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수장대에 서 있는 칸타

 

마방 안의 칸타

 

칸타의 눈빛은 무엇을 말하는가?

올여름에 칸타는 곡물사료를 일정 기간 끊어야 했다.승마클럽에 사는 말의 주식은 크게 두 가지다. 조사료라 하는 건초와 농후사료라 하는 가공곡물사료이다.말은 건초보다 곡물사료를 좋아해서 식사가 제공되었을 때 먼저 곡물사료를 허겁지겁 다 먹은 다음에야 느긋하게 건초를 우물거리며 씹는다.곡물사료는 고소한 향이 나고 감칠 맛이 나서 말의 식감을 자극하는 게 틀림없다.

이렇게 맛나는 곡물사료를 칸타에게 주지 않기로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여름이 되자 원인 모를 두드러기가 칸타의 몸에 돋아난 것이다.보름이 지나도록 올록볼록한 두드러기가 없어지지 않아 지나친 열량이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 관리인에게 칸타의 곡물사료를 당분간 끊고 대신 건초는 넉넉히 주라 일러두었다.

그로부터 하루,이틀이 지났다.승마클럽에 당도하여 칸타 뭐하니 부르며 마방으로 다가섰다.얼핏 비친 칸타의 표정이 좋지가 않았다.엄마가 부르니 얼굴은 내밀었지만 신경이 예민해져서 귀도 뒤로 파들파들 눈매도 번득번득 했다.얘가 왜 이러나? 이러구 있는데 아빠가 나타났다.전날 아이들을 못 보아서 얼굴에는 반가움과 기쁨이 번져 한껏 웃는 표정이었다.아빠가 그러구서 나타났는데 칸타는 마방으로 얼굴을 쏙 내밀더니 기다렸다는듯이 귀를 납작하게 눕히고 입을 실룩실룩 악악 대는 게 아닌가!

그 표정은 과거에도 목격했던 적이 있었다.1년 전 이곳으로 새로 이사왔을 때 우리 아이들은 자동급수장치에 적응해야 했다.그러나 칸타는 하룻밤 동안 물 먹는 법을 알아내지 못해 물을 한 모금도 먹을 수 없었다.다음 날 오후에 아빠가 나타나니 오늘처럼 머리를 내밀고서 머리 끝까지 치민 분통을 터뜨렸던 것이다.물도 안 주다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느냐고 항의를 한 것인데 표정으로 보아 좋은 말로 한 것은 아니었고 욕쟁이 할머니가 즐겨쓰는 상용구를 더빙하면 딱 맞았다.

또 다시 칸타가 머릴 내밀고 한바탕 욕을 퍼부우니  아빠는 좋은 얼굴을 하고 와서 갑자기 찬물벼락을 맞는 처지가 됐다.야가 왜 이라노? 하며 의아해하는 관리인에게 칸타가요 지금 욕을 퍼붓는 거예요 그랬더니 관리인도 그냥 웃을 수 밖에.자세히 보니 칸타가 악악대며 욕을 퍼부은 뒤끝에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쩝쩝 다셨다.오라 이제야 감이 왔다.칸타가 왜 사료를 안 주느냐고 불만을 터뜨린 거구나.

그날 이후로 칸타에게 새로운 악벽 하나가 생겼다.사료를 훔쳐 먹는 일이다.물론 말이니만큼 제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가 몰래 훔쳐먹고 들어오는 상황은 아니다.칸타는 하루에 2~4회 정도 마방에서 바깥으로 연결된 통로를 왕래한다.그 통로 중간쯤에 사료간이 있어 곡물사료가 담긴 손수레가 놓여 있었다.누군가 칸타의 마방굴레 끝에 달린 리드줄을 잡고 이동을 할 때 칸타가 이때다 하고서 막무가내로 수레로 재빨리 걸어갔다.당황한 사람이 안돼! 소리치며 줄을 끌고 손바닥으로 때려도 보지만 말의 의지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사료간에 당도한 칸타는 킁킁 냄새로 사료수레를 찾아내고는 파리가 덤비지 못하게 덮어놓은 사료푸대를 들추고는 덥석 하고 사료를 입에 우겨넣었다.두 세번 입질을 한 후에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가고자 하는 곳으로 걸어갔다.이런 일을 아빠,엄마,이모 모두가 당했다.칸타와 함께 차분하게 마방이나 수장대로 향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꾼 칸타에게 매달려서 끌려가는 꼴은 사람이 힘 앞에서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여실히 증명했다.

말에게 끌려갈 때 반쯤은 걷고 반쯤은 날아가는 모호한 상황이어서 마치 사람이 말 목에 매달린 길다란 머플러처럼 나풀대는 것 같기도 했다.체면과 품위를 한참 구기고서 말에게 딸려간 후에 나도 첫번에는 무조건 야단을 쳤지만 생각해보니 이일이 마주의 지시로 말의 권리를 일정 부분 박탈한 데 따르는 결과물이어서 나나 할방이나 야단의 기세는 우유부단했다.

몇 번 그런 일이 반복되니 파블로프의 개처럼 학습이 되어 또 그러겠군 싶으면 또 그런 일이 벌어져서 나중엔 아예 그러는 칸타의 얼굴이나 살펴보자고 마음 먹었다.칸타는 사람과의 계약(?)을 위반하고 무턱대고 사료간으로 향하는 행동이 해서는 안되는 짓임을 분명히 알았다.제 의지로 걸음을 떼는 순간부터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는 자의 초조함에 점령당해서 걸음도 빠르고 맥박도 빨라져서 매사에 차분하지 못하고 허둥댔다.사료에 입을 쳐박고 와구와구 씹을 때 사료가 반은 입에서 쏟아졌다.눈빛을 비롯한 얼굴표정 전체는 떳떳하지 못한 일을 치루느라 긴장돼 있었다.사실 칸타의 성격이 겁도 많고 소심해서 이런 일 함부로 할 성격은 못되었다.그런데도 범죄(?)를 자행했으니 사료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크길래 그 지경이 되었나 싶어서 칸타가 안됐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해소되지 못한 욕망이 충족되면 - 사료를 두세번 입에 쑤셔넣고 - 칸타는 군말 없이 제가 갈 곳으로 갔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말에게 사람 잣대의 도덕성이나 양심을 적용할 수는 없겠으나 말도 제가 해서는 되는 일과 안되는 일을 구분할 줄 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기수를 낙마시킨 말이 좋다고 기뻐하는 경우는 없다.

며칠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클럽에 당도하니 운동장에 깐돌과 태풍이가 있었다.반가워서 깐돌아 하고 부르니 저끝에 있던 깐돌이가 에상과 달리 전혀 반응이 없었다.평소엔 바로 쳐다보고 구보나 신장속보로 달려오던 녀석이었다.여러 번 불러도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나중에 날 쳐다보았지만 밍그적대며 오지를 않았다.나중에야 깐돌의 속마음을 알았다.내가 오기 전 운동장에서 칸타 깐돌이가 놀다가 곧 들어가 기승운동을 할 예정이었다.그러다 뒤늦게 태풍이가 운동장에 나왔다.칸타는 부름에 응하여 나갔지만 깐돌은 태풍이를 보니 훈련받는 게 싫었고 태풍이랑 실컷 놀고 싶어졌다.그래서 할아버지가 나가자는데 뚝 서서 버티고 한사코 놀겠다고 자기 의지를 세웠다.할방은 깐돌이가 어제 하루종일 갇혀있기도 했으니 오늘 잘 놀면 내일은 공부를 잘 하겠다 싶어서 그냥 네멋대로 놀라고 내버려뒀다.잠시후 할머니가 나타났다.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깐돌은 할머니가 자길 데려다가 타려나 생각했나보다.그래서 속으로 아무리 할머니가 불러도 모른 척 해야지 하고서 모르쇠,밍그적 모드로 일관했던 것이다.내가 봤을 때 깐돌에게서 나타난 태도에서는 떳떳함이라고는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제 욕망은 채워야겠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이러면 안되는데 싶은 그늘이 드리워져서 활발한 기운을 찾아보기 어려웠다.그래 저 녀석도 다 커가지고 속이 멀쩡하구나 싶었다.

다시 우리의 새침녀 칸타에게로 돌아가보자면 대략 보름 지나서 사료금지령이 한 이틀 전에 풀렸다.어제 칸타를 타고서 씻겨 방으로 돌아갈 때였다.저녁식사 시간도 임박했고 운동도 잘 했으니 칸타가 몹시 출출했을 것이다.통로 중간쯤 걸어가니 나와 칸타의 눈에 사료수레가 보였다.여기서 말 걸음으로 서너걸음만 떼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순간 나나 칸타의 머릿속에는 사료가 떠올랐을 것이다.너와 나는 같은 것을 보고 있어 ! 그 다음 순간엔 칸타가 수레로 가겠구나 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그간에 형성된 습관이 관성처럼 작용할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는데 칸타는 눈꺼풀을 내리깔고는 그냥 천천히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이제 사료 주는데 뭐 하는 표정 같았다.

나도 어떤 이유로 빵이나 미숫가루로 끼니를 모두 떼워야 한다면 열흘 후에는 반쯤 미쳐서 쌀밥을 먹기 위해서라면 법이 금지하는 어떤 행위라도 하게 될 것 같다.

 

 

라라이모가 놀러왔던 날 칸타가 이모를 태워주고...

 

이모는 칸타를 목욕시켜주고...

 

풀뜯기 산책도 시켜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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