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을 듣는 아마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 진리를 떠올리는 순간은 보통 좋지 않은 상황에 처했을 때다. 아무리 곤혹스러운 상황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나를 떠날 수도 있고 아니면 유쾌한 상황으로 변할 수 있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쁘고 좋은 관계는 얼마든지 변할 수가 있고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느 방향으로 키를 돌릴지 조절이 가능하기도 하다. 말들끼리 관계도 이 진리에서 비켜서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칸타와 아마르 말 모자(母子) 사이에도 변하는 관계가 보였다. 말도 사람처럼 사회생활을 하므로 관계의 문제가 존재할 것이다. 말끼리 관계는 흔히 서열이라는 그들의 질서에 따라 살펴볼 수가 있다.

 

  칸타의 몸에서 아마르가 태어난 순간부터 5세가 될 때까지 관계 주도권의 우위는 칸타에게 있었다. 여름에 태어난 망아지 깐돌(아마르의 아명)은 엄마 젖을 찾아 빨아야하는 치열한 생존투쟁을 벌이는 동안 파리를 쫒느라 한 시각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엄마의 발길질과 꼬리채에 얻어맞으며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래서 깐돌이가 엄마에게 절대복종 하는 까닭이 낳아주고 젖을 먹여 키워준 생명의 근원이라는 점 외에도 망아지적부터 엄마의 무시무시한 위엄을 온몸으로 겪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 관계는 5세 생일이 가까울 무렵까지 이어졌다. 어느 순간 둘 사이의 관계는 그런 모습으로 영원하겠지 생각했지만 그 생각 또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엘도라도가 입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는데 엘도라도는 원형 패덕 안에 있었고 칸타와 아마르는 바깥 공간에 있었다. 엘도라도는 칸타바라기였고 칸타는 엘도라도를 숫말로서 관심을 두기 시작하니 아마르의 관심은 온통 둘 사이가 가까워지지 않도록 하는데 온통 쏠려 있었다. 아마르는 자유롭게 놀지도 못하고 마치 2차대전 시기에 유태인을 색출하러 다니던 게슈타포처럼 굴었다. 칸타와  엘도라도에게 암말과 숫말의 태도가 나타나면 곧 유태인이라 낙인찍고 체포해서 아우슈비츠에 집어넣을거야 엄포를 놓았다. 아마르의 태도가 강경하고 살벌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급기야 확실한 인증샷 하나를 연출하고야 말았다. 칸타가 엘도라도에게 다가가 엉덩이를 들이대고 꼬리를 요염하게 말아서 들어올리자 아마르가 둘 사이에 확 끼어들더니 칸타에게 인정사정 없는 발길질을 날리고 말았다. 나는 이게 실제상황인가 하고 충격을 받았지만 일단 엘도라도를 마방으로 돌려보내는 조치를 취했다. 그런 후에 생각해보니 아마르는 정신줄을 놓았기에 잠시 그럴 수 있다쳐도 맞고서도 아무런 항의도 못한 칸타는 뭐란 말인가. 그 사건 이후로 칸타와 아마르사이에 오랫동안 형성되었던 위,아래 관계는 거꾸로가 되었다. 그 후로도 몇 번 아마르가 엄마에게 행패 부리는 모습이 목격됐고 둘을 나란히 세워놓고 간식을 줄 때도 아마르가 내가 많이 받아먹을 테니 엄마 머리는 저리로 치워 하고 밀치기 일쑤였다. 그러면 칸타는 기도 못펴고 아들 눈치를 보며 입안에 든 것이나 겨우 우물우물 씹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살다보니 과연 세상에 모든 말 엄마와 아들이나 딸이  함께 살면 자식이 5세 무렵이 되었을 때 서열이 바뀌게 되는 건가하는  일반화의 가능성에 대하여 궁금증이 생겼다. 이런 문제에 대한 대답은 오랜 세월 말 목장을 운영하며 수많은 망아지를 키워본 목장주만이 알 거라 생각하고 말았다.

 

 그러다 요즘에 와서 또 서열이 바뀌었다. 바깥에서 둘이 놀다가 칸타가 무슨 일인지 심술이 나서 내가 보기에 아무 짓도 안한 - 하기는 했다.칸타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는.그렇다고 그 땅이 칸타 소유는 아닌데. - 아마르를 걷어찼다. 그랬더니 아마르는 그 옛날 닭들이 날아다니던 승마장에서 바람이에게 뻥 차였던 닭이 비실비실 어디론가 걸어갔던 그 자태 그 느낌 그대로 기운없이 저리로 가버렸다.

 

 내가 만일 정치가였다면 권력의 무상함에 대해서 설핏 찾아든 상념에 잠시 잠겼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정치적 취향이라고는 약에 쓰려고 찾아도 없는 사람이라 그런가 머릿속은 재빨리 다른 방향으로 회전을 시작했다. 그 방향이란 말과 사람의 교감의 차원이다.

 

  요즘 생활의 변화라면 남편이 거의 주말반처럼 되어 평일에는 기승을 별로 하지 않는 패턴으로 지내는 지가 좀 되었다. 지난 가을까지 내가 아마르를 주로 타다가 새로운 교육의 필요성도 있고 해서 남편이 기승을 주로 하다보니 자연히 아마르는 평일에 기승운동 할 일이 별로 없다. 날은 춥고 땅의 상태도 별로여서 자유로운 놀이도 별로 못하고 유일한 활동이란 기승운동이 대부분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기승운동이란 단지 사람을 태우는 활동만 의미하지 않는다. 운동 전후로 준비하고 뒷처리 하는 과정에서 갖은 보살핌을 받으며 사랑과 관심을 누리는 일이다.

  한가한 평일에 주로 칸타가 마방복도에 매어져서 엄마의 갖은 보살핌을 받는 동안 아마르와 엘도라도는 부럽다는 듯이 넋을 놓고 구경한다. 아마르는 시샘이 나는 표정으로 눈을 흘기다가 어느 순간 쏙 들어가서 안 보겠다는 듯 엉덩이를 돌리고 서있기도 한다. 그러다 다시 내다보고 시샘하고. 그럴 때 칸타의 눈은 초롱초롱하다.

 

  그러기를 한 석 달 지났나보다. 요즘에 아마르는 풀이 팍 죽어 의기소침해 보인다. 물론 주말에는 제 할아버지가 나타나 예뻐해주지만 평일,주말 통합으로 사랑을 받는 칸타에 비하면 약발이 부족해 보인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다보니 문득 '동물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정도에 따라 무리내에서 서열이 더 올라간다.'고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명제를 가설이라 여기고 우리 아이들 경우를 대입해 보니 어느 정도 맞는 얘기인 것 같다.

 

  아마르는 4세까지 기승운동을 본격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3세부터는 기승운동을 많이 시켜야지 했지만 늘 다치거나 다리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주로 놀고먹는 백수신세로 소일하기 일쑤였다. 그러는 동안 칸타는 아빠 태우랴,엄마 태우랴 상당한 몫을 해냈다. 칸타는 의기양양 신경질도 마음껏 팡팡 부리고 기세등등 했던 반면 아마르는 눈치밥 먹는 자식마냥 칸타 앞에서 그저 엄마의 기세에 눌릴 뿐이었다 .올해는 아이들이 한 번도 다친 적이 없었다. 덕분에 아마르도 승용마 한 몫을 거뜬히 해냈다. 게다가 평일,주말 전천후 할머니가 아마르를 주로 탄 시간이 많다. 할아버지가 몽골에 다녀오는 동안에도 할머니는 홀로 아마르를 타주고 보살폈다. 그러는 사이에 아마르가 칸타를 걷어차며 행패부리는 시기가 놓여있었던 거다. 지난 행적을 추적해보니 칸타와 아마르는 기승운동을 중심축으로 한 사랑과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는쪽이 둘 사이 관계의 우위를 점령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실내마장에 들어가 막 칸타를 타기 시작해서 평보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코치가 축복이를 다 타고 마무리 평보를 하고 있어서 잠시 같이 나란히 어슬렁거리게 되었다. 내가 "축복이 오랫만이야." 했더니 코치가 " 요즘 축복이가 호구네요.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치인다는 얘긴지 자세한 정황은 못 들었으나 코치가 말이 호구라고 말할 때는 어떤 의미인지 짐작이 간다. 말 서열의 밑바닥에 놓여있다는 의미다. 축복이는 얼마 전까지 자마 마방에서 지내다가 자마의 신분도 없어지고 마방도 모자라서 클럽마방으로 그것도 제일 끝방으로 이사갔다. 끝방은 사람들이 돌아보다가도 미처 발길이 미치지 못하고 가버리는 후미진 곳이다. 축복이가 어떤 말인가. 자마였을 때 자마마방에서 가장 기세등등했다. 새로 온 말이 있으면 터줏대감 행세를 하고 막강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런 말이 호구가 되다니 믿겨지지 않는다. 얼마 전 문득 축복이가 생각나서 당근을 들고 클럽 마방 끝으로 찾아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축복이는 권세를 누리다가 하루 아침에 팽 당하여 귀양길에 오른 양반님처럼 패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고마워하며 당근을 받아먹었다. 자마였을 때 갖은 치장을 해주고 오랜 시간 공들여 돌봐주던 손길이 끊기니 그렇게 됐다. 말 팔자도 뒤웅박팔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다.

 

  사람의 사랑과 관심으로 서열이 업그레이드 된 말의 특징은 정서적 안정감에서 비롯된 만족감과 자신감에서 비롯된 자발성을 갖는다. 상황에 따라 주인이 좀 힘든 뭔가를 시켜도 반항하지 않고 참아내며 따른다. 칸타의 기승 전과 후의 태도는 매우 다르다. 흔히 비포 에프터로 비교하는 경우에 해당할 만하다. 기승전에는 "난 완벽한 배려를 원해요."의 화신이다. 이런 칸타 덕분에 기승운동을 준비하는 나의 태도는 수행이 높은 스님이 다도(茶道)를 행할 때처럼 느림과 사려깊음이 경지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순악질여사의 허공에 2단 돌려차기,헤드 뱅잉,화살촉 시선을 당해야 한다. 칸타는 타인에 대한 완전한 배려를 가르치는 스승이다. 이런 칸타도 기승운동만 끝나면 그 전의 모습에 보상이라도 해주듯 고분고분해진다. 다시 기승대로 가서 목덜미에 칭찬하고 내려서 다시 칭찬할 때에 칸타가 고개를 약간 돌려 나를 바라보는데 그 시선은 이미 나긋나긋 흘러내리는 크림처럼 부드럽다. 답답한 레인을 풀어서 정리하고 등자를 올리고 빵빵한 복대로 늦춰주고 "자 갈까?" 눈빛으로 말하고 어깨를 열어 길을 터주면 칸타가 나른한 걸음으로 졸래졸래 따라온다. 머리를 낮추어 조아리고 내 걸음에 보조를 맞추어 따라나오는 칸타는 제왕을 따르는 절대충신이다.

 

  칸타와 함께 실내마장을 걸어나오는 시각은 대부분 네다섯 시 경이다. 그 시각 해는 천천히 지고 있어서 마지막 오후햇살이 나와 칸타의 뒤에서 비춰온다. 손을 잡고 가듯 느슨하게 고삐를 손바닥에 걸치고 갈 때 칸타가 머리를 은근하게 내쪽으로 기대온다. 나도 그러는 칸타에게로 몸을 좀 기울여 머리를 맞대본다.  눈앞 땅바닥에  거대한 그림자 풍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그림자는 오징어 형상이었다. 나의 머리와 칸타의 머리가 합쳐져서 오징어 몸체의 삼각형이 되고 우리 다리 여섯개가 오징어다리가 되어 걸을 때마다 흐느적흐느적했다. 내가 칸타와 맞대지 않은 다른 팔을 나비처럼 파랑거렸더니 온몸으로 흐느적거리는 입체적인 오징어형상이 되었다. 말과 사람이 한몸이 된 이미지는 참으로 감동적이었지만 그게 하필 오징어라니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웃음이 터져나와 햇살을 타고 부유하던 공기중으로 퍼져나갔다.

 

  오징어의 형상에서 나의 상상은 잠에서 깨어나 날개를 펴고 날아오른다. 꼭 오징어가 심해에서 물결을 타고 춤추는 것처럼 떠오른다. 먼먼 시간으로부터 生을 거듭하여 살아왔다면 나는 어느 순간 오징어였고,물이었고,바람이었고,나무였고,말이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칸타도 바위였고,눈송이였고,다람쥐였고,구름이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존재를 거쳐오며 이 순간 우리가 만났을 것인가. 전생과 윤회의 삶이 있다면 그 안에서 무슨 위가 있고 아래가 있을 것인가. 너와 나라는 분별이 사라지고 일체감이란 본질만 남을 때 어떤 생명의 모습을 입고 세상을 살아가든 사랑만이 생명의 관계를 조율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지어준 마방에서  사람이 주는 먹이를 먹고 사는 승용마는 이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터전 말고 다른 삶의 모습은 없다. 말들은 그들끼리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관여하는 사람들조차 같은 무리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렇기에 사람이 생각하든 안하든 의지에 상관없이 말과의 관계망에 얽혀들게 된다. 무수한 관계의 상자를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랑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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