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2월에, 졸음에 겨운 아마르)

 

 지난 7월 31일에 아마르는 6세 생일을 맞았다. 엄마 뱃속에서 세상빛 아래로 나온지 만 6년이 되었다. 5세까지는 지인과 함께 생일축하를 했었지만 올해는 하지 않았다.작년까지는 한 해 한 해 생일을 맞을 때마다 ,'또 무사히 생일을 맞았구나' 하는 심정과, '아직도 말은 커가는 중'이라는 보호자의 심리적 태도에서 놓여나지 못했었다. 그러나 올해 생일에는 '이제 다 컸구나' 하는 안도감과 '어디 내놔도 말구실은 하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 마방의 여느 말들이 생일축하를 받지 않는 것처럼 그냥 생일을 지나치기로 해서 그렇게 됐다.

 

 김애란 작가가 <두근두근 내 인생>이란 책에서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쓴 구절이 있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그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누구도 본인의 어린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니까, 특히 서너살 이전의 경험은 온전히 복원될 수 없는 거니까,자식을 통해 그걸 보는 거다. 그 시간을 다시 겪는 거다. 아,내가 젖을 물었구나. 아,나는 이맘때 목을 가눴구나. 아,내가 저런 눈으로 엄마를 봤구나,하고.자기가 보지 못한 자기를 다시 보는 것.부모가 됨으로써 한번 더 자식이 되는 것.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윗 구절을 읽고서 백 배 공감할 수 있었는데, 아이를 낳아 길러본 부모 입장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아마르는 내 배를 아파가며  낳은 생물학적 자식은  아니다. 아마르의 생물학적 엄마는 칸타이지만 칸타가 제 새끼에게 석 달 젖을 먹인 것 외에는 양육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건 없어서 그 책임은 고스란히 나와 남편에게 떠안겨졌다.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화자의 부모는 십대여서 아이를 낳은 후 자신들이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깨달았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 아이를 안는 법부터 해서 -  그 부분도 읽으며 웃음이 나왔다. 우리 부부 역시 난데없이 출연한 망아지에게 뭘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 아는 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부모가 되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서너살 이전의 삶을 ' 아이 기르기 '를 통해  다시 살 수 있는 까닭은 사랑의 힘이다.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의 마음은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아이가 매개가 되어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전의 삶과는 결코 다른  감각들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타인이 되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연인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 순간 이 상황을 어떻게 느낄까에 자꾸 빠져드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상태 아니겠는가.

 

 망아지는 시시각각 자라면서 나에게 새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망아지가 자신을 둘러싼 별별 시시콜콜한 사물이나 상황에 대하여 호기심을 발휘하여 살피고 놀라워 달음질칠 때 ,순수한 감각이 닫히지 않고 활짝 열려있는 상태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 내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망아지가 환희에 솟구쳐오르고,슬플 때 눈물을 떨구고,공포에 사로잡히고,화를 내는 다채로운 감정의 변주를 드러낼 때 ,순수한 감정이 억압받지 않고 물 흐르듯 흐르는 상태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 망아지를 스승삼아 바라보았을 때 ,망아지는 나로 하여금 사십여년 세상 살아오는 동안 닫히고,막혀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했다. 그 결과 자연스러운 본성을 회복해나간 시간이 아마르를 키워낸 시간이 아닐까 한다.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자꾸 '아마르 키워낸 일'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 ,잃어버린 나를 서서히 되찾아가는 과정이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자연과 분리된 사람이 ,자연과 연결되는 조짐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함이 아닌 것 같다. 승마를 하는 한 여성이 들려준 말이다. 평소에도 무척 깔끔한 그녀가 여름휴가지에서 변한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식사를 하는데 파리가 음식주변에 날아다녔다. 파리를 본 아이가 기겁을 하며 "으악,파리다!" 하고 난리를 쳤다. 그녀는 "뭘 그래? 그냥 휘휘 쫒으면 되지." 하며 대충 손으로 휘저으며 아이에게 식사를 하라고 했단다. 옛날 같으면 엄두도 못낼 일이라고 했다. 파리는 자연스러운 생태계의 일부라기보다는 존재하지 말아야할 공공의 적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파리도,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도, 마분도 자연스러운 존재로 느끼고 있으며 승마를 마치고 한 줄기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씻는 달콤함을 즐기게 되었다. 말의 시선을 따라다니면 풀줄기의 아름다움과 꽃향기, 새소리의 고혹스러움에 매료되는 감각의 풍요로움 뒤에 충만한 감정도 느끼게 된다.

 

 8월에 비가 제법 많이 내렸다. 흐린 날이 대부분이다. 요사이 한강을 따라 차를 타고 지나가다보면 시야가 확 트여서 흐린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먼데까지 볼 수가 있다. 세상이 마치 회화로 변한 것처럼 보인다. 예민한 감각으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볼 때 내 안에 말이 들어앉아서 ,말의 눈으로,오감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구나 싶어진다. 그럴 때 도시를 누비며 걸어다니는 나는 그 세상이 삭막하고 황폐할지라도 얼마든지 헤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힘을 내면에서 느낀다.

 

 엊그제 아마르 등짝에 앉아봤다.(평소엔 거의 남편 차지임) 평수가 너르고 안정감이 느껴졌다. 탄성좋은 스프링 침대에 걸터앉은 느낌과 비슷하달까. 든든한 것이, 말 등짝이 내 엉덩이에게 말 걸어왔다.' 언제든 여기 앉아서 세상 살 힘을 충전해가세요! ' 참으로 듬직했다. 이제 내 나이는 부모가 등을 토닥여줄 나이가 아니다. 외로울 때가 많다. 이때 앉아 쉴 편한 말 등짝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떠올려보았다. 아마르도 망아지 시절에 보채며 뭘 요구할 때에 기꺼이 들어주고 안아주던 나에게 든든함을 느낀 적이 있었겠지.

 

 6세 아마르 카테고리를 열었다. 앞으로 이 카테고리에 어떤 인생의 그림들이 담길지 그 훈훈한 광경을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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