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 애호가가 설 연휴에 뒹굴거리며 본 영화 -

 

 

명절 연휴에는 으레 남아도는 시간이 생기는지라 뭐 심심풀이로 볼 영화 없나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번 설에도 그런 상황이 찾아와서 좀 고르다가 본 영화가 줄리아 로버츠가 출연한 <사랑게임>이다. 줄리아 로버츠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여왕이라고 했던가.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를 보면 언제나 기분좋은 유쾌함에 젖어드는 편이다. 줄리아 로버츠가 출연한 영화 중에는 <노팅힐>이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사랑게임>이라는 영화에서 말은 매우 중요하다.

 

주인공 그레이스(줄리아 로버츠 분)는 전형적인 남부 대목장주의 장녀로 태어나 말과 함께 성장했다. 집안의 사업이란 말을 훌륭한 승용마로 키워 각종 대회에 출전시키고  몸값을 높여 판매하는 것이다. 현재 그레이스는 아버지 목장의 마필관리실장 쯤 된다. 마사 안에 즐비하게 연이어진 마방 끝에 그녀의 사무실이 있다. 그레이스는 결혼하기 전에 수의사를 꿈꾸었으나 갑작스레 찾아든 연애와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절차로 결혼과 임신이란 상황에 맞닥뜨리며 그 후로 내내 일상에 충실하게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난 사실을 알게되고서 인생 전체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충격에 빠져든다.

 

 

그레이스가 '내 인생이 대체 뭔가?' 완전히 실패한 인생은 아닌가 하고 회의에 빠져드는데, 사실 공교롭게도 남편이 타이밍을 맞춰 도화선이 되어준 것일 뿐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싯점에서 여자로서 자신을 돌아볼 때가 되긴 되었다. 남편과 별거를 하면서 그레이스는 자신이 꿈을 접고서 평범한 아내와 엄마로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는 데에 자괴감을 느끼고 온통 남편에게 분노를 쏟아붓는다. 그러나 남편은 사건이 터지고 금방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원상태로 돌아가려 애를 쓴다.

 

결혼을 하고서도 부모님과 함께 3대가 거주하는 그레이스의 집안은 가족 개개인도 모두 인상적이다. 아버지는 보수적이고 완고한 가장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노령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그랑프리 대회에 나가 우승하겠다는 젊은이 못지 않은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그 방편으로 남의 몫을 가로채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바람에 빈축을 사기 알맞지만 열정 자체에는 박

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어머니는 온화한 성품이다. 남편이 바람나서 괴로워하는 딸에게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고 다독이며 응원을 보낸다. 그레이스 여동생은 화끈하다. 용서를 빌러 찾아온 형부 아랫도리를 사정없이 걷어차는 것으로 응징을 하며 언니를 대신하여 언니보다 더 분노하고 안타까워하고 언니에게 기운을 북돋아준다.

 

이 가족들의 면면을 보면서 나름 꽤 괜찮은 가족의 모습이라고 여겨졌는데 이런 긍정적인 가풍은 말에 둘러쌓여 살아온 환경에서 기인하는 바도 크다고 생각한다. 말을 기르고,교육시키고, 돌보아주고,그들에게 깃든 재능을 이끌어내려면 공동체에 유용한한 의사소통 방식을 일상적으로 사용해야하기 때문이다. 말 못하는 말이 어디가 아픈지, 어떤 상태인지 늘 살펴야 하고 겁 많고 소심한 말에게서 어떤 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온갖 소통기술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런 생활에 익숙하다보면 타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어떤 감정 상태인지 통찰하는 능력과 문제해결능력이 자연스럽게 터득이 된다.

 

 

 

그레이스가 깊은 회의 속에서 방황하다가 꼬여버린 자기 인생의 실타래를 풀 수 있는 해법으로 발견한 것은 딸 캐롤라인에게서였다. 캐롤라인은 집안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인지 말을 너무나 좋아하는 소녀다. 이 소녀의 불만은 자기가 좋아하는 백마를 타고 대회에 출전하고픈 소망이 금지됐다는 거다. 할아버지나 엄마는 소녀의 안전을 생각하여 어린이가 무리없이 통제하여 다룰 수 있는 조랑말을 타라고 한다. 더 커야만 큰말을 타게해주겠다는 거였다. 이에 대하여 영화 초반에 캐롤라인이 엄마에게 분통을 터뜨리며 자기주장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얼마나 당차고 야무진지 말과 더불어 자란 아이답다고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할 뻔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든 생각은 이랬다. 남부 여자들은 몇 세기에 걸쳐서 기대치를 아주 적게 가지도록 교육되어왔다고. 남자에게 그 말을 뱉은 후 그레이스는 딸 생각이 났다. 자신 역시 딸에게 네 꿈의 그릇은 작은 것이라고 억누른 것이 아닌가 하고. 순간 그레이스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 딸에게 가서 큰 백마를 타도 된다고 허락했다. 딸의 기쁨은 너무 커서 자다 말고 일어나 말 타러 나가겠다고 한다.

 

 

 캐롤라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그랑프리 대회장에서 증명해보였다. 마지막 고난도 장애물을 넘을 때 캐롤라인의 앙다문 입술과 단호함이 빛나는 눈빛이 인상적이다. 캐롤라인은 엄마 그레이스에게 자신이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커다란 것을 성취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레이스에게 깨달음이 왔다. 자신의 불만족스러운 인생은 그 누구의 탓이 아닌 자신의 문제였다고.

 

 

 그리고 결혼과 양육으로 자신의 꿈을 접었던 일은 잘못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훌륭하게 자란 캐롤라인이 그 증거였다. 그레이스는 사랑하는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오자 그와 함께 할 인생을 꿈꾸고 선택하였다. 그때  자신의 판단을 믿고 다가온 운명에 충실했던 뿐이고,  수의사가 되고자 했던 자신의 꿈을 배반한 일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또한 과거에 그레이스가 14세 이하 선수가 참가하는 전국대회에서 우승하여 빛나는 성취감을 맛보았던 그 시절이 떠오르면서 새로운 자신감도 충전되었을 것이다.

 

 

 비록 3위에 머물렀지만 후회없는 경기를 펼친 아버지.

 

영화에서 자신의 본분을 넘어선 꿈을 추구한 아버지가 현실을 인정하게 되는 상황과 딸 그레이스가 자존감 부족으로 갈등을 겪다가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대비가 눈여겨 보아진다. 결국 여성 자신이 딸과 엄마로 자신을 좁게 가두지 말고 더 큰 꿈을 꾸고 매 순간 성취하며 자신을 발견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영화겠다.

 

 

 그랑프리 대회가 끝나고 사람과 함께 최선을 다한 말 선수에게 샴페인을 맛보게 하는 장면이 영화에 나왔다. 시종일관 축제 분위기로 펼쳐지는 대회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단, 현실에서 따라하는 것은 삼가해야 할 것 같다. 자칫 말 이빨에 유리잔이 깨져 파편이 말 입안에 들어가면 곤란할 테니까. 나라면 말용 실리콘 샴페인잔을 준비할 것 같다. 음료는 달달한 당근주스가 어떨까?

 

대회가 끝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성취해내는 모습을 보여준 딸의 모습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발견한 그레이스는 수의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한다. 그녀가 밝아지면서 불화를 겪던 남편과도 관계가 회복된다.

 

<사랑게임> 영화를 보면서 말이란

 

우리가 자신의 내면에  

 

자존감과 자긍심이란 나무를 심고

 

자라게 하는 인도자이며,

 

성장의 동반자라는 것을 내내 생각해보았다.

 

 

 

 

 


사랑 게임 (1996)

Something To Talk About 
0
감독
라세 할스트롬
출연
줄리아 로버츠, 데니스 퀘이드, 로버트 듀발, 지나 롤랜즈, 뮤즈 왓슨
정보
코미디, 로맨스/멜로 | 미국 | 105 분 | 1996-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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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휘트먼[미국]


 

 

 

 

 

월터 휘트먼[Walt Whitman](1819. 5. 31~ 1892. 3. 26)




나는 모습을 바꾸어 동물들과 함께 살았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들은 평온하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안다.

나는 자리에 서서 오래도록 그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땀흘려 손에 넣으려고 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환경을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은 밤 늦도록 잠 못 이루지도 않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 따위를 토론하느라
나를 괴롭히지도 않는다.
불만족해 하는 자도 없고, 소유욕에 눈이 먼 자도 없다.

다른 자에게, 또는 수천년 전에 살았던 동료에게
무릎 끓는 자도 없으며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잘난 체하거나 불행해 하는 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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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다시 산다면  (0) 2015.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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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다시 산다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내가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면

 

다음 번에는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긴장을 풀고 몸을 부드럽게 하리라.

 

이번 인생보다 더 우둔해지리라.

 

가능한 한 매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보다 많은 기회를 붙잡으리라.

 

 

 

여행을 더 많이 다니고 석양을 더 자주 구경하리라.

 

산에도 더욱 자주 가고 강물에서 수영도 많이 하리라.

 

아이스크림은 많이 먹되 콩요리는 덜 먹으리라.

 

실제적인 고통은 더 많이 겪을 것이나

 

상상 속의 고통은 가능한 한 피하리라.

 

 

 

                  보라, 나는 시간 시간을, 하루 하루를

 

의미있고 분별있게 살아온 사람 중의 하나이다.

 

아, 나는 많은 순간들을 맞았으나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면

 

나의 순간들을 더 많이 가지리라.

 

사실은 그러한 순간들 외에는 다른 의미없는

 

시간들을 갖지 않도록 애쓰리라

.

오랜 세월을 앞에 두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대신

 

이 순간만을 맞으면서 살아가리라.

 

 

 

 

                  나는 지금까지 체온계와 보온물병, 레인코트, 우산이 없이는

 

어느 곳에도 갈 수 없는 그런 무리 중의 하나였다

 

이제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이보다

 

장비를 간편하게 갖추고 여행길에 나서리라.

 

 

 

 

내가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면

 

초봄부터 신발을 벗어던지고

 

늦가을까지 맨발로 지내리라.

 

춤추는 장소에도 자주 나가리라.

 

회전목마도 자주 타리라.

 

그리고 데이지 꽃도 더 많이 꺾으리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1899년 8월 24일 -1986년 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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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르가  땅조사를 한다.

이곳으로 누가 얼마나 이전 시간에 다녀갔나 알아보는 것 같다.

이를테면 '아무개가 점심 먹기 전에 지나갔고, 누구는 아침 해뜨고 바로 다녀갔군.'

 

 

 

 

 이럴 때 머릿속은 온통 무엇에 골똘하느라

다리는 그저 수동적으로 따라오는 느낌이다.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살필 때도 역시 느릿느릿 평보다. 

 

말과 사람이 함께 친밀감을 느끼는 데에는 평보가 최고다.

말의 마방굴레에 로프를 달아서 잡고 나란히 걸어갈 때에 기분좋은 느낌이 있다.

말 뒷다리가 내 눈에 보일리 없으므로 마치 말도 두 다리로 걸어가는 것만 같다.

그럴 때 말도 보폭을 나에게 맞추고 제 눈의 높이를 나의 눈높이 정도에 두므로

친구랑 다정하게 걸어가는 느낌?

로프를 느슨하게 늘어뜨려 잡으면 말이 주변도 살펴가며 나도 쳐다보니

우리 사이에 끈끈한 친밀감이 있구나 싶어진다.

 

 

 

 평보 걸음걸이 사진은 아마르가 자유롭게 놀고 있을 때 모습이다.

 아래에 나오는 속보나 구보 걸음걸이는 자유조마를 실시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유심히 보면 아마르가 꽤 절도있게 나아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유조마는 긴 로프를 말과 사람 사이에 연결시키지 않고

사람의 손짓이나 입소리 신호에 따라 말을 훈련시키는 방법이다.

로프라는 물리적 연결이 없다보니 정신적인 연결이 튼튼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아마르가 지금도 완벽한 수준이랄 수는 없지만 처음 실시할 때 순조롭지 않았다.

좁은 훈련장에서는 비교적 잘 했지만 넓은 공간에 나오니

 '자유로운 영혼' 아마르는 훈련가인 할아버지의 지시를 따르기보다

호기심천국 운동장 돌아다니기가 더 좋았을 테니까.

 

 

 그러는 동안 나는 배꼽잡는 쇼를 꽤 구경할 수 있었다.

아마르가 할아버지를 따르고 말을 잘 듣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 "더는 못 참아! 안 해!" 하고

어느 코너에서 대각선으로 전력질주하여 (그럴 때 만화에서처럼 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가장 먼 곳에 멈춰서서  먼 산을 바라본다.

할아버지가 요놈을 혼내고 다시 바로 잡으려고 헐레벌떡 뛰어갈 적에

순간이동에 가까운 아마르의 질주에 비해

앞으로 고꾸라질듯 맨땅에서 질퍽거리는 사람의 걸음은

얼마나 힘겨워 보이는지 웃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하룻동안 이 장면을 비디오 반복해서 돌리듯 여러 번 보고 나는 실종된 배꼽을 찾아야했고

 아마르 할아버지는 진빠지고 삐치고 만다.

 

 

아마르가 눈치가 훤하고 생각이 말짱해서

자유조마를 할 때 늘 훈련하는 사람의 관심권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한편으로는 제 자신의 자유로움에 대한 의지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할 줄 알았다.

도망간 아마르에게 다가가면 제가 잘못한 줄을 알고 떳떳하지 못한 심정이 되어

눈치를 힐끔힐끔 본다고 한다.

 

 

 

 

찬바람 부는 겨울에도 아마르 훈련은 중지하지 않았다.

 아마르가 제 할아버지가 그 옛날 사거리에서 교통지도 하던 사람이 수신호 보내듯

팔을 쭉 뻗어 방향을 지시하고

입술을 다물었다가 터뜨리며 '쁘' 하는 소리를 내서 지시를 분명하게 하니

 '예써-ㄹ' 하듯 탄력있는 걸음걸이로 팬스를 따라 돌았다.

 아래 사진들은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았던 상황의 리포트가 될 것이다.

 

 

 

아마르의 모습을 보며  

말과 사람은 '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고 생각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그건 도망갔다가도 다시 다가와 눈을 맞출 수 있는 관계로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로프로 너와 나를 연결하여 걸어갈 적에 주위를 탐색하지만

다시 내 눈을 바라보는 말의 모습도 본질은 그것이 아닐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영화를 다시 보았다.

cgv 홈페이지에서 로그인하여 조회하니 이 영화를 2004년에 부천에서 본 것으로 나왔다.

'뭐? 진짜?' 이런 심정이었다.

영화를 봤다는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언제,어디서,누구랑 봤는지는 깜깜했다.

한데 이렇게 기록이 나오니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났다.

 

 

어쨌든 영화를 다시 봤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영화의 내용은 파편적 이미지와 줄거리일 뿐

그것도 전체 내용의 10% 정도에 불과한 것 같다.

 

책도 10년 전에 봤던 책을 다시 보면 완전히 새로운 책 그 자체인데

영화도 그렇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고 말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최고 작품이 아닌가 한다.

그만큼 좋은 요소가 많이 들어있는 영화다.

이 자리에서는 치히로와 하쿠의 깊은 인연과 사랑에 대해서만 좀 쓰려고 한다.

 

 

 

 신들이 쉬러 오는 온천장이란 낯선 세계에 들어온 치히로는 하쿠라는 소년을 만나 도움을 받는다.

하쿠는 치히로에게 너의 이름을 절대 잃어버리지 말라 하고 꼭 다시 돌아가게 될 거라고 말한다.

치히로는 낯선 세계에서 센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하쿠도 원래 이름은 고하쿠였다.  

정작 자신은 이름을 잊었는데 치히로가 기억해내어 말해준다.

하쿠는 용이다. 백룡.

백마가 상서로운 동물이듯 용도 황룡이나 흑룡이 아닌 백룡은

 뭔가 성스럽고 신비로운 영적 존재로 느껴지게 한다.

사람인 치히로와 백룡인 하쿠는 오래전 맺은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치히로가 강에 빠져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그 강에 살던 하쿠가 구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 어떤 사랑이 오갔고 그 후로 둘은 각자의 삶을 살았다.

 

 

 

둘이 다시 만났을 때 치히로가 하쿠의 생명을 구하게 된다.

그러면서 둘은 서로가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

'나를 찾아나가는 길'에 온전히 들어서도록 돕는다.

 

 

치히로가 하쿠를 타고 창공을 날아간다.

백룡이 소녀를 태우고 창공을 비상하는 장면은 심해를 헤엄치며 떠가는 물고기를 떠올리게도 한다.

 영화에서는 하쿠가 용으로, 할멈이 까마귀로 넘나드는 변신을 한다.

동양적인 상상력에서는 이런 넘나듦이 자연스럽다.

 

치히로와 하쿠는 다시 헤어진다.

치히로는 자신의 본질을 잊은 채 돼지로 살아가던  부모님을 구하고

 다시 인간세상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둘은 헤어지면서 언젠가 또 다시 만날 것임을 확신한다.

 

하쿠는 신들의 세계에서 치히로는 현실의 세계에서 살아가게 되겠지만

둘 사이엔 투명한 은빛 실타래 같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백룡을 타고 날으는 소녀' 이미지에 그런 상징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말이 사람을 태우고 하나가 되는 이미지에도 같은 본질이 깃든 것이 아닌가.

낯선 세계에 속한 낯선 존재가 서로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 사이에 어떤 소중한 연결이 지어져있음을 확인하는 것!

 

 

 

잠시 영화라는 다른 세계에 머물다 오니

아마르는 여전히 속보로  나아가고 있다

 

 

 

 

말이 나아가는 걸음걸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네 개의 다리가 이루어내는 변화와 질서의 하모니에서 어떤 놀라움을 발견할 때가 있다.

어떻게 네 개의 다리를 헷갈리지 않고 순차적으로 다양한 보법에 맞게끔 사용하는지 말이다.

 특히나 보법을 바꿀 때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에 따르는 것이므로 혼란스럽지 않나? 우려해보지만

말은 '그런 건 이미 내 속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구요!'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기만 하다.

 

 

 

 

기왕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영화를 언급했으니 

팔이 여러 개 달린 가마 할아범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가마 할아범은 온천장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보일러실 총책임자다.

 그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려면 오차없이 기계조작을 해야만 하는데

여러 개의 팔이 기차의 하부를 연상케 한다.

 

 

 

 

 영화에서 여러 번 나오는 가마 할아범이 일하는 팔동작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손색없다.

 

 

 

만일 가마 할아범을 인터뷰한다면

이런 말을 들려주지 않으려나 혼자 상상해 본다.

 

"저는 작업내용에 따라 팔 운용법을 달리합니다.

한쪽 팔을 교대로 순차적으로 쓰는 법, 대각선으로 쓰는 법, 지그재그로 쓰는 법이죠.

 글쎄 상상이 안 가시죠? 그럼 말의 걸음을 떠올려 보세요.

다리 여섯 개 달린 말이 다양하게 걷거나 달리는 모습을 말입니다."

 

 

이런 상상을 혼자 해보고 재미있어 하는 까닭은

 나는  팔과 다리의 기능이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는데,

말이나 가마할아범은 구분 없이 현란하게 사용한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한다.

 

 

 

  

 

     

                                                                                  

 

 

 

 

 

 

구보로 이행한다.

 

 

                                             

                                            

 

 

 

 

 

 

 

 

 

장애물도 없는데 괜히 혼자서 하는 점핑

 

 

운동장을 돌다보니 저절로 신바람이 나는 모양이다

'끼야호~~'쯤에 해당되려나..

 

 

 

사람이 어떤 의도로 훈련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나름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말이 예기치 않은 행동을 보여줄 때 ,

말과 사람에게 모두 활력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순간 말과 운동장에서 함께 노는 것이 타는 것 못지 않게 재미있다고 느껴진다.

 

 

 

점프를 하고 난 탄력으로 앞으로 거침없이 질주한다.

 

 

 

 

 

 

 

 

거침없는 질주 후에 '끼이익!' 하는 느낌으로

후구를 낮추어 뒷발로는 미끄럼을 타며 제동을 걸고 앞발로는 깡총 제자리뛰기를 하며

제동을 안정시키는 동작을 한다.

이 동작에서 아마르는 희열을 느끼는 모양이다. 자주 하는 것을 보면 .

 

 

 

흐트러진 동작을 정돈하여 단정하게 선 후에

 

 

 

 

인사라도 하려는지 돌아서서 바라본다.

아마르는 이렇게 묻고 있는 걸까?

 

"나 잘했나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015)

The Spiriting Away of Sen and Chihiro 
9.4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출연
히이라기 루미, 이리노 미유, 나츠키 마리, 나이토 타카시, 사와구치 야스코
정보
애니메이션, 판타지, 어드벤처 | 일본 | 126 분 | 2015-02-05

 

 

 

 

(날이 풀리면 카메라를 들고 논으로 나가볼까 합니다. 돌이할방님과 아마르가 틈틈이 하는 내츄럴 훈련의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서입니다. 작년부터 실시한 아마르 훈련의 단계별 진행을 기록해두어야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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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춘이 지나고도 겨울은 기세등등하다.

 지난 11월부터 세마장에서 물로 씻어내리지 못한 말의 몸은 꼬질하기 이를데 없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어디가 가려운 느낌이 드는데 말은 오죽하겠나.

 

그래서인지 겨울이 길게 흘러갈수록 말 아이들이 밖에 나와 모래목욕 할 때 

그들의 감각을 총동원하여 즐긴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모래목욕을 하기 전에 자리를 잘 골라야 한다. 뾰족한 돌멩이라도 있을지 모르니까.

또한 신중하게 킁킁거리는 모습에서

혹시라도 방금 다녀간 맹수의 냄새라도 남아있지 않은지 안전을 도모하는 느낌도 받는다.

혹시라도 근처에 맹수가 매복하고 있다면

모래목욕 한 번 하려다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는 사람이 잘 관리하고 통제하는 곳이어서 맹수 따위가 나타날 리 없다.

 뒹굴기 전에 늘 자리를 고르는 말의 행동에서 조심성이 많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한다.

 

 

 

 

자리를 선택한 후 괜히 핑그르르 제자리 돌기를 한 바퀴 하기도 한다.

그 후엔 들고 있던 보따리를 손에서 놓았을 때

땅으로 꺼지며 풀썩 널부러지는 듯한 순서를 밟는다.

 

 

 

 

 아마르는 지금 세배하려는 게 아니고요.

육중한 몸통을 땅에 내려놓으려는 목적을 위하여 먼저 앞다리를 꿇은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몸통을 옆으로 쿵 쓰러뜨린다면 충격이 와서 아플 것 같다.

 

 

 

 

 무사히 무거운 몸을 땅에 부려 놓았다.

 

 

 

 

이제 본격적인 모래목욕 시작이다.

하는 요령은 굴곡이 있는 신체 부위의 표면을 최대한 모래에 비벼대는 것이다.

 

 

 

 

잠시 뒤집어진 말의 몸을 좀 관찰해보자면 배 아래에 검은 구멍이 보인다.

혹여 배꼽이 아닌가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중요한 부위인 (아마르가 절대 만지도록 허락하지 않음) '고추'가 들어있는 케이스 입구다.

 

안경은 안경집에, 연필은 필통에, 칼은 칼집에 담는 것처럼

손상이 우려되는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는 이치에 해당되지 않을까 한다.

필요한 경우에 이토록이나 완벽하게 숨길 수 있다니 얼마나 효율적인 구조란 말인가.

팬티라는 거추장스러운 의복을 입지 않아도

'보호'와 '가림'이라는 기능에 저토록 충실할 수 있다니 놀랍다.

 

한여름에 말이 더위에 지쳐 고추를 있는 대로 늘어뜨렸을 때

얼마나 '기럭지'(기럭지란 말을 이런 데서도 쓰다니) 가 긴지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 거대한 기럭지가 사진속의 납작한 배 안에 감쪽같이 들어가 있다고 상상하면 신기할 뿐이다.

 

 

 

 

암말의 경우엔 수말의 검은 구멍 위치 양편에 젖꼭지 두 개가 돌출되어 있다.

암말은 중요한 부분을 평소 꼬리로 잘 가리고 다닌다.

 

 

 

 

말이 모래에서 뒹구는 목적으로 목욕 말고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세탁이다.

 

말은 털이 옷이다.

봄에 지난 겨울의 묵은 털을 모두 벗어버리고 새털이 자라나는데

여름에 길이가 가장 짧아서 마치 그냥 피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면 털이 점점 자라나서 겨울엔 두툼한 코트가 된다.

 이 코트에는 마방에서 묻은 오물, 제 몸에서 떨어져나온 각질 등으로 더럽혀지기 마련인데

모래목욕 할 때 모래와 마찰하면서 떨어져나간다.

 

말이 몸통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모습과

내집 세탁기가 이리 빙글 저리 빙글 하는 모습은 뭔가 비슷하다. 

그렇다면 아마르는 모래에서 드럼세탁기 놀이를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방목을 시키지 않아 모래목욕을 하지 못하고 생활하는 다른 말을 관찰하니

몸에 엉겨붙은 각질이 많았다.

 

 

 

 

 

볼일이 끝났으면 잘 일어날 일만 남았다.

이 순간을 유심히 살펴보면

말이 몸 일으키는 동작에서

아픈 다리는 힘주어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아프지 않더라도 더 강한 다리를 사용하여 일으키기를 한다.

 

말은 다리가 네 개이므로 상황에 따라 불편한 다리는 아끼면서

 나머지 다리를 좀 더 사용하여 효율성을 도모하려고 한다.

 

아마르는 왼쪽 앞발을 지팡이처럼 땅에 짚는 첫동작을 시도했다.

 오른쪽 앞발은 최근에 염좌를 앓았던 터라

 나름 아끼는 모양이다.

 

 

 

 

 

 마방에서 처음 꺼낸 말이 다리가 아프지는 않은가 확인하기 위해

손으로 만져 열이 나는 부위가 있나 확인하고 ,

 끌고 나가면서 걸음걸이가 자연스러운가를 보고 ,

그때 바닥에 차례로 디뎌지는 발자국 소리가 규칙적인가 들어본다.

 

 

 

 

 앞다리 한쌍을 지지대로 세운 후에

 

 

 

 

끙! 하고 힘주어야 하는 후구 일으키기

 

 

 

 

 

 

다 일어난 후에 동상자세로 마무리하면 모래목욕 끝!

보통의 매뉴얼에서는 몸을 부르르 떨어서 모래를 터는 깔끔함을 과시하는데 이날은 생략하고 넘어갔다.

 

 

 

   

 

 

다음은 기쁨의 세레모니를 할 차례.

 

공중으로 붕 떠오르고

머리를 흔들고

 

 

 

 

 

허공에 하이파이브를 하고

 

 

 

 

 점프도 하고

 

 

 

깡총거린다.

 

 

 

아마르는 기분이 좋아진 채로 엄마인 칸타가 뭘 하는지 궁금해졌는지

 자석처럼 끌리듯 다가갔다.

 

 

 

아마르를 보면서 어린 아이와 말과 강아지 사이에 어떤 공통점을 떠올려 보았다.

 

 

 

물론 어른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그렇다.

 

1. 사안의 중요성으로 보아 천천히 걸어가도 되는데  달려간다.

 

2. 가만 서있다가 걸음을 옮길 때 괜히 확 출발한다.

 

3. 걸핏하면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동작을 한다.

 

4. 시시때때로 이유없이 신바람이 난다.

 

5. 작은 구멍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방의 벽을 이루는 나무 판자에 틈이 생기면  '너 잘 만났다' 하고

 하루 종일 물어뜯어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 놓는다.

 

쿠션에 작은 틈이라도 벌어지면 강아지는 기어코 물어뜯어서

쿠션의 내장이 밖으로 다 나오는 지경으로 만들어 놓는다.

 

 어린 아이는 어떤 사물에서 풀려나온 끄트머리가 있으면

기필코 잡아뜯어 해체하는 재주를 발휘한다.

 

어른이라면 이 모든 경우에 어떻게 하면 메꾸어서 원상대로 돌려놓을까를 먼저 생각한다.

 

오늘도 아마르는 괜히 혼자서 바쁘게 뛰어다니고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목욕 습성, 세탁 습성이 있다구요!

 

 

 

 

아마르가 우리를 보고 다가오는 순간에

 

 

 

 

 

어디선가 홀연히 불어온 바람이 아마르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빗겨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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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85 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 와일드

                                      ( 셰릴 스트레이드 저 / 나무의 철학 )

 

 

 

 

*    

 

먹고 살 돈도 빠듯했지만 엄마는 말을 사야만 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엄마의 인생을 구원해 준 건 바로 레이디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레이디덕분에 엄마는 아버지를 떠날 수 있었을 뿐아니라 완전히 독립 핳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은 엄마의 종교나 마찬가지였다

 

 

*

 

나는 레이프가 칼을 꺼내들고 붉은 색과 금색이 섞인 레이디의 갈기털을 잘라내는 것을 보았다

" 엄마도 이제 편히 저 세상으로 가실 수 있겠지"

레이프는 그렇게 말하며 마치 이 세상에 우리 남매밖에 없다는 듯 내 눈을 바라보았다

" 인디언들은 그렇게 믿는대. 위대한 전사가 죽으면 타던 말을 죽이고 그렇게 해야 ( 주 : 갈기털을 잘라내야) 저승으로 가는 강을 편하게 건너갈 수 있다고. 그게 존경의 표시라고 했어. 엄마는 이제 저 세상에서도 레이디를 타고 함께 할 수 있을거야"

 나는 엄마가 레이디의 단단한 등에 올라타고 거대한 강을 건너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엄마는 거의 3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우리 곁을 완전히 떠난 것이었다. 나는 레이프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랬다. 내게 빌고싶은 소원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리라. 내가 바라는 건 엄마가 다시 말을 타고 살아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레이디와 함께 저 멀리 떠나는 것이었다.

 

 

 

*

 

나는 더 이상 ~~ 때문에 놀라워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그보다 놀라운 일이 훨씬 더 많았다.

.

.

나는 울고 또 울었다. 행복해서 우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슬퍼서 우는 것도 아니었다.

.

.

내가 울었던 이유는 내 마음이 가득 채워졌기 때문이었다

.

.

나는 들어왔고 나는 떠났다. 내 뒤로는 캘리포니아가 마치 기다란 비단 장막처럼 그렇게 흘러갔다. 

나는 더이상 내가 멍청한 바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대단한 여전사도 아니었다.

내 안의 나는 이제 강하면서도 겸손하며 마음이 하나로 합쳐졌다. 나는 그 사슴처럼 이 세상에서 안전했다.

 

 

 *

 

이제는 더 이상 텅 빈 손을 휘저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고

저 수면 아래를 헤엄치는 물고기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른 모든 사람의 인생처럼 나의 삶도 신비로우면서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고귀한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내 곁에 있는 바로 그것.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 불허의 것인가. 그러니 흘러가는대로,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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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살아 있어!

 

 

 

 진짜 살아 있다구 ~ ~ ~

 

 

 

 

화창한 주말에 칸타와 아마르가 밖에 나왔다. 1주일 전 큰 비가 내린 이후에 운동장이 질퍽거려 나와 놀 수가 없었다. 이날 운동장은 보송보송, 햇빛은 쨍쨍하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날씨였다.

 

 밖에 나온 아이들이 처음엔 눈이 부신지 몇 번 깜박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고 킁킁 땅조사를 시작한다.

 

 

                                     

 

 뒹굴 자리를 고르는 것이다. 그런 후 둘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러덩 눕더니 힘차게 등을 땅에 비벼댔다. 그 모양은 바다에서 막 건져올린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바닥에 던져졌을 때 팔딱팔딱 뛰어오르는 격렬함과도 흡사했다.

 

 

 

 대여섯 번 정도인가. 가려운 곳이 시원해졌는지 드러누운 자세에서 엉덩이로 앉았다가 뒷다리 힘으로 벌떡 일어나는 순서로 몸을 세우더니 꼬리마저도 세웠다. 기분이 붕 떠서 매우 좋아진 거다. 그 다음은 기쁨의 세레모니를 할 차례. 이때 나타나는 발걸음이나 몸의 동작은 승마할 때에 나타나지 않는 자유롭고도 현란한 몸짓이다. 네 다리는 제멋대로 차고,뿌리고 난리가 난다. 우리도 한때는 그랬다. 어렸을 적에 기쁨에 사로잡혔을 때 '오도방정'을 떨며 마음껏 기분을 발산했다.

 

 

 

 

 

 요즈음, 아이들이 마방에서 나와 노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몸짓에서 새로운 언어를 발견한다.

 

 

                 '어? 우리 살아 있네. 살아 있는 거 맞네. 그치그치?'

 

 

  이런 정서적 반응은 어디서 조난을 당하여 구조를 기다리다가 막 구조되었을 때, 혹은 체력을 넘어서는 산행을 하고났을 때 그 상황이 해소되면서 찾아올 법하다. 그런데 칸타와 아마르는 그저 실내공간에 있다가 야외로 나왔다는 일상적인 변화에도 그토록이나 희열에 찼다.

 

 동물들이 대부분 그러한 것 같다. 오래 전에 집에서 키우던 말티즈 종 꼭지는  해가 떠서 식구들이 잠을 깨고 자기와 눈이 마주쳤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아침마다 난리법석을 피웠다.

 

 

 문득 생각해보았다.

매일매일 삶의 의미가 뭔가 하고 골똘히 생각만 하는 나보다는 그저 단순하게 사는 칸타와 아마르가 더 행복한 건 아닐까?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더 행복할 줄을 아는 건 아닐까?'

 

 

 

 행복할 줄 아는 능력에서 더 열등한 나는 아이들의 환희에 찬 몸뚱이와 나 사이에 연결된 투명한 대롱으로 그들이  발산하는 에너지를 흡입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르가 말을 할 줄 안다면

 

"할머니는 말야.내가 행복할 줄 아는 법을 그렇게나 가르쳐줬는데 만날 고민을 싸짊어지고 살아?" 이럴 것 같다.

 

 

 나에게 오래 된 책 한 권이 있다.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대담집을 엮은 <신화의 힘>이란 책인데 1993년에 구입하여 여지껏 소장한 책이다. 최근에 다시 꺼내어 펼쳐보니 군데군데 밑줄과 메모가 많았다.

 

옛 사진집을 들춰보는 기분으로 좀 읽어보니 그 책이 그간 살아온 내 인생에 길잡이가 되어줬구나 싶었다.세계적인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세상을 떠난 후 그를 기리기 위하여 기획된 책인데 대담집이니만큼 조셉 캠벨의 육성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어서 좀 옮겨볼까 한다.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이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예전에 나는 어느 글에선가 우리가 말과 만나고 승마를 하는 것은 '싱싱해지기 위해서' 라고 쓴 적이 있다. 조셉 캠벨이 말한다.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깊고,풍부하고,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는 책의 다른 부분에서 말하길 신화를 '도로표지' 나 '본'이라는 언어에 빗대어 표현한다. 만일 도로에 도로표지가 없다면 차들이 엉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현대인이라면 잘 알 것이다. '본'은 원형이란 언어에 가까울 것 같다.

 

 오래 전에 내가 퀼트조끼를 만드느라 지인이 갖고 있던 옷본책을 본 적이 있다. 셔츠,바지,스커트,원피스 등등 이런 옷들의 원형들이 모여있는 종잇장을 넘기며 신기했다. 길만 나서면 어딜 가나 즐비하게 늘어선 옷가게에 넘쳐나는 수많은 옷들, 그 옷들의 원단,색깔,무늬, 디자인은 모두 달라도 바지면 바지,셔츠면 셔츠일 수밖에 없는 원형이 있다. 그 옷을 만들려면 아무리 유행에 따라 변화를 주더라도 '본'에서 응용되어 파생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천차만별의 인생이 있지만 각각의 안에 깃든 공통점,바로 '본'이 어딘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본'을 조셉 캠벨 같은 신화학자는 신화가 그 '본'이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말은 우리 삶을 싱싱하게 만든다.

신화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에게서 어떤 '본'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의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의문에 따라오는 꼬리처럼 또다른 의문도 떠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순간 요즘 예매율 1위라는 <빅히어로>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주인공 히로가 아이디어가 꽉 막히는 순간에 확 뚫어주던 방법은 바로 '다르게 보기'였다. 익숙한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았을 때 여지껏 보이지 않던 뭔가가 확 보이기 시작했던 거다.

 

 

 

 

말을 다르게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조셉 캠벨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한다.

 

인디언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나무,돌,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나는 말에 관해서라면 그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한다.

다른 존재를 <그대>로 바라보면 그 존재가 가진 신성을 깨닫게 되고 그 신성에서 흘러나오는 생명력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만일 존재를  <그대>가 아니라 <그것>으로 바라보게 되면 비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메리카 신대륙 개척자들이 들소의 가죽을 벗기기 위하여 수십만 마리를 초원에서 학살한 사실이 있다. 들소가 <그것>들이었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만행이었을 것이다.

 

말도 그저 하등한 동물로서 '탈 것'으로 바라본다면 '탈 것'에 불과한 <그것>에서는 샘솟는 생명력 따위가 있을 수 없다.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할 소리가 있다. 말이 내쉬는 푸우푸우 하는 숨소리다. 칸타와 아마르가 환희에 차서 꼬리가 올라갔을 때 그 꼬리의 춤사위에 가락을 맞추는 소리가 확장된 콧구멍으로 울려퍼지는 숨소리.

 

 

 

그 숨소리에서 엄청난 원초적 기운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 뿐일까?

수많은 말 영화에서 말이 등장했을 때 코로 내뿜는 말 숨소리를 음향으로 크게 울리도록 효과를 집어넣는 것에서 거기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보편적 요소가 있지 않나 생각해보았다.

 

 

 

 

위에서 어쩌다 길게 주절주절 늘어놓은 장황한 이야기를 한데 그러모아 집약한다면 조셉 캠벨의 바로, 이 말이다.

 

삶의 황홀!

 

모이어스 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 있다는 것뿐입니다.

너무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그만 가장 중요한 내적 가치,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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