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 칸타...

3살에 나의 딸이 되었고...

5살에 깐돌이를 낳았다.

칸타와 깐돌의 즐거운 한 때

밖에 나와도 늘 어슬렁거리기나 하고 우아하게 서 있기나 하던 칸타가

이날은 어인 일인지 신바람 날리며 뛰어다녔다.

칸타의 존재감은 '다이나믹 칸타'일 때 가장 잘 드러난다.

..

..

내가 아는 한 어느 말도...

칸타의 펄펄 끓는 뜨거움을 따라오지 못한다.

..

이렇듯 나와는 밤하늘의 별 만큼이나 먼 곳에 있는 것 같고...

자기들의 무리에 속한 존재인 것 같은데

가끔..

기승운동을 하면서 내가 말이 되고 말이 내가 되는 듯한 축복이 예기치 않게 찾아오기도 한다.


얼마 전 지인들과 함께 근처의 승마클럽에 방문했었다.날씨가 너무 추워서 모두들 실내에서 통유리 너머로 승마하는 모습을 구경했다.그러던 중 누군가가 "저기 켄타우로스 있어요!" 라고 소리쳤다.모두들 "어디 어디?'하고 궁금해 했는데 정말 켄타우로스가 윗마장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켄타우로스의 정체는 윗마장의 말 매는 곳 지붕에 천막이 씌워져 있어 딱 기승운동자의 상체와 말 머리를 가리고 있어서 생긴 착시효과로 밝혀졌다.사람들의 눈엔 기수의 머리와 말의 몸통과 다리만 보일 뿐이어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가 지상에 출연한 격이었다.그 정체를 알고나서도 모두들 깔깔거리며 한동안 켄타우로스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었다.이 일은 내게 닥칠 현실의 예고편 쯤 되고 말았다.
내가 크리스마스에 켄타우로스 체험을 하고만 것이다.이 신비로운 체험에 대하여 난 말의 정령들이 보내온 크리스마스 선물쯤으로 여기기로 했다.
아시다시피 이번 크리스마스는 무척 추웠다.그런데도 나를 포함하여 가장 기쁜 날 이 기쁨을 말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주변의 못말리는 승마폐인들과 더불어 승마장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승마클럽의 모든 말 친구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당근을 돌리고 우리끼리 케잌도 먹고 나름대로 한껏 기분을 내다가 드디어 클럽의 하이라이트 기승시간이 되었다.
어찌어찌 말에 안장도 매고 준비를 마쳤는데 어디서 탈 것인가가 문제였다.실내마장에 들어가면 찬바람도 피하고 따뜻하련만 그 안에는 이미 여러 승마폐인들이 우글우글 돌아다니고 있었다.그래서 처음엔 야외마장에서 기승을 하면서 칸타와 깐돌이 몸도 풀릴 겸 한바탕 뛰어다녔다.아이들도 좋은 날이라는 것을 아는지 컨디션이 좋았다.하지만 살을 에는 추위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백기를 들고 실내마장의 콩나물시루 대열에 합류하기로 했다.
실내마장의 운동규칙은 대략 이렇다. 가장 외곽의 벽면을 따라 도는 라인은 속보 전용라인이다.대부분 초보자가 방향지시 없이 하염없이 돌게 되는 구역이다. 안쪽의 공간에서는 평보나 구보,승마와 하마가 이루어지므로 전체적인 공간사용에 대한 질서가 있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는 어지간하면 구보를 자제하고 속보 위주의 운동을 하게 되는데 뛰기 좋아하는 칸타도 좁은 곳에 오면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한다는 듯이 조근조근 좌속보를 해주었다.
이날도 칸타는 이미 밖에서 뛸만큼 뛰었으므로 더 뛰겠다는 의욕을 부리지 않아 참 다행이었다.콩나물시루에서 뛰겠다고 앙탈을 부리면 식은 땀이 절로 흐를 만큼 곤란하다.말 제어가 미숙한 초보 승마인이 곤경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칸타나 깐돌 모두 주어진 상황에 잘 적응하고서 열심히 운동을 하는 모습이었다. 깐돌이도 무리없이 진영이를 잘 태우고 나아가고 있어 안심이 되었다.그 후로는 난 칸타와의 기승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그러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말이 자동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분명 내가 뭘 하지 않아도 내가 하는 것처럼 나아가는 그런 상태였다.칸타와 나는 가장 외곽 라인에서 속보를 하다가 앞에 더디게 가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안쪽으로 빠졌다가 다시 공간이 비는 외곽라인을 사용하는 식의 패턴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언제 어디에서 장애물이 나타날 지 모르므로 장애물과 한 마신 정도의 거리를 두기 위해선 끊임없이 내가 지시를 하고 칸타가 이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처음엔 문득 '이거 말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 아니야? 난 뭘 하라구!'이런 생각도 잠깐 들었다.그러나 이런 생각이 무용지물인 것이 칸타는 100% 기수의 의지에 충실하며 기수 자신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말이 죽죽 선을 그으며 나아가는 발걸음은 내가 원하는 바와 완전히 일치했다.난 놀라움에 사로잡혀 한동안 새로운 즐거움에 빠져들었다.이것도 인마일치의 경지일까?
기억력이 너무나 좋은 말은 가끔 운동내용을 외우기도 한다.마장마술 하는 말이 한동안 D클래스 코스를 연습했다고 하자.그러면 어느 순간에 선수가 시키지 않아도 코스를 외워서 B포인트에서 구보 들어간다거나 K에서 평보로 이행해야 하는 과제를 자동으로 실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타와 나에게 주어진 상황은 연속적인 변수가 발생하여 그때마다 대응해야 하는 과제였었다.보통의 말들의 경우 트랙을 따라 돌다가 다시 벗어나고 복귀하는 상황을 만났을 때 기수의 의도를 알더라도 좀 덜 빠져나오고 덜 제자리로 가는 식으로 지름길이나 단축동선을 선호한다.그럼에도 칸타는 내가 시키기 전에 한박자 먼저 스스로 하니 나중엔 뭘 시킬 게 없어져버렸다.
나의 정신을 대신하여 나아가는 칸타와 한몸이 되어 나아가는 동안 점점 내가 칸타의 몸 안으로 녹아드는 게 아닌가 싶었다.정신을 백지로 비우니까 마치 칸타의 몸이 내몸인 것 같아서 칸타와 내 몸 사이에는 어떤 구분이 녹아 없어져버린 것 같았다.그 순간엔 칸타도 엄마와의 합일을 느꼈으려나 모르겠다.숲의 정령과 함께 거니는 켄타우로스가 된다면 이런 기분이리라.
나와 칸타가 올 크리스마스에 멋진 켄타우로스 체험을 한 것은 느닷없이 찾아온 천둥 벼락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햇수로 6년을 함께 동거동락하며 희노애락을 나눈 사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난 칸타 내면의 가장 어두운 면을 알고 칸타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가끔 칸타가 엄마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볼 때 그 눈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누군가가 그렇게 아름다운 눈으로 나란 존재를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어쨌거나 켄타우로스 체험을 하느라 너무 무리했었나 보다.다음 날부터 며칠 삭신이 어찌나 수시고 아픈지 푸느라 애먹었다.이글을 쓰는 즈음에야 겨우 회복이 된 것 같다.모든 신화나 설화에서는 마법의 세계를 엿보는데 톡톡한 댓가를 치루는 것으로 나타난다.인어공주도 다리를 얻는 댓가로 목소리를 잃고 걸을 때마다 고통을 느껴야 했다지.잠시 켄타우로스가 된 값으로 삭신이 두들겨맞은 듯 하니 그만한 값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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