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점령한 듯하다. 눈으로 볼 수도 없는 그것이 최고의 존재감을 뽐내더니 성큼 내 코 앞에 다가왔다. 나는 현재 일시 휴업 상태다. 내 주요 일상이 멈추니 잠시 망연자실해진다. 집안을 휘휘 둘러보다가 <일의 기쁨과 슬픔> 이라는 책이 유난히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금의 처지에서 일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던가 생각해보았기 때문이리라. 생각해보니 나는 내 일을 사랑하고 있으며 현재의 사태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그저 마음을 내려놓고 어떻게 해야 가벼워질 수 있을까만 궁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 소설집에는 총 8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도 어디선가 겪고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인데 그 중에서 <다소 낮음> 이라는 소설에 대하여 말해보고 싶다.

 

 주인공 장우는 홍대앞에서 활동하는 인디 뮤지션이다. 1집 앨범을 하나 내기는 했으나 그닥 팔린 것도 아니다. 그래도 자신의 음악에 반해 열렬한 팬이었던 유미와 함께 살면서 좋아하는 음악을 한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어느 날 장난으로 아버지가 사준 낡은 냉장고 앞에서 기타를 두들기다가 만든 '냉장고송'을 유미가 유튜브에 올렸는데 대박이 나서 장우에게 성공의 기회가 눈앞에 찾아왔다.

 

  유미는 성공의 확신과 희망으로 들떠있고 곧 어떤 기획사로부터 연락이 와서 '냉장고송'을 음원제작 하자는 제안을 받게 된다. 하지만 장우의 입장에서는 장난으로 만든 노래 같지 않은 노래를 상품화 시킨다는 것도 께름찍하고 , 현재의 인기를 밑천으로 앨범을 급조하여 낸다는 것도 도저히 음악가의 양심으로 용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거절하고 만다.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찬 장우를 용납할 수 없었던 유미와는 갈등이 커지고 유미는 집을 나간다. 유미가 집을 나간 계기는 장우가 난데없이 비숑프리제 강아지를 사서 안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유미 입장에서는 남자친구의 정신 상태가 온전치 않다고 느꼈을 것이다. 지금 전기요금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형편에 어쩌자고 몸값도 비싼 귀한 개를 들인단 말인가? 그 일이 기획사 제안을 거절한 직후라 유미의 충격은 더더욱 컸을 것이다.

 

장우가 눈꺼풀에 콩깍지가 씌었던 그 순간을 책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저 개는 내가 대체 누군 줄 알고 이렇게 반기는 걸까. 말 못하는 짐승의 마음을 들을 수는 없지만 장우는 저 개가 분명히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눈빛이 가능할 리 없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네가 너여서 좋다는 그 눈빛. P.116

 

  입양한 비숑프리제는 보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유미는 집을 나가버렸고 보리를 데리고 다니는 장우가 미쳐버렸다고 사람들은 수군댔다. 그래도 장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장우는 새 곡을 쓰기 시작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2집에 수록할 곡들이었다. 곡이 완성되면 보리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보리는 장우의 기타 반주만 들으면 꼬리를 치면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가끔 고개를 쭉 빼고 늑대처럼 울부짖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장우와 눈을 마주쳤다. 보리가 솜사탕처럼 동그란 얼굴을 하고서는 장우를 쳐다보고 헥헥거릴 때면 장우는 한없이 벅차올랐다. 말 못하는 짐승이 말 대신 보내는 그 신뢰의 눈빛을, 장우는 좋아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 본문 P.118

 

 이 대목을 읽으면서 잠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도 살아온 인생의 나날 어느 때쯤 겪어보았던 감정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다가 세상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거부한다고 느낄 때 아무런 조건 따지지 않고 바라봐주는 동물 친구의 눈빛에서 인정과 ,지지, 신뢰, 응원을 발견하게 되면 나도 역시 조건 따지지 않고 동물을 나의 세계로 깊숙이 끌어들이게 된다.

 

  내가 거지이든, 흙수저이든, 못생겼든, 공부를 못하든 아무런 상관없이 바라봐주고 대해준다는 것은 매력적인 것을 넘어 황홀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이 뭔가 무책임해 보이고 막무가내스러운데 입양을 하는 까닭은 돈과 성공이 절대선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 숨쉬고 싶은 갈망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오래 전에 소설에 나오는 보리처럼 나를 바라보는 동물에게 콩깍지가 씌워져 입양을 한적이 있다. 하필이면 그 동물이 말이어서 그후로 많은 고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동물과 인연을 맺고 만난 세상에서 느낀 수많은 감정과 의미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보리는 얼마 못가 병으로 죽고만다. 그렇다고 해서 장우가 심하게 망가지는 일따윈 없다. 보리의 죽음을 수습하고 돌아와 낡은 냉장고 옆에서 있어야 할 곳으로 무사히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아무래도 장우는 보리를 떠나보낸 상실감을 예술의 에너지로 승화사켜 멋진 음악을 만들어낼 것 같은 예감이다. 그리하여 장우가 자신의 음악세계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만나 인정받고 이 정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란듯이 성공하고 떵떵거리며 살기 바란다. 장우는 살면서 자신이 힘들어질 때 한없는 신뢰로 바라보았던 보리의 눈빛을 떠올리면서 다시 추스리고 나아갈 것이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보리와 같은 따뜻한 눈빛을 보내준다면 , 그 역시 장우처럼 자신의 정원에 눈빛의 주인을 초대할 것이며 이 일은 두 존재 모두에게 구원이 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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