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알리는 전령 코스모스가 승마장 안에도 활짝 피어났다.  지금부터 석 달 정도는 승마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최고의 나날이다.

 

 

 

                

 

 

                                                                          나와 칸타빌레

 

 

 

                                         

                                                                    행복한 그녀와 축복이

 

 

 

                                            

   

                                 아마르는 이모할머니에게 멋진 재킹과 모자(?)를 선물받았다

                

 

                                                               

 

 

 

                                  

                                                     

   초가을의 정취 속에서 말과 더불어 즐기는 유동화 원장님과 미그웨치 아카데미 여러분

 

 

               

 

 

 일요일 오후 4시쯤 마장에 도착했다. 아직 한낮의 열기가 뜨거워서 그 시간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 거다. 마장을 향해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 며칠 전에 새로 산 CD <비긴 어게인> 음악을 들었다. 신나는 리듬이 내 안의 새로운 에너지를 일깨우는 동안 잠시 후에 만날 칸타를 떠올렸다. 칸타가 나를 보고 기뻐하며 어떤 기대에 찬 표정을 지으리라 생각하니 즐거움이 솟아올랐다. 그렇다. 내 승마의 즐거움은 말을 만나러 가는 동안에 이미 생겨나서 팽창되고 탄력이 느껴지는 기분 상태가 된다.

 

 

 

 

 

요즘 내가 승마에 대하여 가지는 가장 커다란 생각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순수한 기쁨' 이라 말하겠다. 곰곰 옛일을 떠올려보아도 내가 애초에 승마를 시작한 까닭이 말에게서 기쁨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때묻지 않았던 기쁨은 대략 3년이 지날 무렵엔 매우 작아져 있었고 , 나머지는 승마로 인해 겪어야 하는 일에서 생겨난 온갖 문제에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는 출간한 에세이집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에세이집을 세상에 선보이고 난 후 나에게 그때 그 시절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마음의 창이 생겨났다. 말과 관련된 구조적인 문제들이야 예나 지금이나 큰 틀에서는 별반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현재도 말과 관련하여 얼마든지 스트레스 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는 점에선 변함이 없다.

 

 말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대면했을 때 매력을 느끼게 하고 기쁨을 주는 존재이다. 그러나 말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만나고 있는지 조금만 돌아보면 그 기쁨에서 도자기의 미세한 금과도 같은 균열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만나는 말은 '가두어진 말'이다. 말이 살아가는 공간은 마방과 마장 전체 팬스 안이 거의 전부이다. 말이 마방 밖을 돌아다니는 자유라도 얻으려면 대부분 등에 안장을 얹고 사람을 태운 후라야 가능하다. 또한 우리 승마계가 일반적으로 채택한 라이딩 방식은 영국식으로, 기본적으로 굴레 안에 말을 가둔 상태에서 가두어진 에너지를 활용하여 말의 신체적 표현을 도모하는 활동이다.

 

 

 

 

 

    그러한 모습의 말을 바라볼 때 우리들 역시 사회적으로 관습적으로 '가두어진' 존재이기에, 자신이 갖고 있는 부자유스러움으로 인하여 말이 갖고 있는 그것을 알아볼 수밖에 없다. 말은 가두어짐으로써 억압된 자유로움을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행동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그럴 때 자유롭고도 기쁘고자 하는 사람의 의도에 제동을 걸게 되고 ,사람과 말 사이에 어떤 어긋남과 거리감이 자리잡는다.

 

 그렇다고 하여 말이 "나는 갇혀 살기 때문에 불행해요." 라고만 말하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직장에 매여서, 좁은 집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오롯이 그것 때문에 불행할 수는 없듯이 말이다. 칸타와 아마르를 하루 정도 마방에 두었다가 밖에 나가자 하면 무척 좋아한다. 밖에 막 방목되었을 때 깡충 뛰어오르거나 머리를 흔드는 식으로 기쁨의 표현을 한다. 그렇게 기분 좋아라 놀다가도 칸타는 1시간, 아마르는 3시간 정도 지났을 때 마방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또 기승운동이 끝나고 마무리를 하고서 마방에 들여보내면 편안해한다. 이럴 때 나는 어디 좋은 여행지 갔다가도 집에 돌아왔을 때 안도감과 행복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칸타와 아마르가 적당히 놀다가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 하루 종일 밖에서 놀고 싶어한다면 그렇게 해줄 수 없는 나는 엄청난 고민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방에서 살아가는 말에게도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 마방의 말에게 가장 큰 문제라면 '심심함'일 것이다. 현대인의 가장 큰 고민도 그것이다. 내가 겪은 바로는 말들이 이럴 때 아주 좋아라 한다. 사람도 그렇겠지만 일단 마방 앞으로 사람들이 많이 왔다갔다 해서 볼거리가 많아야 한다. 하다못해 말 그루밍해주는 모습 구경하는 것도 아주 좋아한다. 외부에서 처음 들어온 말은 내가 칸타나 아마르에게 다정하게 그루밍하는 모습을 보고  "세상에는 저런 모습도 다 있구나."하고 놀라워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럴 땐 새로 온 말이 그간 살아왔을 모습이 가늠되어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슬픔은 말과 지내는 동안 늘 따라다니는 그림자와도 같은 감정이다.

 

 말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으면 듣기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종종 마방 앞에 플라스틱 의자를 갖다두고 지인과 앉아 때로는 차까지 마셔가며 대화를 나누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 뒤통수가 간지럽다 싶어 돌아보면 어김없이 말들이 쳐다보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방의 모든 말들이 일제히 귀를 쫑긋 하고서 대화를  재미나게 경청하기 일쑤다. 상상력이(?) 풍부한 어떤 말은 아예 넋나간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런 표정을 보면 내 화술이 그렇게 뛰어난가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다. 가끔 색다른 간식을 떡 돌리듯이 조금씩 나누어주면 희열에 차서 마방 전체가 난리가 난다. 이밖에도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말들이 일상에서 누리는 소소한 기쁨은 참으로 많다. 이조차 누리지 못하고 사는 승용마도 많겠지만 중요한 것은 말을 행복하게 해주는 방법이 결코 거창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말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승마를 하면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기쁨도 참으로 많다. 며칠 전에 칸타에게 치장(?)을 해주고 실내마장에 들어갔다. 그때 마침 갤러리석의 여자분 하나가 "어유, 아마르 굉장해요." 하며 감탄을 하고 난리가 났다. 순간 나는 아마르가 무슨 마장마술 동작이라도 신통하게 구사해서 감탄을 자아낸 건가 하고 쉽게 오해했다. 하지만 1분도 지나지 않아 알게 된 진실은 아마르가 운동하다 똥을 쌌는데 엄청나게  많이 싸서 감탄을 자아낸 거였다. 곧이어 실내마장 안에 서 계시던 회원이 통을 들고가 똥을 치우고는 "통이 꽉 찼어요." 라는 멘트를 날려서 주변은 삽시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만일 그 순간에 거기 있었던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갇혀 소소한 웃음거리에 반응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런 분위기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마음의 상태가 중요하다.

 

 

 

 

 영어에서 문어와 낙지는 모두 octopus라고 한다. 그래서 영어권 사람들은 문어와 낙지맛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의식적인 개념이 구분되어 있지 않으니 미각이라는 감성마저도 영향을 받은 탓이다. 승마라는 행위에서도 그 행위의 개념을 무엇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가 느끼며 얻을 수 있는 것이 달라진다고 본다. 내가 승마를 시작한 이래 참 이상하다고 생각한 일이 있다. 승마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일수록 웃는 모습이 적다는 거였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말을 대하거나 타면서 매우 심각한 사람이 승마선수나 코치,교관인 경우가 많고 마장운영자도 심각함에서 뒤지지 않았다. 내가 볼 때 억 소리나는 말을 몇 필이나, 하루 종일, 그것도 매일 탄다면 입이 귀에 걸려 다물어지지 않아야 할 텐데 오히려 반대였다. 또 대회에 참가하거나 자격증을 얻기 위해 말을 타는 경우에도 그랬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중고등학생 시절을 엘리트 승마선수로 경력을 쌓아왔던 청소년들이 대학에 가서 말을 타지 않을 때다. 열거한 경우에서 공통점을 모아본다면 '목적지향적'이나 '성과'를 추구하는 개념을 갖고서 승마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승마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명백한 목적과 성과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과 함께 '즐긴다'라는 개념이 양쪽 날개를 이루어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거다. 더 나은 성취를 위해서도 '즐긴다'는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오히려 그 어떤 '목적'이나 '성과'도 염두에 두지 않은 체험승마인이나 어쩌다 짜투리시간을 내어 말 등에 오른 이들에게서 참을 수 없이 벙글어지는 순수한 웃음을 발견하기가 쉽다. 또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다. 클럽말 탈 때는 열심히 타다가 막상 자마가 생기니 말을 잘 안 타더라,하는 소리다. 물론 타는 횟수나 기승시간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얼마나 재미있게 즐겼느냐?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나 자신을 돌아보니 반성할 점이 많다. 누가 보면 부부가 함께 타는 말이 두 필씩이나 있으니 원없이 말을 타겠구나 부러워할 처지다. 그런데도 나 자신은 말 관리나 관계자들과의 관계 등 이런저런 문제를 시시콜콜 고민하면서 말을 타는 순수한 기쁨을 스스로 훼손해오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요즘 들어서 나는 자신에게 늘 주문을 걸고 있다. "나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 말을 타는 거야." 주문 탓인지 온갖 잡스런 생각에 골몰하지 않고 칸타나 아마르가 주는 기쁨을 고스란히 전달받고 있다. 삶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지리멸렬함 투성이지만 그 안에 섞여있는 보석같은 기쁨을 주워서 놓치지 않겠다고 마음 먹으면 분명 기쁨의 총량은 늘어나게 마련이다.

 

 어제 오후 나는 칸타 등에 올라앉아 있었다. 말 등에서 주변 풍경을 내려다보니(?) 코스모스는 한들한들, 배추의 푸른잎은 흐드러지고 ,논은 노랗게 물들었고, 하늘은 파란 가운데 떠가는 구름 모양이 아기자기 다채로웠다. 순간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나니, 내가 이 순간 무탈하고 건강하여 칸타 등에 앉아 가을의 한가운데를 걸어다니는구나 싶어서,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가을을 좋아하므로 가을 내내 나는, 말과 더불어 즐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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