한 장소에서 태어났는지, 왜 말인 아마르와 사람인 우리 부부는 그런 곳에서 운명적인 해후를 해야만 했는지요.

 

사실 이 세상의 시스템으로는 아마르는 태어날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승마장에 흔하디 흔한 말도 태어날 때는 극소수의 확률로 선택받은 종마의 씨를 받아 우수한 씨암말의 몸에서 태어난 존재들이죠. 아마르는 종마의 씨를 받은 것도 아니고 어쩌다 정처없이 팔려와 거세당하기까지 잠시 대기중이던 스텔리온, 지극히 평범한 퇴역경주마가 애비였던 ,우연한 생명이었던 겁니다.

 

 

 

 

 

다가올 7월이면 , 아마르가 6세가 됩니다.

 

 

 

 

아마르가 우리 품에서 자라온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탈도 많았고 우리에게 상상못할 기쁨도 안겨주었죠. 녀석을 키울 적에 가장, 항상 감동스러웠던 순간은 놈이 먹을 때였지요. 그악스럽게 와구와구 하며 흡입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먹구서 살아보겠다고 저 난리를 치는구나 싶어 그만 가슴이 뭉클해지고 뭔가 안에서 힘이 솟구치며 내 주먹이 불끈 쥐어지곤 했죠. 삶에 대한 열정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만.

 

 

 

 

녀석이 지금도 먹는 건 여전히 좋아하지만 , 과거에 더먹머리 머슴이 밭일 하고 와서 개눈 감추듯이 고봉밥 먹는 듯했다면 요즘은 선비가 점잖게 먹는 모습이라고 할까요? 선비님이라 해도 가까이서 구경 좀 할라 치면 귀를 뒤집고 눈을 부라리고 인상을 팍팍 씁니다. ' 내가 맛을 음미하는 거 안 보여? 난 사료를 즐기고 있으니 방해 말라니까!' 뭐 이쯤 되겠습니다. 아마르가 양반되기는 애시당초 글렀나 봅니다.

 

 

 

 

올해 들어 아마르에게도 자연스럽게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미국에서 날아온 내츄럴 선생님이 찾아와 두 번인가 직접 공부를 시켰습니다. 선생님에게 아마르를 맡기고서 녀석이 어떻게 하나를 지켜보는 제 가슴은 콩닥콩닥 했지요. 마치 집에서 얼싸얼싸 하던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킨 엄마 마음이 이렇겠지요. 아마르를 공부시킨 선생님 말씀이 녀석이 부모 앞에서는 어리광 부리고 떼쓸지언정, 학교와서는 선생님 말씀 잘 따르고 이해 잘하는 그런 학생이라고 하네요. 그 소리에 영락없는 학부모 심정이 되어 아이를 헛키우지는 않았구나 안도감이 들었답니다.

 

그런 후에 드는 생각은 내츄럴 선생님이 그 머나먼 미국에서 우리 아마르 가르치러 날아왔구나 싶은 인연의 필연적 연결고리를 떠올리게 되더군요. 뭐 선생님이 우리 아마르 가르치러 일부러 찾아올 까닭은 없겠지만서도 내 입장에서 보면  딱 그리 맞아떨어지니 어쩌겠습니까.

 

 

운동하고,목욕하고,상으로 풀뜯는 아마르

 

 

 

그리저리 아마르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홈스쿨을 졸업했나 봅니다.

물론 집에 와서 예습,복습 하는 거야 여전히 봐주긴 하지만요.

 

기왕 홈스쿨을 졸업했으니 마장마술 공부도 시키기로 했습니다.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서 조금씩 하는 공부인데 이 분야 역시 놀랍게도 어디선가 때맞춰 선생님이 나타났습니다. 아마르가 복이 많은 아이인가 봅니다.

 

신기하게도 아마르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공부할 준비가 갖추어지자 선생님이 등장했기에 그 타이밍이 절묘하다고 생각됐답니다. 이제 아마르는 다리도 제법 튼튼해졌고, 더이상 질질 울지도 않고, 좀 힘들고 불편해도 참아내며 교육을 받아들이는 그런 학생이 되었습니다.앞으로 어떤 멋진 승용마의 모습으로 자라가게 될지 희망이 피어오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러하니 말도 그렇겠지요. 너른 초원도 ,맘놓고 뜯을 풀도 주어지지 않은 삶입니다. 그래서 마방에서 머리를 내밀고 맑은 눈망울로 바라보는 그들을 보면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저 건초나 한무더기 집어다가 넣어줄 뿐입니다.

 

그런 말에게 매일 배우는 게 있습니다. 묵묵히 살아가기. 세상은 아름답지도 않고 충분히 기쁘지도 않고 오히려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많지만, 말은 좋다 싫다 내색을 하지 않네요. 그저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몫의 건초를 소중히 여기고 간절하게 씹는 것과 요구받은 일에 대하여 덤덤히 받아들이고 해내는 모습을 보일 뿐입니다.

 

 가끔은 아마르가 '끼야호~' 소리를 지릅니다. 사람의 언어로 '끼야호'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끼야호'를 표현한다는 편이 맞겠지요. 화창한 날에 밖으로 나들이 나가면 그런 기분을 표현합니다. 마방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일 뿐인데  소박하게도 햇빛,,바람,공기,새소리,꽃향기 만으로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있을까요.

 

 

호수공원에서

 

 

 

견공의 끼야호~   (공중부양 상태임)

 

 

4월 초에 호수공원에 갔습니다. 주인과 개가 한 조가 되어 산책을 즐기고 있어 무척 부러웠지요.나도 칸타나 아마르와 이 좋은 공원을 산책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때는 벚꽃이 난분분 흩날리는 광경이 한창이었고요. 무슨 생각이었는지 땅에 떨어진 꽃잎 하나를 집어들었어요.다섯 장의 꽃잎이 야무지게 손을 맞잡고 있더군요. 꽃잎을 뒤집어도 보았죠. 그랬더니 놀랍게도 다섯 장의 꽃잎을 단단히 고정시킨 꽃판은 오묘한 색깔의 별모양이었어요. 그러니까 꼭지가 다섯 개인 누구나 별이라고 떠올리는 그 형상 말입니다. 그때 별의 언어가 들렸지요.

 

 

 

 

언젠가 우리는 다 제각각 어느 별에서 지구로 살러 온거야. 살고나면 다시 별로 돌아가겠지. 별에서 왔다가 다시 돌아가기까지, 그러니까 사는 동안은 누구나 힘들기 마련이야. 꽃이 왜 피는지 알아? 살다가 힘들어 지쳐 쓰러질까봐 , 기를 쓰고 피어나는 우리를 보고 살아갈 힘을 내라는 의미야.

 

그러고 보면 존재와 존재가 맞부딪힐 때 기운이 생동하는 뭔가가 발생하는 모양입니다.

꽃이든, 말이든 가만히 바라봐주면 기운이 나지요.

 

 

사랑이

 

 

아마르는 할아버지가 오지 않은 날 내가 손이 딸려 저를 꺼내 놀아주지 못하면 귀를 뒤집고 마구 항의하며 화를 낸답니다. 칸타는 브러시로 목덜미 긁어줄 때 살살 하라며 화를 내지요. 칸타의 표현은 '콱 물까부다' 시늉이 바로 그거랍니다. 엉덩이 긁어줄 때는 시원하다고  하면서 목은 왜?  이놈들이 살아서 파닥파닥 거리는 게 참으로 좋네요. 그 파닥거림으로 인하여, 세상사 심란함으로 인해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려는 마음의 병을 이기고 사는 게 아닌가 싶어지네요.

 

 

                                     아마르

 

왜 아마르가 공동묘지와 철조망이 겹겹이 에워싼 황량한 땅으로 우리를 만나러 왔는지 꽃이 별을 보여주며 넌지시 건네는  무언가를 통하여 조금은 알듯도 합니다. 꽃의 아름다움은 얼어붙어 삭막한 겨울을 통과한 자리에서만이 찬란한 거지요. 아마르의 우연한 생명도 묘지에 드리운 죽음의 치맛자락 그림자에서 태어났기에 고귀한 게 아닐까요? 아마르가 하필이면 연중에 가장 무더운 날 질퍽한 진흙에서 태어난 것도 장차 가장 빛나는 희망을 모두에게 보여주려는 신의 뜻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가장 암울해 보이는 시간이 꿈과 희망을 발아하기에 가장 좋은 때가 아닌지, 말의 시간에 머물며 조용히  생각해 봅니다.

 

 

제이슨 (존 웨인이 탈 만한 거구의 순둥이 , 아마르가 혼내주겠다고 호시탐탐 벼르고 있음,사진은 소심하게 내다보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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