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날에 큰 나무 아래서 하루를 보낸다면 나무 그림자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그림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서히 이동하며 길어졌다 짧아졌다 다시 길어질 것이다

하루가 인생이라면 그 안에서 우리들의 관계도 그림자처럼 변해간다.

 

 

                            

 

   

     오후 12시 30분. 말들의 점심식사가 한창일 시간이다. 빛과 그림자인 듯 각각 흰색과 검은색 털빛을 가진 몽실이와 깜주. 마당 가득한 햇빛을 깃발 삼아 꼬리를 나부끼는 견공 녀석들에게 넉넉한 시간을 덜어내듯 가져온 간식을 나누어주며 인사를 나누고 예뻐해주었다. 슬슬 마방으로 발길을 돌린다. 마방은 저 끝에 있지만 벌써 귓가에 말들의 건초 씹어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모두들 자기 몫의 건초에 빠져들어 넋이 나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옆에 지나가도 사람은 그림자나 마찬가지다.아무런 기대도 없으니 삼 일 만에 아이들을 본다는 설렘도 마음속에 잠잠하다. 그 무방비의 순간에 말 머리 하나가 쓰윽 나왔다.촬영 후 모니터를 하는데 사진인 줄 알았다가 아 동영상이었군 하는 놀라움이 일었다. 아마르였다. 말 머리는 오 초 정도 나를 응시하다가 다시 쓰윽 들어갔다. 잠깐의 시간에 일어난 이 일에 대하여 내 속에 소란이 일었다. 머리로는 이게 뭐지? 하는데 심장은 빨라지니 사고와 감정의 실타래가 엉켜버린 꼴이다. 실 꼬투리를 찾아내어 다시 풀어내야하리라.

 

   건초는 아직 수북하게 쌓여 있는데 맛난 건초를 먹다 말고 머리를 밖으로 내밀어야 했던 절박함이 무엇인가. 모든 사물이 정지한 공간의 침묵을 깨고 머리가 밖으로 나오는 속도에 절박함이 새겨 있었다. 그리고  나를 응시하던 잠깐의 시간에는 어떤 의미가 깃들어 있었을까. 

  아마르는 아무 것도 먹고 있지 않을 때 내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머리를 내밀어 반가움을 표시하지만  건초를 먹을 때는 나를 우선 순위에서 밀어내고야 만다. 그렇기는 해도 궁금증은 못 참아서 입으로는 우물거리되 눈알은 힐끗힐끗 하면서 볼 것은 다 본다. 그럴 때 비록 내가 건초보다 덜 중요한 존재로 순위가 밀리기는 했으나 녀석의 본능에 충실한 모습이 그냥 보기에 기특했다. 그런데 아마르의 마음에 저울질 된 순위가 바뀌어 내가 건초를 밀어낸 상황에 맞닥뜨리니 내심 신기했던 거다.

 

  사실 지난 삼 일 마장에 나가지 못했다. 몸 컨디션도 좋지 않았을 뿐더러 구질구질한 눈이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여서 집에서 머물렀다.  옛날 같으면 아이들 걱정이 되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삼 일이라니... 삼 일 동안 아이들을 못 본다면 온갖 걱정과 그리움에 마음이 갈래갈래 찢겨져 나가고야 말았을 것이다. 그런 내가 태평하게 (그리움은 어쩔 수 없지만...) 말 아이들을 삼일 씩이나 안 보고 지냈다는 것은 변해도 많이 변한 것이다. 저희들 나름대로 시간을 보내고 견디는 방법을 터득했을 거라고 내 마음을 스스로 설득하는데 성공한 모양이다.

  그렇게 삼일 만에 본  아마르가 건초를 제끼고  나를 반기니 녀석이 내심으로 나를 걱정한 모양이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루 정도야 안 올 수 있어. 어쩌다 가끔 이틀 안 보이는 때도 있었지. 그런데 삼 일은 좀 수상해 . 무슨 일 있나? 무슨 일 있으면 어쩌지? 하는 심리상태를 판토마임으로 연기하는 배우가 있다면 그 배우가 바로 아마르였다. 그저 머리를 창으로 내밀었다가 집어넣는 단순한 동작 속에서 표현하는 절제된 연기라고 할까.

 

  아마르에게 자신의 말 생애의 전부를 함께 지내온 사람은 나일 것이다. 그래서 아마르는 나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나의 체중과 힘,냄새,감정 등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그 중에는 좀 한심해보이는 구석조차도 꿰고 있다. 예를 들어, 수장대에 웅크리고서 녀석의 발굽을 손질해주고 수장대 밖으로 나가다가 가로지르는 쇠파이프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혀 으윽 비명을 지르고 머리를 감싸쥐며 한참이나 소리가 나지 않게 엉엉 우는 모습같은 것은 모자의 챙 때문에 생기는 어이없는 변고에 해당된다. 그러는 내 꼬락서니를 보고서 아마르는 '아니 저걸 못 보고 부딪혀서 저러는 거야?  저래서야 험한 세상 어찌 사누. 쯪쯪...' 이랬을 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어른이 느끼는 갓난아기의 힘처럼 가소로운 나의 팔 힘이며 제가 조금만 빨리 걸어도 따라잡지 못하는 걸음걸이 등 약점투성이 존재라는 걸 다 안다. 그렇기에 내가 제 눈에 오랜기간 보이지 않았을 때 '어디 다니다가 자빠지지는 않았나? 어디 아픈 건 아니야?' 하고서 걱정을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야 말았던 거다.

 

  아마르가 날 걱정했을 거라는 생각에 미치자 어느덧 녀석이 많이 컸네 싶어져 지나온 세월의 두터움도 느끼게 된다. 철부지 자식이 자라니 노인네가 되어버린 부모가 아기같아서  노심초사한다. 서로 걱정하는 역할을 바꾸어가는 상황이 빛과 그림자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아마르가 제법 점잖아진 후로 날 태우고 다닐 때  약하지만 좋아하는 존재를 등에 업고 다니는 뿌듯함과 의기양양함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을 언뜻 받을 때가 있다. 어느 날인가 기승 도중에 말 목의 스트레칭에 도움이 되라고 한쪽 고삐를 조작하여 말 머리만 돌리도록 했는데 그 순간 아마르의 옆 얼굴이 온전히 보였다. 눈빛은 온화하고 부드러웠고 시선은 그윽하고도 촉촉했다. 말이 사람을 태우고서 그런 표정을 짓다니... 아! 그 표정은 결코 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동물의, 저당잡힌 존재의 표정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의 곳에 선명한 점을 찍고 있었다. 분명 아마르의 등에서 본 녀석의 표정에는 등에 태우고 있는 존재보다 훨씬 커다란 존재만이 보낼 수 있는 따뜻함이 깃들어 있었다.

 

  자연에서 말이 한 생애를 살아갈 때 무리로 살아간다. 떠돌이 늑대라는 얘긴 있어도 떠돌이 말이란 얘기는 없지 않은가. 무리는 가족이다. 어른이 된 말은 무리의 질서 안에서 외부의 적으로부터 무리를 지키고 구성원을 보살피는 역할을 가졌을 것이다. 암말의 모성애 뿐만 아니라 말 모두에 깃든 보편적 본성으로서 타자에 대한  보호본능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말이 지닌 신비가 아니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사람은 말이 전력질주 도망가는 본성을 이용하고 그 효용을 누려왔다. 말이 도망가기 이전에 얼마나 평화로운 모습으로 말끼리 서로 기대고 부비며 서로를 위하며 살았는지는 보려고 하지 않았다. 인간의 삶이 절박했기 때문이거나 필요한 부분만을 취해 온 이기적 문명의 역사가 안고있는 그늘이다.

 

  다른 초식동물도 무리를 보호하며 살아가지만 말처럼 사람에게 깊이 맺어진 동물은 없다. 빛과 그림자는 사물의 두 가지 속성 동전의 양면이다. 말은 사람이 진정으로 보호해주는 영역에 머무를 때만 스스로의 보호본능을 발휘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대의 본성인 도망가기로 사력을 다 한다. 말이 도망가게 만들지 보호본능을 발휘하게 만들지는 사람이 어떻게 이끌어나가느냐의 문제가 될 것이다.

 

  식탁머리에서 아마르가 나를 걱정하더라는 얘기를 하다보니 기분이 우쭐해졌다. 목소리 톤까지 높여가며 남편에게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니까 남편이 자기도 질 수 없다는 듯이 한마디 한다.

" 나도 며칠 안 나가면 아마르가 총알처럼 머리를 내민다니까.  날 보고는 '죽지 않고 살아 있어 다행이네' 하고 안도하는 표정이야. 아무래도 우리가 말들 걱정하는 것보다 걔네들이 우릴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큰 거 아닐까? "

 

 

  인간의 노동으로부터 벗어난 말은

이제 그늘 속에서 걸어나와 햇빛의 영역에 모습을 드러내고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약하고 아픈 존재들을 다독여주러 왔다고...

 신은 원래 우리에게 그런 임무를 주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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