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눈을 뜨고 몽롱한 시간이 좀 지난 후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나면 가슴엔 새로운 희망이 차오른다. 그 힘으로 하루를 살고 또 살고 한다.

 

 실내는 찾아드는 겨울햇빛으로 넘쳐난다. 햇빛이 가득한 실내마장에 가족이 다 모였다.

 

 사진을 바라보니 그 순간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이날 이후로 칸타와,아마르는 동시에 똑같이 오른쪽 앞다리가 아프게 되어 붕대를 감고 쉬게 되었다.

 

 마방에서 안정을 취해야 하는 환자신세가 된 아이들을 보니 건강하게 뛰어다니던 때가 얼마나 행복했는가 간절하게 그립기만 하다.

 

 새해의 첫 이벤트가 수의사 방문진료라니 전혀 원하던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도 올해 좋은 일이 벌어지려고 액땜하는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해보았다.

 

 아이들은 아픈 부위의 고통도 있겠지만 운동도 못하고 견뎌야하는 상황이 괴로울 것이다.

나 역시 아이들이 낫기 전에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마음이 개운하지 못하리라.

지난 십 년 내내 겪어온 일이라 단련이 되었으련만 마음 아픈 질감은 다르지가 않다.

칸타와 아마르가 동시에 같은 다리가 아프고, 내 마음이 아픈 것을 보면 우리는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땐 이런 말을 떠올리곤 한다.  

살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견디는 일'의 의미를 불러와야 한다.

쉽사리 힘듦을 잊고자 다른 즐거움을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견디며 기다려야 한다.

이 상황이 지나가기를.

 

 겨울의 한가운데에 접어드니 한 달 넘게 목욕하지 못한 까닭에 칸타도 꼬질꼬질하다.

꼬질하면 어떠랴. 나비처럼 팔랑팔랑 걸어다닐 수 있다면야.

 

 칸타의 왼쪽 뒷다리는 과거에 코끼리만큼 부어올라 치명적인 위험에 빠진 게 아닐까 우려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하나도 붓지를 않는다. 얼마나 감사한가.  모든 상황은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칸타의 표정이 밝으니 좋다.

 

 아마르는 내가 칸타에게 집중하는 틈새를 노리고 어느새 한눈을 팔고 있다.

 

 그럴 때 다가가 눈짓이나,손짓을 보내면 아마르가 '압박'을 느끼고 '아,내가 조마 도는 중이었지!'하고  흐름에 따른다. 때로는 할머니라고 개무시하기도 한다.

 

 둘을 함께 조마시킬 때 나는 매우 섬세해져야 한다.

 

아이들은 쉽사리 기쁨에 사로잡혀 난데없이 질주하거나 어딘가에서 급정거하는 행동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활발한 걸음걸이를 재촉하면서도 과격한 달음박질을 하지 않도록 자극하지 않아야 하기에 압박의 강도를 조절하며 끊임없는 신호를 날려보내야 한다.

 

이 공간에서 나와 아이들 사이에 무수한 교신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그 흔적을 점으로 표시한다면 은하수와도 같은 별의 강이 흐르리라.

 

 아마르가 나를 개무시했을 때 나도 개무시하고 칸타에게만 집중하면 어느 순간 아마르는 '할머니가 엄마랑만 노네' 하고 소외감을 느끼며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랑 눈이 마주치면 얼시구나 하고 다가온다.

 

 그렇다고 내가 "어유 와쪄요!" 하고 받아주지는 않는다. 도도녀 할머니는 튕긴다. "너무 들이대지 말란 말이다!"

 

 돌아서는 도도녀 할머니를 졸졸 따라가는 아마르.

 

그 둘에게 유쾌한 시선을 보내는 듯한 칸타.

 

 

아이들 앞에는 난로가 있고 승마장에 찾아온 사람들은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불을 쬔다.

그러는 사람들 앞에 다가와 사교를 청하는 말들은 우리 아이들 뿐일 거다.

 

혹 이런 경험 해보셨는지?

 

말이 다가와서 사람에게 말을 건다.

 

말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은 말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

2015년 깐돌할망의 화두이자 말 탐구 주제는 바로 이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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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은 꽤 추웠다고 한다. 그런데도 나는 그닥 춥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추위에 단련된 세월 탓도 있겠고 다른 이유도 있다.

 

 

추위를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 몸을 난로처럼  달구는 거다. 이렇게  터득했달까.

간단히 구호화 한다면 '난로로 빙의하자!'

 

 겨울이 되면서 나의 승마장 일과는 이렇게 바뀌었다. 승마장에 도착하자마자 칸타와 아마르에게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넨 후 다짜고짜 옷을 홀랑 벗겨 던져놓고, 다시 한 번 다짜고짜  실내마장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런 후 잠시 기지개 펼 짬을 준다. 요때 칸타는 부랴부랴 뒹굴기를 하고 아마르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킁킁거리며 돌아다닌다.

 

 

"자 됐지? 이제 시작이다!" 하고는 장채찍을 들고  공중으로 띄우면 기다란 끈이 리듬체조 선수의 리본처럼 허공에서 춤을 춘다. 이것을 신호로 칸타가 앞장서고 아마르가 뒤따르는 식으로 자유조마는 시작된다. 아이들은 서두르지 않고 리드미컬하고 활발한 속보로 마장을 돈다. 나도 안쪽에서 작은 원을 그리며 성큼성큼 걷는다. 그렇게 20분 정도 함께 호흡을 맞추어 걸으며 달린다. 그러는 사이 내 몸은 난로가 되어 후끈후끈 열기가 가득하다. 이 열기는 다시 승마장을 나서기까지 3시간 정도는 유지되는 편이다.

 

 

20분 자유조마 후에도 나는 실내마장을 벗어나지 않고 칸타 ,아마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어슬렁거리며 생각도 하고 가끔 아이들이 똥을 떨구면 치우기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발견한 사실! 아마르가 자꾸 나를 스토킹한다. 문득 뒤가 캥겨서 뒤돌아보면 집채만한 검은 존재가 나를 향해 뚜벅뚜벅 ~ 그러다 장난으로 확 ! 덮칠 것 같은 불길한 느낌. 예전 같으면 저리 가라며 쫒아냈으련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예절을 지키며 사람과의 최소거리는 지킨다. 문득 나 스무 살 무렵엔 길에서 남자가 따라오는 일이 있었지 하고서 옛생각이 떠오른다. 그 남자도 내가  뭔가 좋다고  꽂혀서 따라왔듯이  , 아마르도 내가 좋아서 따라오는 것이니 기분이 나쁠 리가 없다.

 이럴 때 어울리는 영화가 있다.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아마르가 킁킁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어쩌다 내 눈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졸졸 따라온다. 다가와서 킁킁 조사도 하고,앞발을 긁으며 요구도 한다. 만일 내가 긁개나 채찍이라도 들고 있으면 "이리 줘봐!" 하는 것처럼 제 입으로 덥석 물고 내게서 물건을 빼앗는다. 어쩌면 아마르는 그 물건을 다시 달라고 내가 잡아당길 때 줄다리기가 오가는 그 다음 상황을 즐기려고  하는 행동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뭘까. 아무튼 사람을 따라다니는 행동은 올해 내내 이루어진 내츄럴홀스맨십 훈련의 기분좋은 후유증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나를 절친으로 여기는 탓도 있다고 본다.

 

 칸타는 적극적으로 따라다니지는 않아도 시선으로는 아마르보다 더 집요하게 스토킹질을 한다. 오래 함게 지내서인가 요즘에 칸타의 눈빛을 보면 꼭 그 안에 사람이 들었나 싶기도 하다.

 

 칸타는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커피도 홀짝거리니까 사람스러운 눈빛을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으니 칸타가 혼자 제적을 따라 워킹을 시작한다. 칸타의 '나홀로 하염없이 워킹'은 과거 칸타가 환자였을 때 재활운동 했던 후로 오랜 습관이 되었다. 덕분에 말 워킹머신이 없어도 스스로 잘한다.

 

 

 올해 나의 목표 중에 하나는 <말에게 집착하지 않기> 였다. 그러니까 말을 하루라도 안 보면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을 버리자는 거다. 구체적으로는 일주일에 사일만 승마장에 나가고 나머지는 인생의 다른 분야에 몰두하자, 대신 말을 만나러 가서는 최선을 다해 좋은 시간을 갖는다. 라고 행동지침을 정하고 실천했다.

 

 

옛날에는 아마르가 한창 자라고 있어서 늘 들여다보고 보살펴야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시절에는 아마르가 최대한 많은 시간에 무리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방목생활에 비중을 두었다. 지금은 날마다 만나지는 않지만 만나는 시간에는 자유시간조차 함께 걸어다니고 접촉을 하려고 한다.그러자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다.

 

 아마르는 올해  내츄럴홀스맨십과 마장마술 기초공부를 했다.

 몸도 더욱 튼튼해졌다.

 기른 사람에게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기쁨을 주도록 잘 자라주어서 아마르에게 고맙고, 그냥 무한한 감사의 마음도 샘솟는다.

 

 2014년에는 나의 개인적인 다른 활동이 있어 블로그가 개점휴업한 가게처럼 한가했다.

 2015년에는 다시 알차게 채워나갈 생각이다.

한층 깊어지고 말간 시선으로 말과 사람, 그들의 관계에 대하여 풀어나가볼까 한다.

 

 아마르는 공부중!

 

 실내마장에 어떤 무늬가 새겨져 있어 찍어보았다. 여러 마리의 말이 사람을 태우고 돌아다닌 시간의 흔적이 모래바닥에 응집되었다. 삶은 해마다 한 장씩 새로운 무늬가 새겨지는 그림 만들기가 아닐까?

 

 

알팔파와 티모시를 사랑해주신 모든 독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12월,겨울나무의 자태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구름낀 하늘을 배경으로 늘어선 나무의 우듬지도 바라보시구요.

올해 어떤 아름다움을 여러분의 삶속에 수놓으셨는지 떠올려보시지요.

크리스마스도 잘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2015년에 새로운 모습으로 좋은 인연 이어가지요.

 

 

 

<마필관리사가 찍어서 보내준 사진임>

 

칸타는 멋진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초록이 지천인 풀밭이라도 거니는 중일까요.

내게는 사진이 이런 의미로 읽힙니다.

 

"엄마,나는 잘 지내요. 우리 걱정 말고 엄마의 멋진 꿈을 꾸세요."

 

칸타가 간절하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기 때문에 요 사진이 나에게 전달된 것 아닐까요?

꿈보다 해몽이라구요?

그래도 매사에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손해볼 게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말 대표로 칸타가 전하는 메시지를 2014년 <알티>의 공식메시지로  삼겠습니다.

 

자신만의 꿈을 꾸세요!

꿈을 믿고 나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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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난다.

 

 

 

 

가을에는 새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풀은 몸에 흐르던 수분을 점차 덜어가면서 몸피를 줄여나간다.

 

 

 

 

몸피를 줄이지 않고 부풀리는 것은  멀리 날아오르려는 꿈을 간직한 씨앗 뿐이다.

 

 

 

 

 

몸피를 줄인 식물에게서 추상화를 본다.

 

 

 

 

사물에서 보이는 부분을 덜어가다 보면 본질만 남게 되고, 마지막으로 남은 형상에서 더 뚜렷하게 솟아오르는 뭔가를 발견한다.

 

 

 

 

그래서 가을이 좋은 모양이다. 사물이 메말라가는 자취를 바라볼 때 마음이 헛헛하지만 그 사물의 본디 모습을 더 가까이 들여다본다는 느낌도 있다.

 

 

 

 

올해 가을빛은 들판에 아름다운 색채를 풀어놓았다. 올 가을은 유난히 그렇게 보인다.

 

 

 

 

가을은 색을 덜어나가는 계절이라 생각해왔고 사실 덜어간다는 것은 맞다. 더 들여다보니 덜어낸 자리에 더 아름다운 빛깔이 깃들었다.

 

 

 

 

그 빛깔은 보통 '내츄럴한 색이야!'라고 흔히들 부르는 베이지,브라운,바이올렛,오렌지,블루,크림 등의 색이다. 이 색깔조차 세심하게 보면 뭐라 형언하기 힘든 오묘하고도 알 수 없는 빛깔을 띄고 있다.

 

 

 

 

위대한 작가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라는 작품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새들이 왜 먼 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 주지 못했다.

 

 

 

 

로맹가리는 세상이나 삶이란 안다고 할 수 있는 영역보다 알 수 없는 영역이 더 많을진대 다 안다고,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의 자기기만을 비판하고 성찰로 이끌어간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통하여 '인간이라는 종의 정체성' 까지 나아갔다. 인간은 무엇인가?

 

 

 

 

들판이 가을로 물들어 가는 동안 말 아마르는 자주  할아버지와 함께 풀을 뜯으러 산책을 나갔다.

 

 

 

 

아마르가 풀을 뜯을 때 하늘에서는 새들이 분주하게 날아다녔다. 때로는 시끄러운 소리까지 내면서 말이다.

 

 

 

 

새들이 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지 알 수는 없다. 아마르도 풀밭에 나와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 할아버지는 아마르가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나에게 말하기로는 정확하게 "아마르가 한 곡조 뽑았어. 그리곤 한 곡조 더 뽑았어. 두 곡조를 뽑더니 더는 안 뽑더라구."

 

 

 

 

그게 무슨 소린지 안다. 나도 그 수상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끄으으으' 하고 들리는 목이나 코 어딘가에서 공기 빠지는 소리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전통민속음악에 구음시나위라는 게 있다. 재즈처럼 다채롭게 이어져나가는 노래같지만  언어 이전의 원초적 발성이라 의미는 깃들어있지 않고 가슴으로 그 느낌을 전달받아야 한다. 그 어떤 성악보다도 가슴을 훑어내리는 느낌을.

아마르의 노래가 그랬다.

 

 

 

 

정황으로 보아 아마르는 마방에 하루 종일 갇혀 있다가 밖에 나와 콧바람을 쏘이니 기분이 좋았다. 여기에 맛난 풀까지 진수성찬처럼 주변에 잔뜩 있으니 더할나위 없이 기분이 좋아서 곡조를 뽑았다 라고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말 어떤 이유에서 아마르가 곡조를 뽑았는 지는 알 수 없다.

 

 

 

가을 초입에 북촌 근처에서 열린 세계작가축제에 다녀온 일이 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작가들이 나와 낭송,토크를 하는 행사였다. 그 자리에 온 청중은 통역기를 하나씩 받았다. 통역기를 귀에 걸고 볼륨을 적당히 맞추면 뒤에 있는 통역부스에서 통역가가 앞에서 말하는 외국작가의 말을 통역한 내용이 들렸다. 듣기가 참으로 불편하고 어색했다. 외국작가는 자신의 모국어 뿐 아니라 표정과 몸짓으로도 의사표현을 했다. 언어도 어조에 다채로운 뉘앙스를 담아 표현했다. 하지만 통역기에서는 건조하고 기계적인 내용만 국어책 읽듯 읊어대니 내 귀에서는 뭔가 호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답답한 나는 문학에서 말하는  '행간과 여백을 읽으라' 는 구절을 떠올리며 온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르가 왜 노래를 불렀는지 진심으로 알 수가 없다.

 

 

 

 

지난 세월 말과 함께 지내는 동안 '종으로서의 말'에 대하여 이해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여름에 땅에서 자란 초목에 물이 오르는 것처럼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가을의 그림자를 밟고서 내 안에 저장된 '앎의 수분'도 비워내려고 한다.

 

 

 

 

삶은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잡았는가 싶었는데 저만치 달아나 있는 무지개 같아 보인다.

 

 

 

 

내가 말에 대하여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앎의 틀 안에 말을 가두어버릴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오만하고 우월해지고야 말 것이다. 그렇게 되어버린 나를 말이 슬픈 눈빛으로 바라볼까봐 두렵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머릿속이 지어낸 말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닌 말이다.

 

 

 

 

앞으로도 나는 말에 대하여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다. 또한 알면 알수록 점점 모르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말보다 우월하지 않다.

 

 

 

  

                                   아마르는 헝크러진 실타래 같은 덤불더미를 찾아가 들추고 헤집어

                                   긴 풀줄기 끄댕겨올려 씹어대는 것을 좋아한다.

                                   반대로 칸타는 덤불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땅바닥에 달라붙은 키작은 풀만 골라먹는다.

 

 

 

 

                                   아마르와 칸타가 입에서 위장으로 풀을 뜯어 날라 가득 채우는 시간에,

                                   나는 머릿속에 가득 채웠던 것들을 덜어낸다.

 

 

 

 

                                   이 가을에

 

 

 

 

                                    아마르는 진정,

 

 

 

 

                                  무엇을 보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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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알리는 전령 코스모스가 승마장 안에도 활짝 피어났다.  지금부터 석 달 정도는 승마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최고의 나날이다.

 

 

 

                

 

 

                                                                          나와 칸타빌레

 

 

 

                                         

                                                                    행복한 그녀와 축복이

 

 

 

                                            

   

                                 아마르는 이모할머니에게 멋진 재킹과 모자(?)를 선물받았다

                

 

                                                               

 

 

 

                                  

                                                     

   초가을의 정취 속에서 말과 더불어 즐기는 유동화 원장님과 미그웨치 아카데미 여러분

 

 

               

 

 

 일요일 오후 4시쯤 마장에 도착했다. 아직 한낮의 열기가 뜨거워서 그 시간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 거다. 마장을 향해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 며칠 전에 새로 산 CD <비긴 어게인> 음악을 들었다. 신나는 리듬이 내 안의 새로운 에너지를 일깨우는 동안 잠시 후에 만날 칸타를 떠올렸다. 칸타가 나를 보고 기뻐하며 어떤 기대에 찬 표정을 지으리라 생각하니 즐거움이 솟아올랐다. 그렇다. 내 승마의 즐거움은 말을 만나러 가는 동안에 이미 생겨나서 팽창되고 탄력이 느껴지는 기분 상태가 된다.

 

 

 

 

 

요즘 내가 승마에 대하여 가지는 가장 커다란 생각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순수한 기쁨' 이라 말하겠다. 곰곰 옛일을 떠올려보아도 내가 애초에 승마를 시작한 까닭이 말에게서 기쁨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때묻지 않았던 기쁨은 대략 3년이 지날 무렵엔 매우 작아져 있었고 , 나머지는 승마로 인해 겪어야 하는 일에서 생겨난 온갖 문제에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는 출간한 에세이집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에세이집을 세상에 선보이고 난 후 나에게 그때 그 시절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마음의 창이 생겨났다. 말과 관련된 구조적인 문제들이야 예나 지금이나 큰 틀에서는 별반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현재도 말과 관련하여 얼마든지 스트레스 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는 점에선 변함이 없다.

 

 말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대면했을 때 매력을 느끼게 하고 기쁨을 주는 존재이다. 그러나 말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만나고 있는지 조금만 돌아보면 그 기쁨에서 도자기의 미세한 금과도 같은 균열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만나는 말은 '가두어진 말'이다. 말이 살아가는 공간은 마방과 마장 전체 팬스 안이 거의 전부이다. 말이 마방 밖을 돌아다니는 자유라도 얻으려면 대부분 등에 안장을 얹고 사람을 태운 후라야 가능하다. 또한 우리 승마계가 일반적으로 채택한 라이딩 방식은 영국식으로, 기본적으로 굴레 안에 말을 가둔 상태에서 가두어진 에너지를 활용하여 말의 신체적 표현을 도모하는 활동이다.

 

 

 

 

 

    그러한 모습의 말을 바라볼 때 우리들 역시 사회적으로 관습적으로 '가두어진' 존재이기에, 자신이 갖고 있는 부자유스러움으로 인하여 말이 갖고 있는 그것을 알아볼 수밖에 없다. 말은 가두어짐으로써 억압된 자유로움을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행동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그럴 때 자유롭고도 기쁘고자 하는 사람의 의도에 제동을 걸게 되고 ,사람과 말 사이에 어떤 어긋남과 거리감이 자리잡는다.

 

 그렇다고 하여 말이 "나는 갇혀 살기 때문에 불행해요." 라고만 말하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직장에 매여서, 좁은 집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오롯이 그것 때문에 불행할 수는 없듯이 말이다. 칸타와 아마르를 하루 정도 마방에 두었다가 밖에 나가자 하면 무척 좋아한다. 밖에 막 방목되었을 때 깡충 뛰어오르거나 머리를 흔드는 식으로 기쁨의 표현을 한다. 그렇게 기분 좋아라 놀다가도 칸타는 1시간, 아마르는 3시간 정도 지났을 때 마방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또 기승운동이 끝나고 마무리를 하고서 마방에 들여보내면 편안해한다. 이럴 때 나는 어디 좋은 여행지 갔다가도 집에 돌아왔을 때 안도감과 행복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칸타와 아마르가 적당히 놀다가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 하루 종일 밖에서 놀고 싶어한다면 그렇게 해줄 수 없는 나는 엄청난 고민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방에서 살아가는 말에게도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 마방의 말에게 가장 큰 문제라면 '심심함'일 것이다. 현대인의 가장 큰 고민도 그것이다. 내가 겪은 바로는 말들이 이럴 때 아주 좋아라 한다. 사람도 그렇겠지만 일단 마방 앞으로 사람들이 많이 왔다갔다 해서 볼거리가 많아야 한다. 하다못해 말 그루밍해주는 모습 구경하는 것도 아주 좋아한다. 외부에서 처음 들어온 말은 내가 칸타나 아마르에게 다정하게 그루밍하는 모습을 보고  "세상에는 저런 모습도 다 있구나."하고 놀라워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럴 땐 새로 온 말이 그간 살아왔을 모습이 가늠되어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슬픔은 말과 지내는 동안 늘 따라다니는 그림자와도 같은 감정이다.

 

 말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으면 듣기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종종 마방 앞에 플라스틱 의자를 갖다두고 지인과 앉아 때로는 차까지 마셔가며 대화를 나누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 뒤통수가 간지럽다 싶어 돌아보면 어김없이 말들이 쳐다보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방의 모든 말들이 일제히 귀를 쫑긋 하고서 대화를  재미나게 경청하기 일쑤다. 상상력이(?) 풍부한 어떤 말은 아예 넋나간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런 표정을 보면 내 화술이 그렇게 뛰어난가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다. 가끔 색다른 간식을 떡 돌리듯이 조금씩 나누어주면 희열에 차서 마방 전체가 난리가 난다. 이밖에도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말들이 일상에서 누리는 소소한 기쁨은 참으로 많다. 이조차 누리지 못하고 사는 승용마도 많겠지만 중요한 것은 말을 행복하게 해주는 방법이 결코 거창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말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승마를 하면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기쁨도 참으로 많다. 며칠 전에 칸타에게 치장(?)을 해주고 실내마장에 들어갔다. 그때 마침 갤러리석의 여자분 하나가 "어유, 아마르 굉장해요." 하며 감탄을 하고 난리가 났다. 순간 나는 아마르가 무슨 마장마술 동작이라도 신통하게 구사해서 감탄을 자아낸 건가 하고 쉽게 오해했다. 하지만 1분도 지나지 않아 알게 된 진실은 아마르가 운동하다 똥을 쌌는데 엄청나게  많이 싸서 감탄을 자아낸 거였다. 곧이어 실내마장 안에 서 계시던 회원이 통을 들고가 똥을 치우고는 "통이 꽉 찼어요." 라는 멘트를 날려서 주변은 삽시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만일 그 순간에 거기 있었던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갇혀 소소한 웃음거리에 반응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런 분위기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마음의 상태가 중요하다.

 

 

 

 

 영어에서 문어와 낙지는 모두 octopus라고 한다. 그래서 영어권 사람들은 문어와 낙지맛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의식적인 개념이 구분되어 있지 않으니 미각이라는 감성마저도 영향을 받은 탓이다. 승마라는 행위에서도 그 행위의 개념을 무엇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가 느끼며 얻을 수 있는 것이 달라진다고 본다. 내가 승마를 시작한 이래 참 이상하다고 생각한 일이 있다. 승마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일수록 웃는 모습이 적다는 거였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말을 대하거나 타면서 매우 심각한 사람이 승마선수나 코치,교관인 경우가 많고 마장운영자도 심각함에서 뒤지지 않았다. 내가 볼 때 억 소리나는 말을 몇 필이나, 하루 종일, 그것도 매일 탄다면 입이 귀에 걸려 다물어지지 않아야 할 텐데 오히려 반대였다. 또 대회에 참가하거나 자격증을 얻기 위해 말을 타는 경우에도 그랬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중고등학생 시절을 엘리트 승마선수로 경력을 쌓아왔던 청소년들이 대학에 가서 말을 타지 않을 때다. 열거한 경우에서 공통점을 모아본다면 '목적지향적'이나 '성과'를 추구하는 개념을 갖고서 승마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승마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명백한 목적과 성과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과 함께 '즐긴다'라는 개념이 양쪽 날개를 이루어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거다. 더 나은 성취를 위해서도 '즐긴다'는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오히려 그 어떤 '목적'이나 '성과'도 염두에 두지 않은 체험승마인이나 어쩌다 짜투리시간을 내어 말 등에 오른 이들에게서 참을 수 없이 벙글어지는 순수한 웃음을 발견하기가 쉽다. 또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다. 클럽말 탈 때는 열심히 타다가 막상 자마가 생기니 말을 잘 안 타더라,하는 소리다. 물론 타는 횟수나 기승시간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얼마나 재미있게 즐겼느냐?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나 자신을 돌아보니 반성할 점이 많다. 누가 보면 부부가 함께 타는 말이 두 필씩이나 있으니 원없이 말을 타겠구나 부러워할 처지다. 그런데도 나 자신은 말 관리나 관계자들과의 관계 등 이런저런 문제를 시시콜콜 고민하면서 말을 타는 순수한 기쁨을 스스로 훼손해오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요즘 들어서 나는 자신에게 늘 주문을 걸고 있다. "나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 말을 타는 거야." 주문 탓인지 온갖 잡스런 생각에 골몰하지 않고 칸타나 아마르가 주는 기쁨을 고스란히 전달받고 있다. 삶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지리멸렬함 투성이지만 그 안에 섞여있는 보석같은 기쁨을 주워서 놓치지 않겠다고 마음 먹으면 분명 기쁨의 총량은 늘어나게 마련이다.

 

 어제 오후 나는 칸타 등에 올라앉아 있었다. 말 등에서 주변 풍경을 내려다보니(?) 코스모스는 한들한들, 배추의 푸른잎은 흐드러지고 ,논은 노랗게 물들었고, 하늘은 파란 가운데 떠가는 구름 모양이 아기자기 다채로웠다. 순간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나니, 내가 이 순간 무탈하고 건강하여 칸타 등에 앉아 가을의 한가운데를 걸어다니는구나 싶어서,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가을을 좋아하므로 가을 내내 나는, 말과 더불어 즐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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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월에, 졸음에 겨운 아마르)

 

 지난 7월 31일에 아마르는 6세 생일을 맞았다. 엄마 뱃속에서 세상빛 아래로 나온지 만 6년이 되었다. 5세까지는 지인과 함께 생일축하를 했었지만 올해는 하지 않았다.작년까지는 한 해 한 해 생일을 맞을 때마다 ,'또 무사히 생일을 맞았구나' 하는 심정과, '아직도 말은 커가는 중'이라는 보호자의 심리적 태도에서 놓여나지 못했었다. 그러나 올해 생일에는 '이제 다 컸구나' 하는 안도감과 '어디 내놔도 말구실은 하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 마방의 여느 말들이 생일축하를 받지 않는 것처럼 그냥 생일을 지나치기로 해서 그렇게 됐다.

 

 김애란 작가가 <두근두근 내 인생>이란 책에서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쓴 구절이 있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그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누구도 본인의 어린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니까, 특히 서너살 이전의 경험은 온전히 복원될 수 없는 거니까,자식을 통해 그걸 보는 거다. 그 시간을 다시 겪는 거다. 아,내가 젖을 물었구나. 아,나는 이맘때 목을 가눴구나. 아,내가 저런 눈으로 엄마를 봤구나,하고.자기가 보지 못한 자기를 다시 보는 것.부모가 됨으로써 한번 더 자식이 되는 것.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윗 구절을 읽고서 백 배 공감할 수 있었는데, 아이를 낳아 길러본 부모 입장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아마르는 내 배를 아파가며  낳은 생물학적 자식은  아니다. 아마르의 생물학적 엄마는 칸타이지만 칸타가 제 새끼에게 석 달 젖을 먹인 것 외에는 양육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건 없어서 그 책임은 고스란히 나와 남편에게 떠안겨졌다.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화자의 부모는 십대여서 아이를 낳은 후 자신들이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깨달았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 아이를 안는 법부터 해서 -  그 부분도 읽으며 웃음이 나왔다. 우리 부부 역시 난데없이 출연한 망아지에게 뭘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 아는 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부모가 되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서너살 이전의 삶을 ' 아이 기르기 '를 통해  다시 살 수 있는 까닭은 사랑의 힘이다.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의 마음은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아이가 매개가 되어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전의 삶과는 결코 다른  감각들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타인이 되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연인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 순간 이 상황을 어떻게 느낄까에 자꾸 빠져드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상태 아니겠는가.

 

 망아지는 시시각각 자라면서 나에게 새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망아지가 자신을 둘러싼 별별 시시콜콜한 사물이나 상황에 대하여 호기심을 발휘하여 살피고 놀라워 달음질칠 때 ,순수한 감각이 닫히지 않고 활짝 열려있는 상태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 내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망아지가 환희에 솟구쳐오르고,슬플 때 눈물을 떨구고,공포에 사로잡히고,화를 내는 다채로운 감정의 변주를 드러낼 때 ,순수한 감정이 억압받지 않고 물 흐르듯 흐르는 상태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 망아지를 스승삼아 바라보았을 때 ,망아지는 나로 하여금 사십여년 세상 살아오는 동안 닫히고,막혀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했다. 그 결과 자연스러운 본성을 회복해나간 시간이 아마르를 키워낸 시간이 아닐까 한다.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자꾸 '아마르 키워낸 일'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 ,잃어버린 나를 서서히 되찾아가는 과정이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자연과 분리된 사람이 ,자연과 연결되는 조짐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함이 아닌 것 같다. 승마를 하는 한 여성이 들려준 말이다. 평소에도 무척 깔끔한 그녀가 여름휴가지에서 변한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식사를 하는데 파리가 음식주변에 날아다녔다. 파리를 본 아이가 기겁을 하며 "으악,파리다!" 하고 난리를 쳤다. 그녀는 "뭘 그래? 그냥 휘휘 쫒으면 되지." 하며 대충 손으로 휘저으며 아이에게 식사를 하라고 했단다. 옛날 같으면 엄두도 못낼 일이라고 했다. 파리는 자연스러운 생태계의 일부라기보다는 존재하지 말아야할 공공의 적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파리도,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도, 마분도 자연스러운 존재로 느끼고 있으며 승마를 마치고 한 줄기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씻는 달콤함을 즐기게 되었다. 말의 시선을 따라다니면 풀줄기의 아름다움과 꽃향기, 새소리의 고혹스러움에 매료되는 감각의 풍요로움 뒤에 충만한 감정도 느끼게 된다.

 

 8월에 비가 제법 많이 내렸다. 흐린 날이 대부분이다. 요사이 한강을 따라 차를 타고 지나가다보면 시야가 확 트여서 흐린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먼데까지 볼 수가 있다. 세상이 마치 회화로 변한 것처럼 보인다. 예민한 감각으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볼 때 내 안에 말이 들어앉아서 ,말의 눈으로,오감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구나 싶어진다. 그럴 때 도시를 누비며 걸어다니는 나는 그 세상이 삭막하고 황폐할지라도 얼마든지 헤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힘을 내면에서 느낀다.

 

 엊그제 아마르 등짝에 앉아봤다.(평소엔 거의 남편 차지임) 평수가 너르고 안정감이 느껴졌다. 탄성좋은 스프링 침대에 걸터앉은 느낌과 비슷하달까. 든든한 것이, 말 등짝이 내 엉덩이에게 말 걸어왔다.' 언제든 여기 앉아서 세상 살 힘을 충전해가세요! ' 참으로 듬직했다. 이제 내 나이는 부모가 등을 토닥여줄 나이가 아니다. 외로울 때가 많다. 이때 앉아 쉴 편한 말 등짝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떠올려보았다. 아마르도 망아지 시절에 보채며 뭘 요구할 때에 기꺼이 들어주고 안아주던 나에게 든든함을 느낀 적이 있었겠지.

 

 6세 아마르 카테고리를 열었다. 앞으로 이 카테고리에 어떤 인생의 그림들이 담길지 그 훈훈한 광경을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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