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방 복도에 아이들을 세워놓고 안장을 맬 때 밖의 빈 논을 바라보는 말의 눈빛에서 어떤 욕망이 얼핏 느껴진다.

 

저 논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볏줄기 삭삭 뜯어먹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자주 논에 가서 풀뜯기 시중을 들다보니 - 개 산책 시키듯 로프에 매어 잡고 있는 - 칸타나 아마르나 그 장소를 벗어날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거 잘된 일이지 하고서 마사로 돌아가는 입구에 쇠사슬 줄을 치니 논은 훌륭한 가두리 방목장이 됐다.

 

마방굴레에서 로프연결 고리를 떼는 손가락에 전기에 감전된 듯 희열이 번졌다.

 

"이제 자유야! 너 가고싶은 데로 가라!" 호기롭게 외치며 홀가분함을 만끽했다.이것들이 놀랄까, 튈까 얼마나 노심초사 했었나.

 

칸타와 아마르도 내심으로 말 나름의 홀가분함이 채워졌을 것 같다.

 

논에서 갑자기 찾아온 자유로움에 무엇을 할까 잠시 망설였다.뭘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이 순간을 맘껏 즐기기로 했다.

 

그러려면 편히 쉬어야 하니까 의자가 있어야겠고 그냥 앉아있으면 심심하고 말만 뭘 먹어서야 불공평하지 나도 뭘 먹어야겠다 머리회전은 빨랐다.

 

얼른 뛰어가서 찻물을 끓여 커피 두 잔을 타고 - 한 잔은 블로그 전속 사진작가(?) 할방님 몫이다-점퍼 호주머니에 비스킷을 구겨넣고 남은 주머니에 쥬스도 한팩 넣고 의자를 들고 논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할방을 불러 커피를 건네니 아이들이 뭐야뭐야? 나도나도! 하면서 일제히 몰려온다.커피 쏟아질가봐 손사레를 치며 쫒아내야 했다."니들은 니들 거나 먹어! "

 

말은 입과 다리만 있으면 풀밭에서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만족스럽다.반면에 나는 의자며 먹거리를 어디서 가져다 의존하는 처지다.비스킷을 우물거리며 생각하니 내가 말보다 매인 게 많다는 생각이 든다.

 

빈 논에 머무를 때 자신이 말보다 한참 떨어지는 야생성에 열등감을 느끼며 가을의 한기 때문인지 약간 주눅든 자세인 웅크린 모양새로 내 생활을 돌아보았다.

 

아마르 만나러 오기 전에 머리가 왜 그리 복잡했나 생각했더니 신경을 많이 쓴 탓이다.월말이 되니 메일함에는 각종 청구서 목록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카드며 통신요금,공과금 등등 항목도 수십 가지다.

 

한 달 내내 날아드는 각종 청구서를 보면 사람은 평생 날아오는 청구서에 파묻혀 지불하면서 한 생을 마감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다.

 

날아오는 건 청구서 뿐이 아니다.무엇을 소비하라 유혹하는 마케팅이 얼마나 많은지 메일과 스마트폰의 주인이 광고야 뭐야 하는 심정이 되기 일쑤다.

 

 

세상은 나를 청구서 발송처와 마케팅 타겟으로만 규정하는 것 같다.그런 게 싫어 휴대전화를 꺼둘 때도 많고 잘 받지도 않아 지인을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출판사와 계속 업무연락을 해야해서 전화기를 체크하는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나의 뇌파가 올라가고 뜨거워졌나 보다.

 

그 어떤 디지탈 기기도 없이 빈 논에 빈 몸으로 앉아 아이들 풀 뜯는 모습을 바라보고 서걱서걱 씹는 소리를 들으니 점차 머리가 맑아지고 가벼워졌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이보다 더 가벼울 수는 없다 싶을 정도로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사진 제목을 붙이면 <쓰레기통을 뒤지는 말>이 되겠다.그럴 리야 없지만 꼭 아마르가 그러는 것 같아 코믹한 장면이 되었다.

 

주변은 온통 평화로운 기운만이 감싸고 있다.

 

논은 충분히 넓었지만 아이들은 멀리까지는 가지 않았다.겁쟁이 칸타가 더 멀리 갔지만 딱 논의 절반까지였다.아마르는 내 주변에서 맴돌았는데 가끔 한번씩 괜히 다가와 닿을 듯 스치고 지나가며 눈빛을 맞추었다.

 

마치 나 지금 너무 좋아요 할머니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많이 먹어요 아마르~ 하고 화답한다.

 

지극히 평화로운 상태에 든 말을 좀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매우 몰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아니나 다를까 최고의 집중력을 모으고 있었다.

 

아이들은 엄청나게 빠른 입놀림으로 볏줄기를 쓱쓱싹싹 입안으로 거둬들이고 있었다.

 

이러는 상황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주어진 시간 속에서 최대한 풀을 뜯어먹겠다는 목표가 분명한 행위다.

 

우리 아이들의 먹는 속도는 빠르다.특히 아마르가 더하다.점심시간 말미에 마방에 가면 다른 말들이 식사중인데 아마르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안 먹은 것처럼 우두커니 서있을 때가 많다.관리인에게 물어보면 "아마르가요 딴 말보다 두 배는 빨리 먹어요."하고 대답해서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여느 말보다 2배속으로 먹는 아마르가 풀밭에 나오면 4배속 정도로 입놀림을 하는 것 같다.

 

말이 풀뜯어먹는 모습 구경하는 일은 얼마나 재미난지 나의 혼을 빼놓는 정도는 잘 만든 흥미진진한 영화를 볼 때와 비슷하다.

 

말이 아니라면 빈 논에 나와 앉아있을 일은 없다.

 

말과 함께 있기에 도시인이 잠시 자연의 시간으로 귀환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론 논에다 파라솔도 하나 꽂고 안락의자도 있으면 좋겠어 하고 떠올리는 나는 어쩔 수 없는 문명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할지라도 내 안에 꿈틀거리는 야생성을 회복할 수 있는 통로 하나쯤은 막히지 않게 열어두고 싶다.

 

그 통로는 말에게로 연결되어 있다.

 

 

* 할망 시시콜콜 요즘

 

뱀파이어 영화를 보다가 사람에서 뱀파이어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뱀파이어의 힘이 어마어마하고 통제가 잘 안된다는 대목에서 "순치가 덜 됐어!" 하고 승마관련 용어가 절로 튀어나오네요.혹시 다들 그런 경험이 없으신지.  별거 아닌 일상사를 승마와 관련짓는 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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