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살아 있어!

 

 

 

 진짜 살아 있다구 ~ ~ ~

 

 

 

 

화창한 주말에 칸타와 아마르가 밖에 나왔다. 1주일 전 큰 비가 내린 이후에 운동장이 질퍽거려 나와 놀 수가 없었다. 이날 운동장은 보송보송, 햇빛은 쨍쨍하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날씨였다.

 

 밖에 나온 아이들이 처음엔 눈이 부신지 몇 번 깜박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고 킁킁 땅조사를 시작한다.

 

 

                                     

 

 뒹굴 자리를 고르는 것이다. 그런 후 둘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러덩 눕더니 힘차게 등을 땅에 비벼댔다. 그 모양은 바다에서 막 건져올린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바닥에 던져졌을 때 팔딱팔딱 뛰어오르는 격렬함과도 흡사했다.

 

 

 

 대여섯 번 정도인가. 가려운 곳이 시원해졌는지 드러누운 자세에서 엉덩이로 앉았다가 뒷다리 힘으로 벌떡 일어나는 순서로 몸을 세우더니 꼬리마저도 세웠다. 기분이 붕 떠서 매우 좋아진 거다. 그 다음은 기쁨의 세레모니를 할 차례. 이때 나타나는 발걸음이나 몸의 동작은 승마할 때에 나타나지 않는 자유롭고도 현란한 몸짓이다. 네 다리는 제멋대로 차고,뿌리고 난리가 난다. 우리도 한때는 그랬다. 어렸을 적에 기쁨에 사로잡혔을 때 '오도방정'을 떨며 마음껏 기분을 발산했다.

 

 

 

 

 

 요즈음, 아이들이 마방에서 나와 노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몸짓에서 새로운 언어를 발견한다.

 

 

                 '어? 우리 살아 있네. 살아 있는 거 맞네. 그치그치?'

 

 

  이런 정서적 반응은 어디서 조난을 당하여 구조를 기다리다가 막 구조되었을 때, 혹은 체력을 넘어서는 산행을 하고났을 때 그 상황이 해소되면서 찾아올 법하다. 그런데 칸타와 아마르는 그저 실내공간에 있다가 야외로 나왔다는 일상적인 변화에도 그토록이나 희열에 찼다.

 

 동물들이 대부분 그러한 것 같다. 오래 전에 집에서 키우던 말티즈 종 꼭지는  해가 떠서 식구들이 잠을 깨고 자기와 눈이 마주쳤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아침마다 난리법석을 피웠다.

 

 

 문득 생각해보았다.

매일매일 삶의 의미가 뭔가 하고 골똘히 생각만 하는 나보다는 그저 단순하게 사는 칸타와 아마르가 더 행복한 건 아닐까?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더 행복할 줄을 아는 건 아닐까?'

 

 

 

 행복할 줄 아는 능력에서 더 열등한 나는 아이들의 환희에 찬 몸뚱이와 나 사이에 연결된 투명한 대롱으로 그들이  발산하는 에너지를 흡입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르가 말을 할 줄 안다면

 

"할머니는 말야.내가 행복할 줄 아는 법을 그렇게나 가르쳐줬는데 만날 고민을 싸짊어지고 살아?" 이럴 것 같다.

 

 

 나에게 오래 된 책 한 권이 있다.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대담집을 엮은 <신화의 힘>이란 책인데 1993년에 구입하여 여지껏 소장한 책이다. 최근에 다시 꺼내어 펼쳐보니 군데군데 밑줄과 메모가 많았다.

 

옛 사진집을 들춰보는 기분으로 좀 읽어보니 그 책이 그간 살아온 내 인생에 길잡이가 되어줬구나 싶었다.세계적인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세상을 떠난 후 그를 기리기 위하여 기획된 책인데 대담집이니만큼 조셉 캠벨의 육성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어서 좀 옮겨볼까 한다.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이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예전에 나는 어느 글에선가 우리가 말과 만나고 승마를 하는 것은 '싱싱해지기 위해서' 라고 쓴 적이 있다. 조셉 캠벨이 말한다.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깊고,풍부하고,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는 책의 다른 부분에서 말하길 신화를 '도로표지' 나 '본'이라는 언어에 빗대어 표현한다. 만일 도로에 도로표지가 없다면 차들이 엉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현대인이라면 잘 알 것이다. '본'은 원형이란 언어에 가까울 것 같다.

 

 오래 전에 내가 퀼트조끼를 만드느라 지인이 갖고 있던 옷본책을 본 적이 있다. 셔츠,바지,스커트,원피스 등등 이런 옷들의 원형들이 모여있는 종잇장을 넘기며 신기했다. 길만 나서면 어딜 가나 즐비하게 늘어선 옷가게에 넘쳐나는 수많은 옷들, 그 옷들의 원단,색깔,무늬, 디자인은 모두 달라도 바지면 바지,셔츠면 셔츠일 수밖에 없는 원형이 있다. 그 옷을 만들려면 아무리 유행에 따라 변화를 주더라도 '본'에서 응용되어 파생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천차만별의 인생이 있지만 각각의 안에 깃든 공통점,바로 '본'이 어딘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본'을 조셉 캠벨 같은 신화학자는 신화가 그 '본'이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말은 우리 삶을 싱싱하게 만든다.

신화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에게서 어떤 '본'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의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의문에 따라오는 꼬리처럼 또다른 의문도 떠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순간 요즘 예매율 1위라는 <빅히어로>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주인공 히로가 아이디어가 꽉 막히는 순간에 확 뚫어주던 방법은 바로 '다르게 보기'였다. 익숙한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았을 때 여지껏 보이지 않던 뭔가가 확 보이기 시작했던 거다.

 

 

 

 

말을 다르게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조셉 캠벨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한다.

 

인디언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나무,돌,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나는 말에 관해서라면 그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한다.

다른 존재를 <그대>로 바라보면 그 존재가 가진 신성을 깨닫게 되고 그 신성에서 흘러나오는 생명력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만일 존재를  <그대>가 아니라 <그것>으로 바라보게 되면 비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메리카 신대륙 개척자들이 들소의 가죽을 벗기기 위하여 수십만 마리를 초원에서 학살한 사실이 있다. 들소가 <그것>들이었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만행이었을 것이다.

 

말도 그저 하등한 동물로서 '탈 것'으로 바라본다면 '탈 것'에 불과한 <그것>에서는 샘솟는 생명력 따위가 있을 수 없다.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할 소리가 있다. 말이 내쉬는 푸우푸우 하는 숨소리다. 칸타와 아마르가 환희에 차서 꼬리가 올라갔을 때 그 꼬리의 춤사위에 가락을 맞추는 소리가 확장된 콧구멍으로 울려퍼지는 숨소리.

 

 

 

그 숨소리에서 엄청난 원초적 기운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 뿐일까?

수많은 말 영화에서 말이 등장했을 때 코로 내뿜는 말 숨소리를 음향으로 크게 울리도록 효과를 집어넣는 것에서 거기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보편적 요소가 있지 않나 생각해보았다.

 

 

 

 

위에서 어쩌다 길게 주절주절 늘어놓은 장황한 이야기를 한데 그러모아 집약한다면 조셉 캠벨의 바로, 이 말이다.

 

삶의 황홀!

 

모이어스 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 있다는 것뿐입니다.

너무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그만 가장 중요한 내적 가치,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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