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유니콘의 숲을 거닐고 있다> 본문 2장 시작면에 나오는 사진 / 모델 : 몽돌이

 

출판하기로 한 책 원고의 이름 격인 제목은 쉽게 정해지지 않았다.쉽게 정할 수가 없었다. 책 제목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책의 팔자가 운명을 달리할 것 같아서 무거운 책임감만 껴안은 채로 오랜 시간을 흘려보내야 했다.내가 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지인이 '책 제목이 뭐죠?" 라고 물어와도 "아직은 글쎄..."라고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제목이 떠오르지 않고 오리무중이었다. 

 

책의 의도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승용마에 대한 인식을 낯설게 환기시켜 새롭게 바라보고 의미를 발견하는 계기로 삼고자  함이니 그에 걸맞는 제목이어야 했다.익숙한 사물을 새롭게 더더군다나 최상의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맨날 새둥지 머리를 이고서 늘어진 츄리닝 바람으로 소일하는 아내나 남편을 여신이나 신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지리한 일상이 끝도 없이 풀려나가는 실타래처럼 이어지다가도 어느 한 순간 그 또는 그녀가 대단히 눈부시게 빛나보이기도 한다. 일생에 그런 일이 몇 번 찾아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런 특별한 순간이 생을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우리가 만나는 승용마를 그저 평범하게만 바라보면 세상 천지에 널린 게 말인데 뭐 있어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들을 타고 놀라운 열락의 세계를 체험하고 나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존재로 느껴진다.바로 그 순간의 고귀함을 내 삶 안으로 끌어들이는 행위가 승마의 가치가 될 거라 생각하고 그를 표현할 언어로 '유니콘' 이 내 머릿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출판 준비과정 내내 나의 1차 편집자 역할에 충실했던 할방에게 유니콘이 제목에 들어가면 어떠냐고 물었다.'유니콘의 숲' '유니콘의 숲에 들다' 등등.할방은 유니콘이 가지는 기존 이미지 때문에 썩 마음에 들지 않고 정통문학 에세이 제목 같기도 하고 아무튼 아니라고 했다.

 

넌지시 던져본 제목 아이디어가 비호감 판정을 받았다.그렇다면 다른 방향으로 찾아보자.이번엔 대중적이면서 친근하고 편안한 제목 없나 궁리를 하다가 이런 제목을 지어냈다.

 

<애마부인은 트로트 하러 승마장에 간다>

 

할방에게 들려주니 그의 반응은 '긔 뭥미???' 이런 정도로 보였다.하지만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서 제목의 의도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글쓴이가 말을 사랑하는 결혼한 부인이니 애마부인 맞잖아.저자의 정체성도 뚜렷하지.맨날 말 타고서 트로트(속보)운동 하잖아 맞지.쉽고 대중적이지 않아?"

 

나의 침 튀기는 설득에 할방은 "틀린 말은 아닌데...  " 하고서 찜찜한 여운을 남겼다. 찜찜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폭탄급으로 위력을 키워 나에게 덮쳐왔다.출판사의 담당 편집자와 전화 통화를 하게 되었다.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제목 얘기를 꺼냈다.

 

"저어...제목은 ...그냥 ..그대로..가실 거예요?"

"그런데요.제목이 어때서요? 괜찮으니 제목에 대한 소감을 솔직하게 얘기해주세요!"

 

그러자 지금까지 친절함과 상냥함으로 무장하고 성실한 자세로 임했던 편집자의 목소리가 아주 다른 모드로 전환하는 것이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그러니까요..애마부인이 워낙 이미지가 그렇고...안 좋아서요...트로트도 좀 그렇구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어떤 것을 억지로 입에 올려야하는 불편함과 불편함을 무릅쓰고도 상대가 불쾌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하는 지점에서 애쓰고 있음이 역력했다. 나는 그녀의 우려를 좀 가라앉힐 겸 해서 우리사회에서 승마가 아직은 생소해서 대중적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어휘를 골라 배열한 것이며 트로트는 승마전문용어다 라고까지 설명했다.그녀가 그렇군요 라고는 했어도 근본적인 거부감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좀 더 나은 제목을 찾아보자며 통화는 마무리됐다.내가 낸 제목이 그렇게 심각해? 뭐가 심각해? 하는 마음에 진상조사를 철저히 해보자 싶었다.

 

먼저 인터넷서점에서 '애마부인'이 들어간 책 제목이 있나 찾아보았다.그랬더니 책은 없었고 애마부인 DVD가 몇 개 올라와 있었다.서점에서 나와 검색으로 다시 애마부인을 찾아보았다. 눈 한 번 깜빡할 순간에 바뀐 화면에는 영화 애마부인에 대한 정보만 가득했다.나의 순수한 - 아니 순진함이겠지 - 인식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애마부인'이란 말은 에로영화의 대표적 상징이었다.영화 '애마부인'은 한국영화에서 최다시리즈 영화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1982년 1편이 제작된 이래로 1996년 13편까지 이어졌으니 가히 한 시대를 풍미한 거대한 문화적 공룡이었다.멜로와 에로를 결합한 장르에서.할방에게 나만 몰랐던 기막힌 현실을 들려주니 그보다 더한 정보도 보태주었다.시리즈 13편 뿐만 아니라 집시애마,파리애마 등등 애마부인 아류시리즈가 엄청나대나.그런 건 그렇게 잘 알아.하기야 15년 전만 해도 동네마다 비디오가게가 성업을 했고 늘 바지런히 드나들던 할방이니 실상을 모를 리가 없겠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이미지를 보니 전형적인 에로영상 이미지 절반에 말이 등장하는 승마관련 이미지 절반이었다. 내 눈에는 그 장면이 꼭 컴퓨터 시스템 고장으로 에로와 승마 키워드에 해당하는 이미지가 뒤죽박죽 섞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10년 전 처음 승마를 시작했을 때 함께 말타던 여자 선배가 있었다.그녀가 주변 사람들에게 승마 한다고 말하면 대뜸 상대방 입에서는 '애마부인'? '경마장 다녀?' 이런 소리가 튀어나와 짜증나고 속상해 죽겠다며 하소연 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8~90년 대에는 말이나 승마 이미지가 애마부인으로 단순하게 통합이 되어 대중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증명인 셈이다.

 

나의 담당 편집자는 20대 신세대 아가씨인데 '애마부인'의 전형적 에로물 이미지를 떠올렸으니 애마부인은 8,90년대만 휩쓸고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어슬렁거리며 존재의 영향력을 막강하게 과시하고 있었다.이러한 현실은 '애마부인'의 탓이 아니다.첫 '애마부인' 영화 이후로 30년이 흘렀어도 아직 승마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이 미미하여 애마부인을 밀어낼 만큼 대중적 인식의 확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힘이 세기론 '애마부인'뿐만이 아니었다.'트로트'는 더 만만치 않았다.트로트는 온 국민이 사랑하는 대중가요 장르로서 트로트는 곧 음악이었다.여기엔 네 발 달린 동물의 걸음걸이를 일컫는 보편적 어휘로 통용되기를 기대하며 끼어들 여지는 가히 없었다. 만일 <애마부인은 트로트 하러 승마장에 간다>로 책을 냈다가는 뽕짝 얘긴줄 알고 샀는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이거 가요 아니잖아? 하고서 항의 환불 사태로 출판사가 초토화 되고 나 역시 곤욕을 치루게 될 미래가 훤히 보였다.

 

결국 애마부인과 트로트의 권세에 밀려 깨갱 하고서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뭐 제목으로 안 쓰는 거야 마음을 접으면 그만이지만 다른 억울함은 남았다.승마인으로서 내가 알고 있는 진정한 애마부인이 얼마나 많은가? 애마아저씨도 말할 것도 없다. 말을 사랑하여 매일 엎으려 말 발굽을 파주고 털 손질을 하고 똥삽질도 '사삭' 마다 않는 건전한 애마인이 그 이름도 당당한 애마부인,애마아저씨 라는 제이름값을 찾지 못하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우여곡절을 겪고 나니 구관이 명관이라고 처음 떠올렸던 제목의 장점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할방이 1차 편집자의 책임감을 다 하는 것처럼 제목을 수정해서 완성해주었다. 유니콘이라는 단어가 앞머리에 나서면 너무 두드러지니까 '우리는 지금'과 '~거닐고 있다.'라고 배열된 사이에 '유니콘의 숲'을 넣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의미는 살아나면서 더욱 서정적이고 사색적인 분위기가 배어나와 내 마음에도 들었다. 오늘에 이르러 승마에세이 제목을 <우리는 지금 유니콘의 숲을 거닐고 있다> 라는 현재진행형 문장으로 걸게 된 사연이다. 세상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곳이 된다. 에로,호러,멜로,환타지,액션...당신은 어떤 장르를 좋아하시는지.

 

말도 마찬가지겠죠.기왕이면 고귀한 신성을 지닌 천상의 동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천복을 누릴 준비가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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