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난다.

 

 

 

 

가을에는 새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풀은 몸에 흐르던 수분을 점차 덜어가면서 몸피를 줄여나간다.

 

 

 

 

몸피를 줄이지 않고 부풀리는 것은  멀리 날아오르려는 꿈을 간직한 씨앗 뿐이다.

 

 

 

 

 

몸피를 줄인 식물에게서 추상화를 본다.

 

 

 

 

사물에서 보이는 부분을 덜어가다 보면 본질만 남게 되고, 마지막으로 남은 형상에서 더 뚜렷하게 솟아오르는 뭔가를 발견한다.

 

 

 

 

그래서 가을이 좋은 모양이다. 사물이 메말라가는 자취를 바라볼 때 마음이 헛헛하지만 그 사물의 본디 모습을 더 가까이 들여다본다는 느낌도 있다.

 

 

 

 

올해 가을빛은 들판에 아름다운 색채를 풀어놓았다. 올 가을은 유난히 그렇게 보인다.

 

 

 

 

가을은 색을 덜어나가는 계절이라 생각해왔고 사실 덜어간다는 것은 맞다. 더 들여다보니 덜어낸 자리에 더 아름다운 빛깔이 깃들었다.

 

 

 

 

그 빛깔은 보통 '내츄럴한 색이야!'라고 흔히들 부르는 베이지,브라운,바이올렛,오렌지,블루,크림 등의 색이다. 이 색깔조차 세심하게 보면 뭐라 형언하기 힘든 오묘하고도 알 수 없는 빛깔을 띄고 있다.

 

 

 

 

위대한 작가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라는 작품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새들이 왜 먼 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 주지 못했다.

 

 

 

 

로맹가리는 세상이나 삶이란 안다고 할 수 있는 영역보다 알 수 없는 영역이 더 많을진대 다 안다고,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의 자기기만을 비판하고 성찰로 이끌어간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통하여 '인간이라는 종의 정체성' 까지 나아갔다. 인간은 무엇인가?

 

 

 

 

들판이 가을로 물들어 가는 동안 말 아마르는 자주  할아버지와 함께 풀을 뜯으러 산책을 나갔다.

 

 

 

 

아마르가 풀을 뜯을 때 하늘에서는 새들이 분주하게 날아다녔다. 때로는 시끄러운 소리까지 내면서 말이다.

 

 

 

 

새들이 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지 알 수는 없다. 아마르도 풀밭에 나와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 할아버지는 아마르가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나에게 말하기로는 정확하게 "아마르가 한 곡조 뽑았어. 그리곤 한 곡조 더 뽑았어. 두 곡조를 뽑더니 더는 안 뽑더라구."

 

 

 

 

그게 무슨 소린지 안다. 나도 그 수상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끄으으으' 하고 들리는 목이나 코 어딘가에서 공기 빠지는 소리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전통민속음악에 구음시나위라는 게 있다. 재즈처럼 다채롭게 이어져나가는 노래같지만  언어 이전의 원초적 발성이라 의미는 깃들어있지 않고 가슴으로 그 느낌을 전달받아야 한다. 그 어떤 성악보다도 가슴을 훑어내리는 느낌을.

아마르의 노래가 그랬다.

 

 

 

 

정황으로 보아 아마르는 마방에 하루 종일 갇혀 있다가 밖에 나와 콧바람을 쏘이니 기분이 좋았다. 여기에 맛난 풀까지 진수성찬처럼 주변에 잔뜩 있으니 더할나위 없이 기분이 좋아서 곡조를 뽑았다 라고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말 어떤 이유에서 아마르가 곡조를 뽑았는 지는 알 수 없다.

 

 

 

가을 초입에 북촌 근처에서 열린 세계작가축제에 다녀온 일이 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작가들이 나와 낭송,토크를 하는 행사였다. 그 자리에 온 청중은 통역기를 하나씩 받았다. 통역기를 귀에 걸고 볼륨을 적당히 맞추면 뒤에 있는 통역부스에서 통역가가 앞에서 말하는 외국작가의 말을 통역한 내용이 들렸다. 듣기가 참으로 불편하고 어색했다. 외국작가는 자신의 모국어 뿐 아니라 표정과 몸짓으로도 의사표현을 했다. 언어도 어조에 다채로운 뉘앙스를 담아 표현했다. 하지만 통역기에서는 건조하고 기계적인 내용만 국어책 읽듯 읊어대니 내 귀에서는 뭔가 호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답답한 나는 문학에서 말하는  '행간과 여백을 읽으라' 는 구절을 떠올리며 온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르가 왜 노래를 불렀는지 진심으로 알 수가 없다.

 

 

 

 

지난 세월 말과 함께 지내는 동안 '종으로서의 말'에 대하여 이해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여름에 땅에서 자란 초목에 물이 오르는 것처럼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가을의 그림자를 밟고서 내 안에 저장된 '앎의 수분'도 비워내려고 한다.

 

 

 

 

삶은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잡았는가 싶었는데 저만치 달아나 있는 무지개 같아 보인다.

 

 

 

 

내가 말에 대하여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앎의 틀 안에 말을 가두어버릴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오만하고 우월해지고야 말 것이다. 그렇게 되어버린 나를 말이 슬픈 눈빛으로 바라볼까봐 두렵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머릿속이 지어낸 말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닌 말이다.

 

 

 

 

앞으로도 나는 말에 대하여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다. 또한 알면 알수록 점점 모르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말보다 우월하지 않다.

 

 

 

  

                                   아마르는 헝크러진 실타래 같은 덤불더미를 찾아가 들추고 헤집어

                                   긴 풀줄기 끄댕겨올려 씹어대는 것을 좋아한다.

                                   반대로 칸타는 덤불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땅바닥에 달라붙은 키작은 풀만 골라먹는다.

 

 

 

 

                                   아마르와 칸타가 입에서 위장으로 풀을 뜯어 날라 가득 채우는 시간에,

                                   나는 머릿속에 가득 채웠던 것들을 덜어낸다.

 

 

 

 

                                   이 가을에

 

 

 

 

                                    아마르는 진정,

 

 

 

 

                                  무엇을 보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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