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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 첫번째 그림이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1863,캔버스에 유채

 

 

 

  오후 6시 무렵이 되니 햇살이 부드럽게 대지를 어루만진다. 아이들과 남편과 풀밭에 나왔다. 말과 인연을 맺은 후로 우리 아이들이 누리는 최고의 풀밭이다.  승마클럽 부지 옆에 딸린 땅을 클럽측에서 임대했는데 가운데는 밭, 가장자리는 승마트랙으로 용도가 결정됐다.

 승마트랙은 곧 풀들에게 점령당했다. 풀의 영토, 날벌레와 기어다니는 벌레가 신도시를 개척했다며 살아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은 지극히 문명인스러운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풀밭에 나와 칸타와 아마르가 풀을 뜯는 모습을 무심히 보다가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벌써 십 년이나 말과 풀밭에 산책 다녔는데 왜 이제서야 이런 생각이 떠올랐나 의아할 정도다. 말과 사람이 함께 풀밭에 나와 즐기는 모습에 , 그 유명한 명화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가 겹쳐졌다. 

  학창시절, 미술책에 나와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림이다. 풀밭에서 신사 두 명이 나오고, 그보다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구도의 핵심은 알몸의 여인이다. 이 그림이 전시되었을 때 당시 사회에 일파만파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 전까지는 여신의 누드는 그렸어도 사람의 누드는 그리지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누드여인이 당돌하게도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거리낌도 없이 관객을 당당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불붙은 듯한 충격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거기에는 탈의와 착의, 자연과 문명, 남자와 여자라는 대립항이 들어 있다.

  이 그림이 발표된 시기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중심의 세계관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빛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던진 여인의 시선은 강렬했기에  ,이 그림은 근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미술사에 새겨지게 되었다.

 

 

 

  풀밭에서 우리는 사람과 동물, 자연의 시간에 머무는 존재와 문명의 시간에 머무는 존재, 탈의와 착의 상태로서 구분지어진다. 우리는 이 순간을 함께 머무는 상태다. 사람이 초식동물을 기르기 시작한 이래 모든 시간을 망라하여 , 사람과 초식동물은 함께  풀밭에 머물러왔다. 풀밭에 삶이 있었다. 그 모습이야말로 <풀밭위의 점심식사> 오리지널 이미지가 아닌가?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에서 '옷을 입었다' 와 '옷을 벗었다' 는 당대성을 표출하는 첨예한 문제였다. 근대 이전은 신의 세계다. 종교야말로 절대의 가치를 담고 있었고, 그 다음으로  종교와 맞잡은 귀족들의 계급이 뒤를 이었다. 자연이나 인간 자체는 하잘 것 없었다. 종교지도자나 귀족은 곧 절대권력이었다. 권력은 속성상 권위를 내세우기 마련이다.  도덕이나 관습,규율을 앞세울 수밖에 없다. 옷은 그러한 장치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도구이다. '옷을 벗어던지다'는 것은 도덕,관습,규율을 깨뜨린다는 혁명적 사고와 다를 바 없다. 그런 시대상황에서  마네의 그림이 센세이션의 다이너마이트 작용을 했다. 당시의 기득권층은 그때껏 가려왔던 종교나 권력의 허울이 찬란한 빛을 받고 색바래버릴까봐  두려워하여, 여신의 누드는 봐도 여인의 누드는 불가하다며 찌질한 아우성을 징징거리지 않았겠나.

 

 

 풀밭에서 식사(?)하는 말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편안함이 내몸의 혈관을 고루 돌고 있는 것만 같다.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테헤란로 거리를 바삐 걸어가는 신사가 있다. 신사복 정장에 안에는 빳빳한 와이셔츠와 넥타이, 발에는 딱딱한 구두를 신었다. 보기만 해도 답답하고 내 목을 옥죄는 것 같다.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삶은 알몸으로 태어난 이후로 내내 부자연스럽다. 옷을 벗지 않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학교에 가면 교복, 군대에 가면 군복, 직장에 가면 유니폼, 뿐만 아니라 운동할 때, 데이트할 때, 비지니스 계약할 때 입는 옷이 다르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보이고 싶은 모습에 따라 옷을 골라 입는다. 그러다 보니 상대가 옷 입은 모습이 그의 본모습이라 착각하고, 스스로도 특정한 옷입은 자신이 진정한 자기자신이라  믿고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옷 벗은 상대나 자신을 대면할 때 큰 혼란에 휩싸이고 급기야 지독한 불안에 시달리기도 한다. 연애할 때 장밋빛 환상에 사로잡혔던 남녀가 결혼식 끝나고 석달 열흘간 생애 최고의 전쟁에 휩싸이는 것도 옷 입을 때는 몰랐던 낯선 타자와 대면하기 때문이다. 엄마 그 자체에 충실하게 살아온 중년여인이 자식이 떠나고 빈둥지 증후군에 빠지고 평생 몸담던 직장에서 퇴직한 가장이 인생의 허무를 느끼는 것도 옷입은 자신 외에는 대면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르가 풀밭에서 알몸인 채로 식사를 한다. 자연스럽다. 음식은 복잡한 요리과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뭘 먹나 메뉴를 고민할 필요도 없다. 풀밭에 나있는 놈들 중에서 입맛 땡기는 대로 뜯어먹으면 된다. 아마르가 풀 사이에 당근풀이 숨어 있어서 고몸을 쏙 뽑아내면 주홍빛 당근이 딸려올라오는 것을 알았다. 녀석의 입에 손가락만한 당근이 대롱거리다가 쏙 딸려들어가는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칸타의 기호는 당근보다 그냥 긴 풀이다. 입에 당근 이파리가 걸리면 퉤 뱉고서 딴걸 찾는다.

 

 

 

 

  내가 말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아무런 가식도 위선도 체면도 필요없이 그저 자연과 하나가 되어 머무를 수 있어서다. 정치고, 종교고, 가치관이고, 신념이고 풀밭에서는 가녀린 풀대궁 하나만한  가치도 없다.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를 재음미해보니, 내가 말을 따라서 풀밭에 풀시중 나온 일이 매우 혁명적인 행위로 여겨진다. 근대 이후로 종교나 계급사회가 타파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세상은 어떤 권력이나 세력이 암암리에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니체가 '신은 죽었다' 선언하고 성난 프랑스 시민들이 왕을 단두대에서 처형한 후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여전히 힘들다. 가장 힘든 것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일 것이다. 옛날에야 신의 뜻대로, 왕의 뜻대로 살면 되었지만 지금은 내뜻대로 살라 한다. 민주주의 자유국가 시민이므로 그리 살라 한다. 내가 고민해서 결정해야 하는 어려움은 고단한 삶을 불러온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가 좋다하는 대세의 물결을 따르는 게 차라리 편하다. 오늘날 대중문화, 소비문화의 발달은 이 지점에서 탄생하고 번성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내 욕망이나 감각이 무엇인지 외면하고 살게 되기도 한다.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지...

 

 

 

 

  강렬한 파문을 일으켰던 마네의  <풀밭~ > 그림 이후로 수많은 유사작품이 그려졌다. 조르지오네, 티치아노, 피카소, 존 드안드레아 같은 화가가 그들이다. 마네 작품도 사실 이전에 원본이 있었다고 한다. 16세기 화가인 마르칸티오니 라이몬디의 <파리스의 심판>에는 서로 분쟁하는 여신들 틈바구니에서 그들의 일일랑 무슨 상관이냐는 듯 태평하게 대화하는 바다의 신들이 풀밭위의 점심식사에 나오는 구도와 자세로 나온다. 역사가 유구한 그림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사실 우리들은 모두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를 동경하고 추종하는지도 모른다. 아웃도어 산업의 발달이 그 증거다. 핫트랜드인 캠핑이야말로 풀밭에서 밥 한끼 먹어보겠다는 열망 아니겠는가. 그 열망을 충족하려고 막히는 도로를 기어기어 다녀오는 일도 불사한다. 넥타이와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박한 열망이 현실에서는 힘겹게 이루어야만 하기에 눈물겹기조차 하다. 이래저래 살기가 힘들다. 일하랴, 쉬랴.

 

 

 

 

  말과 지내기 시작한 후로 나에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비행기를 탈지언정 절대 장거리 드라이빙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거다. 그 욕망을 잠재우는데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 진정한 오리지날 <말과 풀밭위의 점심식사>가 한몫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 아이들과 풀밭에 나갈 때 망사마스크를 씌워주는 것은 ,실제적 이유야 날벌레를 차단하려는 거지만 거기에 의미 하나를 덧씌워보자면 '내가 속한 문명을 존중한다.' 이다.

 

 

 

 

 문명과 자연의 평화로운 공존이야말로 이 세계가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 생각을 구현하기 위해 풀밭 위의 칸타와 할망은 보랏빛으로 소품과 의상을 '깔맞춤' 했나?

 

이 글은

말 아이들에게 최고의 만찬을 선사한

풀밭에게 경의를 표하는 '풀밭예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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