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

 

 

 

 

 

  아마르가 깐돌이로 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난처하고도 신비롭게 서있던 그 새벽으로부터 5년. 깐돌이는 비로소 말horse이 되었고 나는 홀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오랜 도시생활로 야생성을 잃어버린지 오래인 중년의 남자가 20여년만에 홀로 여행을 떠나야하는 상황앞에서는 잠시 안절부절해도 좋으리라. 쉽사리 홀로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겁많은 말처럼... 말에게나 사람에게나 야생의 정신이 필요할 때다.

 

 

 

말이 맺어준 인연의 땅 '몽골' 그리고 '소멸의 아름다움' (필립 시먼스 / 나무심는 사람)

 

 

필립 시먼스 ( 1958 ~ 2003 )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며 평론과 단편소설을 쓰던 미국의 영문학 교수. 서른다섯의 나이에 '루게릭병'에 걸려 날마다 조금씩 죽어가야했던 저자는 죽음을 앞둔 불완전하고 결함있는 삶이 오히려 어떻게 충만한 삶이 될수 있는지를 깊은 성찰과 지혜속에서 온몸으로 보여준다.

 

 

 

비어있음으로해서 가득한, 완전하면서도 결핍으로 충만한 몽골이야말로 '소멸의 아름다움'을 읽어내기에 적합한 땅이다.

 

 

 

 해질녘 몽골의 초원을 바라보며, 탁탁 영혼을 깨치며 타들어가는 마른 장작불 소리를 들으며 그리고 동이 터오는 새벽녘. 게르의 이슬맺힌 풀밭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여기 아름다운 몽골에서 '합리적 신비주의자'가 전하는 삶에 대한 성찰을 소개해본다.  

 

 

( 아래부터는 '소멸의 아름다움'에서 인용된 글임)

 

 

 

삶은 어차피 죽음을 앞둔 상태다.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우리는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한다는 점에서 축복받은 존재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연의 섭리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도 우리와 무관한 이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유를 깊이 의식하면서 사는 것이다.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 명성,물질적 소유,우리의 육신- 들에 대한 집착으로부터의 자유...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자유...끝으로 우리의 고귀한 본성에 따라 행동할 자유.

 

 

 

 

 

아침에 침대에서 나올 수 있는 날은 하루하루가 나에게는 축복이다. 우리가 팔다리를 움직여 세상 일을 할 수 있는 날은 그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축복이다. 팔다리가 위축되고 말을 못하게 되어도, 여전히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다. 이 심장이 뛰는 한 나는 축복받은 존재다.

 

 

 

 

 

 

우리는 영원히 집을 완성할 수 없고 , 절대로 충분히 행복할 수 없으며, 집은 언젠가 우리를 완전히 떠나버릴 것이다

 

 

 

 

 

사람은 정착하기를 원하지만, 정착하지 않은 동안에만 희망이 있다(에머슨)...진정으로 살아있기위해 영원히 정착하지 말자

 

 

 

 

 

 

모든 종교적 감정은 우리의 진정한 집이 '다른 곳'에 있다는 깨달음으로 시작된다

 

 

 

 

 

 

그 '다른 곳'을 영적인 완전함으로 정의하든...자연계와의 조화로운 관계로 정의하든, 우리의 영혼과 신의 합일로 정의하든...우리는 되도록 멀리가기를 바란다. 이 삶의 고통에서, 미완성된 집에서, 미완성된 우리의 자아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삶속에 남아있는 한, 인간으로 남아있는 한, 우리가 갈망하는 그 '다른 곳'에는 결코 이르지 못한다

 

 

 

 

 

 

더 나은 삶에 대한 환상에 열중하면, 과거의 상처에 대한 기억에 얽매이고 다가오는 불행에 대한 두려움에 쫓기면, 우리가 갖고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을 잃게 된다

 

 

 

 

 

 

그것은 바로 현재의 순간이다...현재의 순간은 우리가 살고있는 미완성된 집이다

 

 

 

 

 

 

하루하루는 미완성이고 불완전하지만, 나는 손상되고 쇠약해지고 있는 이 몸뚱이속에서, 이 호흡속에서, 더듬거리는 이 말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려고 날마다 애쓴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여기, 현재라는 미완성된 집에 머물러있다. 기쁨은 집짓기 자체에 있다.

 

 

 

 

 

 

 

 

 

 

 

*** 돌이할방의 몽골사진과 '소멸의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이 글은 몇차례에 걸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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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방 복도에 아이들을 세워놓고 안장을 맬 때 밖의 빈 논을 바라보는 말의 눈빛에서 어떤 욕망이 얼핏 느껴진다.

 

저 논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볏줄기 삭삭 뜯어먹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자주 논에 가서 풀뜯기 시중을 들다보니 - 개 산책 시키듯 로프에 매어 잡고 있는 - 칸타나 아마르나 그 장소를 벗어날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거 잘된 일이지 하고서 마사로 돌아가는 입구에 쇠사슬 줄을 치니 논은 훌륭한 가두리 방목장이 됐다.

 

마방굴레에서 로프연결 고리를 떼는 손가락에 전기에 감전된 듯 희열이 번졌다.

 

"이제 자유야! 너 가고싶은 데로 가라!" 호기롭게 외치며 홀가분함을 만끽했다.이것들이 놀랄까, 튈까 얼마나 노심초사 했었나.

 

칸타와 아마르도 내심으로 말 나름의 홀가분함이 채워졌을 것 같다.

 

논에서 갑자기 찾아온 자유로움에 무엇을 할까 잠시 망설였다.뭘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이 순간을 맘껏 즐기기로 했다.

 

그러려면 편히 쉬어야 하니까 의자가 있어야겠고 그냥 앉아있으면 심심하고 말만 뭘 먹어서야 불공평하지 나도 뭘 먹어야겠다 머리회전은 빨랐다.

 

얼른 뛰어가서 찻물을 끓여 커피 두 잔을 타고 - 한 잔은 블로그 전속 사진작가(?) 할방님 몫이다-점퍼 호주머니에 비스킷을 구겨넣고 남은 주머니에 쥬스도 한팩 넣고 의자를 들고 논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할방을 불러 커피를 건네니 아이들이 뭐야뭐야? 나도나도! 하면서 일제히 몰려온다.커피 쏟아질가봐 손사레를 치며 쫒아내야 했다."니들은 니들 거나 먹어! "

 

말은 입과 다리만 있으면 풀밭에서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만족스럽다.반면에 나는 의자며 먹거리를 어디서 가져다 의존하는 처지다.비스킷을 우물거리며 생각하니 내가 말보다 매인 게 많다는 생각이 든다.

 

빈 논에 머무를 때 자신이 말보다 한참 떨어지는 야생성에 열등감을 느끼며 가을의 한기 때문인지 약간 주눅든 자세인 웅크린 모양새로 내 생활을 돌아보았다.

 

아마르 만나러 오기 전에 머리가 왜 그리 복잡했나 생각했더니 신경을 많이 쓴 탓이다.월말이 되니 메일함에는 각종 청구서 목록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카드며 통신요금,공과금 등등 항목도 수십 가지다.

 

한 달 내내 날아드는 각종 청구서를 보면 사람은 평생 날아오는 청구서에 파묻혀 지불하면서 한 생을 마감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다.

 

날아오는 건 청구서 뿐이 아니다.무엇을 소비하라 유혹하는 마케팅이 얼마나 많은지 메일과 스마트폰의 주인이 광고야 뭐야 하는 심정이 되기 일쑤다.

 

 

세상은 나를 청구서 발송처와 마케팅 타겟으로만 규정하는 것 같다.그런 게 싫어 휴대전화를 꺼둘 때도 많고 잘 받지도 않아 지인을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출판사와 계속 업무연락을 해야해서 전화기를 체크하는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나의 뇌파가 올라가고 뜨거워졌나 보다.

 

그 어떤 디지탈 기기도 없이 빈 논에 빈 몸으로 앉아 아이들 풀 뜯는 모습을 바라보고 서걱서걱 씹는 소리를 들으니 점차 머리가 맑아지고 가벼워졌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이보다 더 가벼울 수는 없다 싶을 정도로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사진 제목을 붙이면 <쓰레기통을 뒤지는 말>이 되겠다.그럴 리야 없지만 꼭 아마르가 그러는 것 같아 코믹한 장면이 되었다.

 

주변은 온통 평화로운 기운만이 감싸고 있다.

 

논은 충분히 넓었지만 아이들은 멀리까지는 가지 않았다.겁쟁이 칸타가 더 멀리 갔지만 딱 논의 절반까지였다.아마르는 내 주변에서 맴돌았는데 가끔 한번씩 괜히 다가와 닿을 듯 스치고 지나가며 눈빛을 맞추었다.

 

마치 나 지금 너무 좋아요 할머니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많이 먹어요 아마르~ 하고 화답한다.

 

지극히 평화로운 상태에 든 말을 좀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매우 몰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아니나 다를까 최고의 집중력을 모으고 있었다.

 

아이들은 엄청나게 빠른 입놀림으로 볏줄기를 쓱쓱싹싹 입안으로 거둬들이고 있었다.

 

이러는 상황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주어진 시간 속에서 최대한 풀을 뜯어먹겠다는 목표가 분명한 행위다.

 

우리 아이들의 먹는 속도는 빠르다.특히 아마르가 더하다.점심시간 말미에 마방에 가면 다른 말들이 식사중인데 아마르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안 먹은 것처럼 우두커니 서있을 때가 많다.관리인에게 물어보면 "아마르가요 딴 말보다 두 배는 빨리 먹어요."하고 대답해서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여느 말보다 2배속으로 먹는 아마르가 풀밭에 나오면 4배속 정도로 입놀림을 하는 것 같다.

 

말이 풀뜯어먹는 모습 구경하는 일은 얼마나 재미난지 나의 혼을 빼놓는 정도는 잘 만든 흥미진진한 영화를 볼 때와 비슷하다.

 

말이 아니라면 빈 논에 나와 앉아있을 일은 없다.

 

말과 함께 있기에 도시인이 잠시 자연의 시간으로 귀환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론 논에다 파라솔도 하나 꽂고 안락의자도 있으면 좋겠어 하고 떠올리는 나는 어쩔 수 없는 문명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할지라도 내 안에 꿈틀거리는 야생성을 회복할 수 있는 통로 하나쯤은 막히지 않게 열어두고 싶다.

 

그 통로는 말에게로 연결되어 있다.

 

 

* 할망 시시콜콜 요즘

 

뱀파이어 영화를 보다가 사람에서 뱀파이어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뱀파이어의 힘이 어마어마하고 통제가 잘 안된다는 대목에서 "순치가 덜 됐어!" 하고 승마관련 용어가 절로 튀어나오네요.혹시 다들 그런 경험이 없으신지.  별거 아닌 일상사를 승마와 관련짓는 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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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햇살의 눈부심을 가까스로 참으며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목을 젖혀 하늘을 보니 철새의 비행을 구경하게 된다.가끔은 하늘을 가득 덮을 정도로 무수한 철새떼가 천둥 못지않은 소리를 울리며 지나가기도 한다.그럴 때는 철새 종족에 대하여 장엄함과 외경심이 느껴져 와아 하고 소리없는 탄성을 뱉는다.

 

무수한 새떼가 날아다닐 적에는 거대한 한 마리 흑조처럼 보인다.흑조를 보는 일보다는 열 마리 내외로 소규모 편대를 이루어 날아가는 철새 보는 일이 많다.보통 화살표 모양을 하고서 원톱시스템으로 비행한다.날아가는 철새가 하늘을 가득 메우다가 조각으로 떨어져 날아가는 변주를 바라보면 전체와 부분은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너와 나의 구분도 일체감으로 녹아버린다는 생각에 이르른다.

 

우리 아이들이 논두렁에서 풀을 뜯고 있을 때 이러는 풍경이 김포평야에서 흔히 보는 일이 아닌지라 철새도 날아가다가 시선을 내리꽂고 신기해하지 않을까?

 

승마장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 농로에서 수확을 하느라 지나다니는 농기계들과 맞닥뜨리는 일이 많아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농로에서는 농기계 우선인지라 승용차는 쭈삣쭈삣 말도 못하고 좁고 구불구불한 농로를 뒷걸음쳐야 한다.도심지에서 교통을 방해하는 차량이 있을 때 크락션을 울리고 머리를 내밀고 항의하는 일일랑 이곳에서는 먼 나라 얘기다.농로를 지나가다가 농사일 하는 동네어르신의 표정은 당당하기만 하다.급하면 알아서 지나가셔~ 난 신경쓸 일 아니고~ 표정이 얼굴에 역력할 뿐이다.요즘엔 동네에 들어서면 자라목을 하고 먼 곳의 동태를 살피는 일이 습관이 됐다.

 

운동 끝나고 풀뜯으러 나왔다.칸타는 내가 붙들고 아마르는 할방님이 붙잡았다.아마르는 호기심이 많아 계속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서 그렇게 각각 맡았다.

 

요즘엔 논에서 노는 일이 많다.농부들이 볼일을 보고 떠난 빈논이 승마인 차지가 됐다.네모 반듯반듯하고 판판하고 푹신푹신하기까지 하다.모래먼지 걱정도 없다.논에서 운동을 하니 특히 좌속보하기가 좋았다.마치 라텍스 매트리스를 밟고다니는 느낌이었다.

 

마장에서는 말의 보폭이 커지면 좌속보하기가 여간 힘든게 아닌데 논에서는 하나도 배기거나 튕기지 않고 출렁출렁하여 다른 말을 탄 건가 싶었다.바닥의 재질이 승마운동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건가 새삼 생각해 보았다.

 

뿐만 아니라 논은 야외이고 평소 생활하던 익숙한 공간이 아니라서 말에게 낯선 새로움을 느끼게 하니 말 발걸음에 긴장된 탄력이 부여됐다.다른 사람이 탄 말을 보니 평소보다 다리가 번쩍번쩍 들렸다.

 

게다가 벼 베어낸 밑동에서 새로운 벼 줄기가 올라오고 있어 논 전체가 파릇했다.아 꿈에도 그리던 잔디마장에서 운동하는구나 온전한 착각에 빠져 신나는 기분도 즐길 수 있었다.

 

운동이 끝나고 다시 논으로 나가 풀뜯기를 시키는 것은 말에게 주는 보상이면서 풀뜯는 동안 주변 환경에 더 적응하도록 해서 다음 번 이곳에서 운동했을 때 더 순조롭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다.

 

사진을 찍은 날이 칸타,아마르가 함께 풀뜯으러 나왔던 올가을 첫 날이었던 모양이다.

 

아마르는 세상사를 모두 잊고 어느새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고 있었다.

 

자신의 오감을 모두 열고 이 풀,저 풀 가능한 모든 풀과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럴 때의 아마르는 예술가가 작업에 몰두하느라 자신까지도 잊어버린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아 보인다.

 

칸타도 처음엔 그랬다.

 

눈앞으로는 제 아빠와 아들이 보이고 옆으로는 엄마가 줄을 연결하여 잡고 있으니 불안할 까닭이 하나도 없다.

 

아마 칸타는 마음을 푹 놓고서 하염없이 풀을 뜯어먹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 분이 오시기 전까지는.

 

풀뜯은 지 10 분이나 지났을까.칸타가 머리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고 빈 논에 큰 원을 그리며 한바퀴 돌았다.순간 나는 사태에 대비를 해야겠다는 비상경보를 마음속에서 받았다.

 

아마르는 엄마 칸타가 평정심을 지키지 못하고 동요한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할방님에게 얼른 칸타의 상태를 알리고 칸타와 아마르의 줄을 서로 바꾸어 잡았다.줄 잡은 사람이 바뀌었어도 아마르는 아직도 눈치가 하나도 없다.

 

 

결국 칸타는 아무래도 마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아빠가 말리는 데도 기필코 돌아가겠다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칸타가 이렇게 나오면 힘을 당할 수가 없어 그만 돌아가야 한다.이제부터는 잘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나는 칸타야 내 소관을 떠났으므로 아마르가 어찌 나올까 그게 궁금하여 초조했다.아직도 삼매경에 든 아마르의 등 뒤로 할방님이 칸타에게 이끌려 멀어져가는 모습이 보였다.칸타는 "내가 가스불 안 끄고 나왔다구요.아시겠어요? 얼른 안 돌아가면 큰 일이..." 하며 바락바락 우기는 사람 같았다.

 

말들은 외승 나왔다가도 돌아오는 길에 가스불이나 수돗불 안 잠갔다는 듯이 떼를 쓰며 설치곤 한다.간혹 등에 태운 사람은 버린 채 혼자 부리나케 가버리기도. 그래서인가 주변 아줌마들이 외출했다가 가스불 걱정한다는 얘길 들으면 말 친구가 떠오르기도 한다.아줌마는 기억이 깜빡거리지만 말은 기억력도 좋은데 왜 그리 집에 간다고 보채는 지 원.

 

칸타의 모습이 사라질 무렵 아마르도 눈치를 챘다.

 

(눈치챈 아마르의 표정 사진은 아래로 죽 내려가면 만나게 됩니다.)

 

엄마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더니 처음엔 어? 왜 돌아가지?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하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정말로 엄마가 다시 돌아가는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왕창 당혹스런 표정이 얼굴에 걸리고 말았다.

 

그때의 표정을 통역하자면 "이런 젠장! 미쳐버리겠네!" 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마르도 돌아가야겠다고 판단한 모양이다.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그런데 그날따라 나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기운도 없고 현기증도 있었다.나는 손주의 걸음을 따라잡지 못하고 뒤쳐진 할머니 꼴이 됐다.

 

내 걸음도 서두르고 줄을 잡은 손에 힘을 좀 주었으면 아마르와 함께 돌아갔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어느 순간 줄을 놓쳐버렸다.그러자 아마르가 뛰기 시작했다.

 

녀석이 뛴 방향은 우리가 걸어왔던 길이 아니라 가로질러가는 지름길이었다.아마르는 몇 걸음 뛰다가 물이 채 마르지 않은 논뻘에 발목이 푸욱 빠지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보고 어찌 되려나 머리가 곤두섰다.혹시 아마르가 당황하여 날뛸까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천천히 가던 걸음을 걷는 일이 나의 최선이었다.

 

(아마르 놀란 표정 )발목이 빠진 아마르는 날뛰지 않았고 대신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보았다.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은 "할머니 나 빠졌어.어쩌지?"하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아마르의 눈빛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읽으며 계속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한 오초 정도 지났을까.아마르는 알았다는 듯이 앞을 보더니 힘차게 뛰어서 뻘을 빠져나와 한달음에 승마장으로 향했다.

 

아마르는 할머니에게서 "아마르는 괜찮아.위험에 빠진 게 아니야.할머니도 거기로 가는 중이야."하는 메시지를 읽고 안심했다.그러자 움직여도 되겠다는 판단을 하고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내 느린걸음으로 마방까지 돌아가기는 꽤 긴 시간이었다.걸어가면서 모처럼의 풀뜯기기가 해프닝으로 끝난 상황에 우스워하며 무엇보다 아마르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의견을 살폈고 존중했다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나와 아마르는 연결되어 있다.

 

(가스불 끄러 간다는 칸타)??? 칸타는 그 후로 아빠를 태우고 할머니를 태운 아마르와 외승을 나왔다가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떨었다.그때의 표정은 "내가 깜빡 잊고 약을 안 먹고 나왔나봐 증상이 또... 어떡해!" 뭐 이쯤 되보였다. 다음 날에 칸타는 아빠에게 단둘이만 외승나가자는 요청을 받았다.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행진하는 군인처럼 씩씩하게 앞발을 번쩍번쩍 들고 자발적으로 외승길에 올랐다.그 다음 번에 아마르,엘도라도와 함께 외승길에 올랐을 때 여장부처럼 선두에 서서 수말 둘을 이끌었다.

 

할방님의 칸타심리 해석은 - 내가 볼 땐 꿈보다 해몽이지만 - 아마르랑 같이 나왔을 때 자기가 보여준 행동이 아들 보기에 너무도 부끄러운 승용마 처신이라고 반성하고 굳은 결심으로 환골탈퇴 한 거라나? 원톱시스템으로 날아가던 지나가던 철새들이 보고서 " 쟤 며칠 전 그 말 아냐?" "그날은 정신 나갔던 것처럼 보이던데 오늘은 정신이 돌아왔나봐 아무튼..."

 

 

*시시콜콜 할망 요즘

 

지난 저녁에 퇴근하던 - 회사가 아니고 승마장 - 할방님이 비닐봉지 한꾸러미를 들고왔네요.안에는 흙묻은 투박한 고구마들이 있더군요.한눈에 마트에 파는 매끈한 고구마는 아니었죠.웬거냐고 묻자 원장 사모님이 우리 거라고 캐서 주셨다는 답변이 돌아왔네요.우리 고구마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고구마 심은 기억은 없는데.할방님은 우리가 심은 게 맞기는 맞다네요.심은 후 즉시 고구마 존재를 잊었을 뿐.다음 날 두꺼운 냄비에 쪄낸 고구마 맛은 명품이었지요.기르느라 돌봐준 것도 없이 이리도 맛난 고구마를 먹다니 횡재한 기분이더군요.옛날 옷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 발견한 기분? 살다 보면 가끔은 잊고 살았는데 문득 튀어나와 기쁨을 주는 일이 있지요.너무 집착하고 살 일은 아니라고 고구마를 쩝쩝 먹으며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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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을 얻은 아마르는 시월의 축복이 내리비추자 경계를 허물고 나아갔다.> 시월의 아이콘 늙은 호박 꾸욱 누르면 가을의 창이 두둥 나타납니다.함께 거니시렵니까?

 

앗! 쟤네들은 마티와 레이가 아닌가! 어느 날 보니 2인조 작은 말이 그곳에 있었다.녀석들은 어엿한 클럽의 구성원으로서 최근 직무를 부여받은 모양이다.정문 바로 옆에 지은 패덕으로 출근하여 방문자 특히 어린이들에게 인사하고 놀아주는 일을 하고서 해가 저물면 퇴근한다.하지만 직무를 책임지기에는 어딘가 어리바리해보이고 어줍기 짝이없다.그러는 모습 자체가 귀여워서 웃음을 짓게 만든다.

 

마티 & 레이

 

우리는 어디든 함께 다녀요

 

달력을 보니 시월도 지나간 날보다 남은 날이 적어서 하루하루가 아깝기만 하다.올여름은 얼마나 길었던가.푹푹 찌는 무더위에 오래도록 시달리며 견뎌야 했기에 가을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절절한 가슴으로 가을공기를 마셔본다.

 

일 년에 반은 오월이고 반은 시월이었으면 좋겠다.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점점 봄,가을이 짧아지고 있다.계절은 혹한기와 혹서기의 이분법으로 명백하게 갈라서서 나아간다.승마를 한 이래로 계절은 점점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환경이 변해가면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승용마의 생활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바깥이 너무도 춥거나 더우므로 승용마들이 실내에서만 지내는 날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지내는 클럽에서도 틈나는 대로 방목을 하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서 말을 내놓지 못하는 날이 많다.일 년 중에 말이 밖에서 자연과 접할 수 있는 날이 꼭 우리가 겪는 달력의 빨간 날 공휴일 정도로 귀해지고 있는 것만 같다.

 

말들의 삶은 영화속에서 여러 시대에 등장한다.전쟁시기를 살았던 말이 가장 불행했던 것 같고 ,근대에 와서 물류유통과 교통수단의 소임을 해야 할 때도 참으로 고단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생활은 안전하고 편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인다.하지만 자연으로부터 거의 격리된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지금의 신세도 그리 좋다고만 볼 수는 없어 보인다.

 

나보다도 남편이 자연과 격리되어 생활하는 아이들 걱정을 많이 한 것 같다. 혹시나 하고서 기승운동 하다가 바깥으로 말의 발길을 이끌었을 때 정문을 벗어나지 못하고 벌벌 떠는 모습에 우려도 됐다.이러다간 정말이지 애완동물처럼 좁은 영역 안에서만 안주하고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니 조금 슬퍼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우리 아이들이 실내와 바깥마장을 오가며 운동하는 생활에 완전히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다.긴장도 호기심도 유발하지 않는 안일한 패턴 안에서 머무르는 생활은 나른하게 늘어진 모습으로 운동하게 만들었다.그런 말을 추스리느라 말 위에 있는 사람도 힘들다.시월이 되면서 남편은 틈틈이 아이들 풀도 뜯기고 외승도 다닌다.

 

클럽에서 논으로 넘어가려면 낙타등처럼 생긴 둔덕을 넘어가야 한다.칸타와 엘도는 자신감이 넘쳐 와락 넘어가다가 걸려넘어지는 포즈를 취했고 아마르는 한참을 살펴보고 연구한 끝에 신중한 동작으로 넘어갔다.아마르가 참 침착하다는 것을 느꼈다.생활하던 공간을 떠나 자연의 세계로 넘어가는 경계가 말똥 무더기와 쓰레기소각장 사이에 난 좁은 길목이어서 낭만은 하나도 없지만 가장 세속적인 가운데서 마법이 이루어지곤 한다.신데렐라의 화려한 마차도 호박이었다.

 

마방에 있을 때와 풀밭에 나온 아마르 사이에는 머나먼 거리가 있다.마방의 아마르가 꽃병에 곱게 꽂아서 매일 물갈아주며 관리하는 꽃이어서 살아는 있지만 아주 조금씩 생기를 잃고 시들어가는 상태라면 풀밭에선 반대로 점점 싱싱해진다.

 

아마르가 뜯는 풀은 그냥 풀이 아니다.벼다.

 

구월부터 추수를 하자 익은 벼들은 밑동이 잘려나갔다.그러고도 태양빛의 따사로움이 상처난 자리에 닿자 푸르른 줄기가 솟아올랐다.

 

땅이 꾸덕꾸덕하게 변해가는 논에는 누런빛과 풀빛이 섞여있다.죽음과 삶이 교차하며 공존하는 현장으로 이보다 생생한 예가 있을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빈논은 사실 비어있지 않고 수많은 생명들의 터전이다.사람이 없을 때는 새떼나 노루가 머물기도 한다.새로 돋아난 벼줄기와 똑같은 색의 청개구리가 펄쩍펄쩍 뛰어다닌다.말발굽에 밟힐라 멀리 달아나거라 발로 휘휘 쫒아내본다.

 

아마르가 몇 걸음을 떼자 커피콩 만한 벌레들이 화다닥 튀어오르더니 뿔뿔히 흩어진다.재난영화에서 흔히 보던 그 장면이다.외계에서 흘러든 거대한 생명체 괴물이 도시에 나타나 쿵쿵 발소리를 울리며 마구 돌아다니며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다.건물에서 나온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서로 뒤엉켜 도망치기 바쁘다.바로 그 장면이 아마르 괴물과 벌레 시민들 버전으로 논에서 연출된 것이다.

 

벌레들이 얼마나 공포스러웠을지를 생각하니 순간 가엾은 마음이 웃음을 갈무리해준다. 꼬리의 흔들림...

 

가을이 되자 말의 꼬리는 한순간도 춤추기를 멈추지 않는다.

 

들판에 나온 말꼬리는 흔들다 못해 어느 순간 바람이 되어 버렸다.

 

말꼬리는 바람으로 녹아들어버렸고...

 

꼬리가 바람이 되어버리자 서서히 마법의 시간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그 시간에 들면 내면의 그림자가 존재를 나타낸다.

 

어떤 존재에게나 의식의 가장 밑바닥 심연에는 모든 색이 녹아버린 어두움이 존재하는데 어두움은 늘 봉인되어 있어서 볼 수가 없지만 마법의 시간에는 존재를 드러낸다.해가 저물녘에 만나는 존재의 그림자에서 내면의 어두움이란 이미지를 대면하는 것 같다.

 

산등성이가 되어버린 아마르의 잔등.평소 나를 태우던 아마르의 잔등이 뒷산과 너무 닮았다.몽골의 산은 몽골의 말 등선과 닮았던데 신기한 일이다.

 

바람과 산이 되고 풀이 되고 들판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빛이 되어버린 아마르는 이 순간 자유롭다.

 

클럽에서 살아가는 승용마라는 존재의 경계를 넘어서 엎드린 아마르에게 논은 경작지라는 경계를 허물고 초원이 되어주었다.

 

부드러운 빛을 머금은 하늘을 보면서 내 안에서 나의 일부로 살아가는 속박을 떠올려 보았다.아마르와 함께 흙을 밟고 서서 마른풀내음을 맡으니 좋다.

 

계절의 경계를 뛰어넘은 민들레도 보인다.

 

곧 찬서리가 하얗게 내릴 텐데 싱싱하게 피어난 풀에게서도 경계를 넘어선 의지와 힘을 엿본다.

 

마사와 외부를 차단하는 경계선 쇠사슬이다.

 

경계선은 어디에나 있다.가장 강한 경계선은 내면에 있을 것이다.내면의 경계를 넘어 더 환하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보라고 시월의 따사로운 기운이 어루만지며 용기를 북돋아준다.

 

아마르 옆방 친구가 하염없이 시월의 들판을 바라본다.

 

 

 

 

*시시콜콜 할망 요즘~

 

집에 있던 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말이 나오길래 뭔가 봤더니 <레이싱 스트라이프>인가 하는 영화였어요.경주마가 되고픈 얼룩말 얘긴데 황당하기도 하죠.영화에서는 말들이 여럿 등장해서 사람처럼 대사도 하고 줄거리를 이끌어가더군요.한데 말하는 말들 개개가 흔히 보고 내가 알고지내는 말과 너무나 닮아서 꼭 그 친구들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 같아 신기하더라구요.아무튼 지금 생각하니 주인공 얼룩말도 아무도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경계를 허무는데 성공했고 그 일로 우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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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

 

   고려원 시문고 008 <흰바람벽이 있어>,1989년,p52

 

백석 시인은 1912년 출생했고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이며 이후 현대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분이다.

 

위의 시를 처음 보았을 때 단지 당나귀가 시에 등장한다는 것 만으로 유심히 읽어내려갔다.온세상이 설경으로 변해버린 시의 배경과 당나귀울음이 빚어내는 시각과 청각의 울림이 마음에 파도치듯 지나가는 동안 이 시가 마냥 좋아졌다.

 

시인이 살았던 시대가 워낙 동떨어져 있어서 시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는 몰랐지만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시가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나만의 심상으로 새롭게 되살아났다.

 

위대한 시인은 갔어도 그가 남긴 훌륭한 시는 살아있는 자들의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살아가는 모양이다.세상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나타샤가 있으므로.

 

당나귀는 사람도 태우고 짐도 실어나르기에 가장 세속적이지만 초월적인 존재로 등장한다.성서에도 나귀는 영적 감수성*(아래 참고)을 지닌 존재로 등장하곤 한다.그렇기에 예술가의 영감의 원천으로서 이미지가 나타나는 일이 참으로 자연스러운 것 같다.실제 당나귀도 아주 매력적인 동물이다.당나귀의 쉰 듯한 목소리가 응앙응앙 들릴 때 속세의 더러움이나 불길한 기운이 물러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위의 시를 다시 볼 때마다 좋은 느낌이 마음 속에서 변주를 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살아가는 동안 내내 사랑할 시임에 틀림없다.설경이 배경이지만 이 가을엔 온통 붉은 낙엽천지를 배경으로 상상하며 읽어도 좋을 것 같다.

 

나의 바람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암송하여 말타고 오솔길을 걸으며 소리내어 읊어보는 것이다.음~ 낭만 제대로다.

 

 

* 참고: <그리스도 정신 안에서 본 재활승마 실천 고찰>  - 강안나 -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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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망아지가 태어났을 때 새 생명을 부르는 이름은 너무도 쉽게 정해졌다.친구 라라가 어미 칸타에게서 난 아들이니 '칸돌'인데 부르기 쉽고 친근감 있게 '깐돌'이라 부르면 된다 해서 그 순간부터 그대로 쭈욱 '깐돌'이라 부르게 됐다.만일 칸타가 딸을 낳았으면 '깐순'이가 되었을 것이다.라라가 깐돌이라는 이름을 입술에서 뱉었을 때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원래 망아지의 이름이 깐돌이었고 저 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이 세상으로 건너오는 입구여서 그곳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존재의 이름을 라라가 대신 알려준 것만 같았다.

 

깐돌이는 망아지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장난끼로 똘똘 뭉쳐서 눈알을 데굴데굴하고 혓바닥은 옆으로 낼름 빼물고 다니는 모습이 영락없는 까부는 아이였던 것이다.깐돌이가 두 살이 되었을 때 새로운 이름을 주고 싶었다.두 살이면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까불고 장난치는 모습은 여전해서 도저히 깐돌이 말고 다른 이름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깐돌이가 세 살이 되고,네 살이 넘어갈 때도 다른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깐돌이란 이름이 다른 이름이 오는 것을 철저하게 방어하고 있는 듯했다.우리 부부가 틈만 나면 깐돌이의 새 이름을 쥐어짜도 나오지 않았다.궁여지책으로 '깐'이 붙으면 더 까불 것만 같고 그러다 다치기나 할 것 같고 승용마의 본분에서 멀어지는 것만 같아 '깐'을 빼고 '돌이'라고만 부른지도 오래 되었다.그러다보니 편하기도 해서 돌이란 이름은 그대로 굳어져서 한평생 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돌이는 다섯 살이 될 무렵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몸도 어른말의 골격에서 비롯되는 자태를 갖추었고 무엇보다 얼굴에서 장난기가 증발해버렸다.오죽하면 '어덜트 키드'라고도 했을까.장안을 하느라 가만히 세워두어도 나대지도 않고 의젓,차분하기만 하니 도대체 우리가 아는 돌이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서운할 지경이었다.까불던 아이는 어디로 가버리고 그 자리에 다른 말이 섰다.세상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처음에 익숙하지 않던 돌이 모습에 차차 적응이 되고 보니 옛날 돌이는 지금 돌이의 모습으로 서기 위하여 잠시 입었던 옷이었고 때가 되어 낡은 옷을 벗어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여름 밖에서는 폭염에 달구어지는 날씨였는데 아랑곳없이 방에 틀어박혀 출판원고와 씨름하던 나는 틈틈이 시집을 읽었더랬다.그 옛날부터 좋아하던 시인인 류시화의 새로운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이다.시인이 15년 만에 낸 시집이라 시어 하나하나가 가슴속에 깃든 현악기를 퉁기는 것 같았다.틈나는 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나오는 시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시어 하나가 툭 던져졌다.나를 데려가세요 라는 듯이.그 시어는 '아마르'였다.

 

시집에 실린 시 중에 <옛 수첩에는 아직>이라는 시가 실렸는데 '아마르'는 거기에서 나와 나에게 전달되었다.그 순간의 기분은 저 우주에서 누군가 '이제 그 말에게 새 이름을 줄 때가 되었어'하고는 시인의 입으로 뱉어져 나의 가슴에 꽂힌 방식으로 온 것같았다.나는 애마의 이름을 받았다.

 

'아마르'는 시인이 밟았던 땅의 현지 언어로 '영원'이라는 말이라고 한다.왜 '영원'이라는 단어가 나의 영혼을 흔들었는가?

다섯 살이 된 돌이를 타면서부터 녀석의 잔등에서 어떤 영속성을 느꼈기 때문이다.어느 순간부터 나를 온전히 제 등짝에 받아주는 말에게서 제 마음을 온전히 내어주고 있다는 편안함이 밀려왔다.그 편안함 속에서 나를 태운 말 움직임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일일이 다 느껴볼 수 있었는데 그 느낌과 기분은 익숙한 것이었다.오래 전에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하던 애마가 태워줄 때의 바로 그것이었다.그러자 가슴에서 감동이 밀려들었다.애마는 떠나고 나는 남아서 슬픔에 잠겼었지만 함께 하던 그때에 나누었던 사랑은 시간의 유한함을 넘어서 다시 또다른 유한함 안으로 찾아들어 이어지는구나.

 

돌이의 등에서 그 옛날 바람이와 나누었던 만족스럽고 행복했던 그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되면서 세월은 돌고돌아 소중했던 것들을 영원히 이어준다고 깨닫게 되었다. 이 생은 사랑만 하기에도 짧은 시간이 아닌가.이러한 내면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이름 '아마르'가 나에게 왔다.

 

'아마르'와 나는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 속에 영원을 타고 흐르는 소중한 것을 이어가고자 한다.

'돌이'가 '아마르'가 된 사연을 늘어놓다보니 장황했다.본디 소중한 것은 언어로 나열해서 표현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다.

 

 

 

 덧붙이는 말

 

# 이제부터는 자판으로 '깐돌이'치다가 'ㄲ'이 삑사리 나서 '간돌이'가 되는 통에 고치느라 고생할 일이 없겠죠? 하하~

 

# 지금부터 '깐돌이' 혹은 '돌이'라 부르시는 분 벌금 5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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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나가 놀고 싶어요 잉잉~

 

나비넥타이가 어울릴 것 같은 꼬마신사 마티와

 

예쁜 여자아이 같지만 사실 남자아이인 레이는 바깥 세상이 궁금하다.

 

아이들의 바깥세상이라야 승마클럽이 다다.

 

아이들 마방은 널찍하고 쾌적하지만 아이들인지라 놀이터에서 놀아야 한다. 레이와 마티의 놀이터는 어디인가?

 

우리의 놀이터는 어디야?

 

레이의 마방굴레에 로프를 매서 붙들고 나가면 녀석이 앞장서서 종종걸음으로 달려나간다.그러면 마티가 자동으로 따라나온다.얼마나 온순하게 나오는지 큰말이나 덩치 큰 개처럼 힘자랑하지 않아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성격도 순해서 놀라서 튀거나 갑자기 뛰거나 하는 돌발행동을 하지 않는다.이 아이들은 작은 말의 탈을 뒤집어쓴 양이 틀림없다.

 

레이와 마티를 보다가 칸타와 돌이를 보면 눈 씻고 봐도 귀여운 구석이라곤 찾을 수가 없다.

 

요 녀석들을 보고 있으면 뇌파의 수치가 얼마였든지 수치가 급강하해서 낮아진다. 나타나는 증상은 사람의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긴장이 완화되며 긍정적 감정이 찾아와 웃음을 짓고 기분이 좋아진다.내가 겪은 증상과 다른 사람들을 수일간 관찰하니 그랬다.

 

특히 아이들이 보았을 때 큰말은 덩치가 워낙 크다보니 두려움도 느끼는데 아이들 키보다 작은 미니어처에 대해서는 친근함과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예쁜 여자어린이 둘이서 부모님과 함께 미니어처를 만나 노는 모습을 잠깐 보았다.소녀들이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보는 나조차 유쾌했다.

 

마티와 레이의 전용놀이터 출입문.

 

레이와 마티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도 없고 친밀함을 지니고 있어서 아이들과 잘 놀아줬다.너무 들이대지도 않고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 놀아주었다.

 

말과 사람이 사교하는 모습을 보니 말은 꼭 타야만 즐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보고 함께 노는 즐거움도 선사하는 존재구나 싶어진다.

 

지나가던 철새도 말과 사람이 어울려 노는 정겨운 풍경을 보고가는 것 같다.

 

마티와 레이가 풀밭에 있으니 더욱 활기차고 생기있어 보인다.

 

레이와 마티의 놀이터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아져서 개천절에 뚝딱뚝딱 공사에 들어갔다.마침 공휴일이라 장정도 많고 회원도 대부분 있었다.그중엔 건설 전문가도 계셨고 ,엄마도 여럿 계셨다.또 힘쓰는 일에 빠지지 않는 일꾼 등 모두가 한마음으로 시작한 공사는 다들 한마디씩 하느라 요란 시끌벅적했다.그 과정에서 미니어처 망아지에게 맞는 공정인지 확인절차가 필요했다.

 

레이와 마티는 울타리나 출입문을 그렇게 하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고 몸소 시범을 보여서 다들 한바탕 웃다가 드디어 맞춤 울타리와 출입문도 완성했다.

 

이곳은 원래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인데 막아서 놀이터를 만든 것이다.말하자면 차없는 거리 대학로처럼 용도변경을 한거다.가운뎃길 양옆으로는 화단이 있고 자연스럽게 풀이 자라고 있어 그곳을 거니는 레이와 마티가 동화속 어느 공간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말은 풀밭에 있어야 가장 말답다.

 

아이들 놀이터 만드는 통에 사람들의 통행이 좀 번거로워졌지만 예쁘고 작은 생명을 보다 행복하게 해주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빛났던 하루였다.

 

풀밭에서 무심하게 풀뜯는 걸어다니는 말 인형을 보면서 세상사 걱정근심이 봄눈 녹듯 사라지니 그 순간엔 머릿속도 개운하고 마음도 훨훨 가볍다.

 

레이의 뒷태.어쩜 엉덩이에 동그란 무늬가 있는 것인지 ㅋㅋ

 

망아지가 하나라면 쓸쓸해보이고 어미의 부재가 안쓰럽게도 느껴질 텐데 둘이라서 안정적이다.

 

마방에 돌아갈 시간이다.

 

실 레이가 가면 바늘 마티는 무조건 따라가요~

 

방에 돌아오니 또 당근도 주네

 

우리 돌이도 앙증맞게 예쁠 때가 있었지.

 

해는 들판 너머로 사라지고 오늘도 말이 있어 행복했던 하루가 다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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