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사물을 새롭게 보는 경험은 경이롭고 행복하다.

말을 키우며 늘 보는 처지라 말이란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의 부분인데 , 카발리아 공연을 보며 말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말이란 스포츠 영역 안에서의 말이고, 평소에는 운동파트너로서의 말이 익숙하다. 이러한 영역 안에서도 말이 지닌 아름다움이나 우아함,역동성은 중요한 가치로 인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가 그라운드가 아니라 예술의 장이라 할 무대 위에 나타나니 색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 말이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 있구나!

하고 경탄에 마지않으며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카발리아 공연에서 만나지 않았나 싶다.

 

 

 

이 공연의 주역은 말이다.

주연배우인 말의 아름다움은 함께 공연에 참가하는 사람과의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비로소 신비롭고도 환상적으로 실체를 드러낸다.

 

 

 

공연을 보면 말과 사람은 오랜 세월 지구별 곳곳에서 깊은 유대를 맺으며 살아왔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이러한 실제적인 삶의 배경을 바탕으로, 기존에 보아왔던 영화나 만화에서 등장했던 구불구불한 갈기를 휘날리며 우아한 걸음걸이로 사람에게 다가오는 환타지를 연출한다.

 

 

막이 오르기 전 무대

 

그러면서도 공연 실제상황에서는 출연하는 말이 아바타가 아니라 실제 존재이므로 간혹 사소한 실수나 말 무리 안에서 멤버간에 호흡을 맞추지 못한 부분도 나타났다. 맨 앞자리에 앉았던 관객의 특권으로 엿볼 수 있었던 부분이었고 이것은 관람의 재미를 더 보탰다. 나도 모르게 '쟤는 몸이 덜 풀렸어!' '쟨 좀 긴장하는군!' 하고 중얼거렸다. 일반 관객이라면 전혀 보일 리가 없는 부분이다.

 

 

 

11월 16일 1시 무렵 카발리아 공연을 보기 위해 잠실종합운동장에 가설한 화이트빅탑씨어터를 찾았다.운동장 주변에 심어진 수령이 오랜 나무들이 아름다운 빛깔의 이파리를 달고 있어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생전 야구라고는 볼 일이 없는 내가 멋진 말 공연을 보려고 그곳에 간 것이다.

 

 

 

티켓은 한 달 전에 예매한 터라 이래저래 할인을 많이 받았다. 그 당시 티켓 가격을 주욱 살펴보다가 내 평생에 언제 이런 공연을 보겠느냐 싶어 가장 좋은 좌석으로 덜컥 구매했는데 공연을 다 보고 나니 매우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되었다.

참으로 귀한 공연이다. 요즘처럼 손가락 끝의 터치만으로 수많은 접속이 이루어지는 디지털 세상에 극장이 통째로 옮겨오다니 놀랍다. 수많은 인력과 말의 시공간적 이동, 물리적 협동으로 비로소  이루어지는 공연이기에 무대에 막이 올라간다는 자체가 경이로움이 아니겠나 싶다.

 

 

 

극장은 화이트 텐트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무게가 50톤이 넘고,운반하려면7대의 트레일러가 필요하며 공연장 설치작업에 총 12일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주인공이라 할 말들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데 그 어려움과 번거로움이 오죽하랴. 말 서너 마리를 싣고 어디 다녀오는데도 신경쓸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닌데 50여 마리의 귀한 배우 말이 한꺼번에 이동하여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리라고 본다.

 

공연 전 무대

 

 

공연 시작 10분 전에 미리 좌석을 찾아 앉았는데 뒤이어 밀고 들어오는 관객의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관객들이 좌석을 찾아가는 동안 바닥은 쿵쿵 울려서 가까운 곳에 공사장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진동과 소음이 무대 뒤에서 대기하는 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텐데 이거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공연장에 들어오기 전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며 화면으로 보이는 말들의 영상을 보고 벽면에 가득한 카발리아의 이미지를 훑다가 남편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아마르 (기르는 애마)도 이런 거 시키면 재미있어 할 것 같아."

 "그러게."

 

망아지가 태어난 순간부터 기른 아마르는 놀이본능이 고성능으로 작동하는 장난꾸러기라 다른 말들과 협동하고,많은 사람을 만나는 상황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을 다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카발리아 공연팀에 소속한 말의 자격은 외모나 기능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하겠다고 생각되었다. 말의 본성은 두려움이 많고 예민하다. 그런 말이 자신의 본성을 내려놓고 강렬한 조명빛과 관객의 시선, 우뢰와 같은 박수, 무대 위의 복잡한 상황을 견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을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까? 내게는 말 배우 하나하나가 모두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놀라운 명마로 보였다.

 

 

 

카발리아 공연은 서커스와 홀스의 만남이다.

발레와 힙합의 만남이나 국악과 재즈의 만남처럼 장르가 다른 분야가 서로 만나 새로움을 창출하는 시도는 이미 있어왔다. 서커스는 오랜 세월 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공연형식이다. 마상곡예는 서커스와 말이 만나는 접점이 될 것 같다. 공중그네타기와 같은 서커스 전문분야와 말 퍼포먼스가 조화와 협동을 이루어내며 한 무대에서 만나니 13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얼마나 짧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카발리아 공연은 말 애호가나 승마인에게 귀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카발리아 말 배우들은 준수한 용모를 자랑하는 다양한 품종으로 이뤄져 있다.

아라비안, 콤토이스, 호주 스톡마,크리올로, 루시타노, 미니어처, 페인트호스, 페르슈롱, 쿼터호스, 스페인순종마 ,웜블러드 이다.

 

사막,초원, 산맥,숲 등등  인간이 말과 함께 누볐던 대자연을 무대배경으로 등장하는 말은 영화나 순정만화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 구불구불한 갈기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관객의 찬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무리를 지은 말이 질주하고, 함께 어울려 털을 긁어주기도 하고 , 사람과 교감을 이루는 모습도 보여준다. 고난도의 마장마술 워킹을 하기도 한다. 이런 장면에서는 말의 우아하고도 기품있는 자태에 홀리듯 정신을 빼앗기게 된다. 무대를 가득 채우는 라이브음악은 신비롭고도 몽환적이다. 가끔 안개가 피어오르고 눈,비가 내리기도 하고 자연속으로 들어가 말을 만나고 오는 체험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양한 말타기의 진수성찬.

보통 승마를 배우면 자세 잡느라 곤욕을 치룬다. 팔,다리, 허리,등,어깨 등 바른 자세 취하는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 마도란 참으로 범접하기 어려운 무게 잡고 법도를 지켜야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카발리아 공연에서 그런 강박관념을 와장창 깨뜨리는 통쾌한 장면이 있었다. '막 타기 천태만상'이라 부제를 붙이면 좋을 법했다. 2부에서 서부스타일로 질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도대체 어떻게 매달렸는지도 자세히 가늠할 길이 없이 그저 말과 사람이 한덩어리로 총알처럼 휙휙 날아다닌다. 그 모습들을 보면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고 그만  '평소 우리가 말 타는 것은 타는 것도 아니여!' 하는 심정이 된다.

 

 

 

 

카발리아의 최고 미덕은 '말이 최고의 주연으로 대접받는다'가 아닐까?

공연장으로 들어서는 길목은 배우들의 사진으로 담벼락을 길게 이어붙이고 있었다. 사람 배우의 사진이 아니라 말 배우의 사진이었다. 꼭 공연장에 한류스타의 사진이 세워져 있는 것 같았다. 사진 속에서  스타의 영화속 이미지처럼 말의 매력이  깃든 표정이 담겨 있었다.

 

 

 

공연의 내용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말들의 역할은 편해 보이는데 사람의 역할은 매우 고달파보였다. 특히나 인간탑쌓기 같은 장면에선 정말 너무 힘들어 보였다. 그에 비해 말들은 사람이 힘겹게 곡예를 하는 동안 일정한 속도로 설렁설렁(?) 구보를 한다거나 떼지어 자유롭게(?) 질주를 한다거나 했다. 앞서 썼다시피 이런 무대에 선다는 자체로 말에게 엄청한 요구를 한 것이지만 그런 말보다도 사람이 훨씬 많이 뛰어다니고 애쓰는 모습이 보여서 결코 말을 혹사시킨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세부적으로도 말을 타고 질주하는 장면이 있으면 다음엔 사람이 땅에서 스스로 질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말이 사람을 태우고 점핑을 하면 또한 사람 혼자 점핑하는 모습이 따랐다. 사람과 말의 하모니가 이루어진 어떤 장면의 엔딩은 사람 배우들이 모두 경외하듯 손을 우러러 말을 떠받들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에서 카발리아 공연철학이 말을 존중하는 바탕위에 서 있다고 보여져서 보기에 좋았다.

 

 

 

 

사방이 말 천지로군! 흐뭇~

 

                                                         쾌적한 관람을 위한 공연 팁!

 

1. 맨 앞자리는 공연 말미에 연못으로 변한 무대에서 말들이 질주할 때 물벼락을 맞게 된다. 대형타올을 줘서 가리면 되지만 부담스러우면 앞자리를 피하면 좋다.

 

2. 앞좌석과 뒷좌석 간격은 매우 좁다. 다리를 꼭 뻗어야 한다면 맨 앞자리가 필수다. 좌석은  플라스틱이라 딱딱하고 차가우니 방석이나 미니담요를 가져가면 도움이 될 것이다.

 

3. 말 배우들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연기에 임하도록 하고, 말의 움직임에 좌우되는 배우들의 안전을 위하여 공연중 휴대폰을 들고 사진이나 동영상을 촬영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어둠 속의 섬광이 말을 자극할 수 있어 본능적으로 돌발 행동이 나올 수 있다. 공연중 촬영자제는 카발리아 관객의 기본 에티켓이다.

 

 

공연이 끝난 후 vip고객 대상으로 제공된 마구간 투어. 관리사는 모두 여자였고 부드럽게 속삭이며 말에게 다가가 머리(갈기)를 땋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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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난다.

 

 

 

 

가을에는 새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풀은 몸에 흐르던 수분을 점차 덜어가면서 몸피를 줄여나간다.

 

 

 

 

몸피를 줄이지 않고 부풀리는 것은  멀리 날아오르려는 꿈을 간직한 씨앗 뿐이다.

 

 

 

 

 

몸피를 줄인 식물에게서 추상화를 본다.

 

 

 

 

사물에서 보이는 부분을 덜어가다 보면 본질만 남게 되고, 마지막으로 남은 형상에서 더 뚜렷하게 솟아오르는 뭔가를 발견한다.

 

 

 

 

그래서 가을이 좋은 모양이다. 사물이 메말라가는 자취를 바라볼 때 마음이 헛헛하지만 그 사물의 본디 모습을 더 가까이 들여다본다는 느낌도 있다.

 

 

 

 

올해 가을빛은 들판에 아름다운 색채를 풀어놓았다. 올 가을은 유난히 그렇게 보인다.

 

 

 

 

가을은 색을 덜어나가는 계절이라 생각해왔고 사실 덜어간다는 것은 맞다. 더 들여다보니 덜어낸 자리에 더 아름다운 빛깔이 깃들었다.

 

 

 

 

그 빛깔은 보통 '내츄럴한 색이야!'라고 흔히들 부르는 베이지,브라운,바이올렛,오렌지,블루,크림 등의 색이다. 이 색깔조차 세심하게 보면 뭐라 형언하기 힘든 오묘하고도 알 수 없는 빛깔을 띄고 있다.

 

 

 

 

위대한 작가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라는 작품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새들이 왜 먼 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 주지 못했다.

 

 

 

 

로맹가리는 세상이나 삶이란 안다고 할 수 있는 영역보다 알 수 없는 영역이 더 많을진대 다 안다고,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의 자기기만을 비판하고 성찰로 이끌어간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통하여 '인간이라는 종의 정체성' 까지 나아갔다. 인간은 무엇인가?

 

 

 

 

들판이 가을로 물들어 가는 동안 말 아마르는 자주  할아버지와 함께 풀을 뜯으러 산책을 나갔다.

 

 

 

 

아마르가 풀을 뜯을 때 하늘에서는 새들이 분주하게 날아다녔다. 때로는 시끄러운 소리까지 내면서 말이다.

 

 

 

 

새들이 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지 알 수는 없다. 아마르도 풀밭에 나와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 할아버지는 아마르가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나에게 말하기로는 정확하게 "아마르가 한 곡조 뽑았어. 그리곤 한 곡조 더 뽑았어. 두 곡조를 뽑더니 더는 안 뽑더라구."

 

 

 

 

그게 무슨 소린지 안다. 나도 그 수상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끄으으으' 하고 들리는 목이나 코 어딘가에서 공기 빠지는 소리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전통민속음악에 구음시나위라는 게 있다. 재즈처럼 다채롭게 이어져나가는 노래같지만  언어 이전의 원초적 발성이라 의미는 깃들어있지 않고 가슴으로 그 느낌을 전달받아야 한다. 그 어떤 성악보다도 가슴을 훑어내리는 느낌을.

아마르의 노래가 그랬다.

 

 

 

 

정황으로 보아 아마르는 마방에 하루 종일 갇혀 있다가 밖에 나와 콧바람을 쏘이니 기분이 좋았다. 여기에 맛난 풀까지 진수성찬처럼 주변에 잔뜩 있으니 더할나위 없이 기분이 좋아서 곡조를 뽑았다 라고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말 어떤 이유에서 아마르가 곡조를 뽑았는 지는 알 수 없다.

 

 

 

가을 초입에 북촌 근처에서 열린 세계작가축제에 다녀온 일이 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작가들이 나와 낭송,토크를 하는 행사였다. 그 자리에 온 청중은 통역기를 하나씩 받았다. 통역기를 귀에 걸고 볼륨을 적당히 맞추면 뒤에 있는 통역부스에서 통역가가 앞에서 말하는 외국작가의 말을 통역한 내용이 들렸다. 듣기가 참으로 불편하고 어색했다. 외국작가는 자신의 모국어 뿐 아니라 표정과 몸짓으로도 의사표현을 했다. 언어도 어조에 다채로운 뉘앙스를 담아 표현했다. 하지만 통역기에서는 건조하고 기계적인 내용만 국어책 읽듯 읊어대니 내 귀에서는 뭔가 호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답답한 나는 문학에서 말하는  '행간과 여백을 읽으라' 는 구절을 떠올리며 온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르가 왜 노래를 불렀는지 진심으로 알 수가 없다.

 

 

 

 

지난 세월 말과 함께 지내는 동안 '종으로서의 말'에 대하여 이해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여름에 땅에서 자란 초목에 물이 오르는 것처럼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가을의 그림자를 밟고서 내 안에 저장된 '앎의 수분'도 비워내려고 한다.

 

 

 

 

삶은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잡았는가 싶었는데 저만치 달아나 있는 무지개 같아 보인다.

 

 

 

 

내가 말에 대하여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앎의 틀 안에 말을 가두어버릴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오만하고 우월해지고야 말 것이다. 그렇게 되어버린 나를 말이 슬픈 눈빛으로 바라볼까봐 두렵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머릿속이 지어낸 말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닌 말이다.

 

 

 

 

앞으로도 나는 말에 대하여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다. 또한 알면 알수록 점점 모르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말보다 우월하지 않다.

 

 

 

  

                                   아마르는 헝크러진 실타래 같은 덤불더미를 찾아가 들추고 헤집어

                                   긴 풀줄기 끄댕겨올려 씹어대는 것을 좋아한다.

                                   반대로 칸타는 덤불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땅바닥에 달라붙은 키작은 풀만 골라먹는다.

 

 

 

 

                                   아마르와 칸타가 입에서 위장으로 풀을 뜯어 날라 가득 채우는 시간에,

                                   나는 머릿속에 가득 채웠던 것들을 덜어낸다.

 

 

 

 

                                   이 가을에

 

 

 

 

                                    아마르는 진정,

 

 

 

 

                                  무엇을 보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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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알리는 전령 코스모스가 승마장 안에도 활짝 피어났다.  지금부터 석 달 정도는 승마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최고의 나날이다.

 

 

 

                

 

 

                                                                          나와 칸타빌레

 

 

 

                                         

                                                                    행복한 그녀와 축복이

 

 

 

                                            

   

                                 아마르는 이모할머니에게 멋진 재킹과 모자(?)를 선물받았다

                

 

                                                               

 

 

 

                                  

                                                     

   초가을의 정취 속에서 말과 더불어 즐기는 유동화 원장님과 미그웨치 아카데미 여러분

 

 

               

 

 

 일요일 오후 4시쯤 마장에 도착했다. 아직 한낮의 열기가 뜨거워서 그 시간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 거다. 마장을 향해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 며칠 전에 새로 산 CD <비긴 어게인> 음악을 들었다. 신나는 리듬이 내 안의 새로운 에너지를 일깨우는 동안 잠시 후에 만날 칸타를 떠올렸다. 칸타가 나를 보고 기뻐하며 어떤 기대에 찬 표정을 지으리라 생각하니 즐거움이 솟아올랐다. 그렇다. 내 승마의 즐거움은 말을 만나러 가는 동안에 이미 생겨나서 팽창되고 탄력이 느껴지는 기분 상태가 된다.

 

 

 

 

 

요즘 내가 승마에 대하여 가지는 가장 커다란 생각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순수한 기쁨' 이라 말하겠다. 곰곰 옛일을 떠올려보아도 내가 애초에 승마를 시작한 까닭이 말에게서 기쁨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때묻지 않았던 기쁨은 대략 3년이 지날 무렵엔 매우 작아져 있었고 , 나머지는 승마로 인해 겪어야 하는 일에서 생겨난 온갖 문제에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는 출간한 에세이집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에세이집을 세상에 선보이고 난 후 나에게 그때 그 시절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마음의 창이 생겨났다. 말과 관련된 구조적인 문제들이야 예나 지금이나 큰 틀에서는 별반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현재도 말과 관련하여 얼마든지 스트레스 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는 점에선 변함이 없다.

 

 말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대면했을 때 매력을 느끼게 하고 기쁨을 주는 존재이다. 그러나 말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만나고 있는지 조금만 돌아보면 그 기쁨에서 도자기의 미세한 금과도 같은 균열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만나는 말은 '가두어진 말'이다. 말이 살아가는 공간은 마방과 마장 전체 팬스 안이 거의 전부이다. 말이 마방 밖을 돌아다니는 자유라도 얻으려면 대부분 등에 안장을 얹고 사람을 태운 후라야 가능하다. 또한 우리 승마계가 일반적으로 채택한 라이딩 방식은 영국식으로, 기본적으로 굴레 안에 말을 가둔 상태에서 가두어진 에너지를 활용하여 말의 신체적 표현을 도모하는 활동이다.

 

 

 

 

 

    그러한 모습의 말을 바라볼 때 우리들 역시 사회적으로 관습적으로 '가두어진' 존재이기에, 자신이 갖고 있는 부자유스러움으로 인하여 말이 갖고 있는 그것을 알아볼 수밖에 없다. 말은 가두어짐으로써 억압된 자유로움을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행동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그럴 때 자유롭고도 기쁘고자 하는 사람의 의도에 제동을 걸게 되고 ,사람과 말 사이에 어떤 어긋남과 거리감이 자리잡는다.

 

 그렇다고 하여 말이 "나는 갇혀 살기 때문에 불행해요." 라고만 말하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직장에 매여서, 좁은 집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오롯이 그것 때문에 불행할 수는 없듯이 말이다. 칸타와 아마르를 하루 정도 마방에 두었다가 밖에 나가자 하면 무척 좋아한다. 밖에 막 방목되었을 때 깡충 뛰어오르거나 머리를 흔드는 식으로 기쁨의 표현을 한다. 그렇게 기분 좋아라 놀다가도 칸타는 1시간, 아마르는 3시간 정도 지났을 때 마방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또 기승운동이 끝나고 마무리를 하고서 마방에 들여보내면 편안해한다. 이럴 때 나는 어디 좋은 여행지 갔다가도 집에 돌아왔을 때 안도감과 행복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칸타와 아마르가 적당히 놀다가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 하루 종일 밖에서 놀고 싶어한다면 그렇게 해줄 수 없는 나는 엄청난 고민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방에서 살아가는 말에게도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 마방의 말에게 가장 큰 문제라면 '심심함'일 것이다. 현대인의 가장 큰 고민도 그것이다. 내가 겪은 바로는 말들이 이럴 때 아주 좋아라 한다. 사람도 그렇겠지만 일단 마방 앞으로 사람들이 많이 왔다갔다 해서 볼거리가 많아야 한다. 하다못해 말 그루밍해주는 모습 구경하는 것도 아주 좋아한다. 외부에서 처음 들어온 말은 내가 칸타나 아마르에게 다정하게 그루밍하는 모습을 보고  "세상에는 저런 모습도 다 있구나."하고 놀라워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럴 땐 새로 온 말이 그간 살아왔을 모습이 가늠되어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슬픔은 말과 지내는 동안 늘 따라다니는 그림자와도 같은 감정이다.

 

 말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으면 듣기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종종 마방 앞에 플라스틱 의자를 갖다두고 지인과 앉아 때로는 차까지 마셔가며 대화를 나누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 뒤통수가 간지럽다 싶어 돌아보면 어김없이 말들이 쳐다보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방의 모든 말들이 일제히 귀를 쫑긋 하고서 대화를  재미나게 경청하기 일쑤다. 상상력이(?) 풍부한 어떤 말은 아예 넋나간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런 표정을 보면 내 화술이 그렇게 뛰어난가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다. 가끔 색다른 간식을 떡 돌리듯이 조금씩 나누어주면 희열에 차서 마방 전체가 난리가 난다. 이밖에도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말들이 일상에서 누리는 소소한 기쁨은 참으로 많다. 이조차 누리지 못하고 사는 승용마도 많겠지만 중요한 것은 말을 행복하게 해주는 방법이 결코 거창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말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승마를 하면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기쁨도 참으로 많다. 며칠 전에 칸타에게 치장(?)을 해주고 실내마장에 들어갔다. 그때 마침 갤러리석의 여자분 하나가 "어유, 아마르 굉장해요." 하며 감탄을 하고 난리가 났다. 순간 나는 아마르가 무슨 마장마술 동작이라도 신통하게 구사해서 감탄을 자아낸 건가 하고 쉽게 오해했다. 하지만 1분도 지나지 않아 알게 된 진실은 아마르가 운동하다 똥을 쌌는데 엄청나게  많이 싸서 감탄을 자아낸 거였다. 곧이어 실내마장 안에 서 계시던 회원이 통을 들고가 똥을 치우고는 "통이 꽉 찼어요." 라는 멘트를 날려서 주변은 삽시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만일 그 순간에 거기 있었던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갇혀 소소한 웃음거리에 반응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런 분위기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마음의 상태가 중요하다.

 

 

 

 

 영어에서 문어와 낙지는 모두 octopus라고 한다. 그래서 영어권 사람들은 문어와 낙지맛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의식적인 개념이 구분되어 있지 않으니 미각이라는 감성마저도 영향을 받은 탓이다. 승마라는 행위에서도 그 행위의 개념을 무엇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가 느끼며 얻을 수 있는 것이 달라진다고 본다. 내가 승마를 시작한 이래 참 이상하다고 생각한 일이 있다. 승마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일수록 웃는 모습이 적다는 거였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말을 대하거나 타면서 매우 심각한 사람이 승마선수나 코치,교관인 경우가 많고 마장운영자도 심각함에서 뒤지지 않았다. 내가 볼 때 억 소리나는 말을 몇 필이나, 하루 종일, 그것도 매일 탄다면 입이 귀에 걸려 다물어지지 않아야 할 텐데 오히려 반대였다. 또 대회에 참가하거나 자격증을 얻기 위해 말을 타는 경우에도 그랬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중고등학생 시절을 엘리트 승마선수로 경력을 쌓아왔던 청소년들이 대학에 가서 말을 타지 않을 때다. 열거한 경우에서 공통점을 모아본다면 '목적지향적'이나 '성과'를 추구하는 개념을 갖고서 승마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승마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명백한 목적과 성과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과 함께 '즐긴다'라는 개념이 양쪽 날개를 이루어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거다. 더 나은 성취를 위해서도 '즐긴다'는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오히려 그 어떤 '목적'이나 '성과'도 염두에 두지 않은 체험승마인이나 어쩌다 짜투리시간을 내어 말 등에 오른 이들에게서 참을 수 없이 벙글어지는 순수한 웃음을 발견하기가 쉽다. 또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다. 클럽말 탈 때는 열심히 타다가 막상 자마가 생기니 말을 잘 안 타더라,하는 소리다. 물론 타는 횟수나 기승시간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얼마나 재미있게 즐겼느냐?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나 자신을 돌아보니 반성할 점이 많다. 누가 보면 부부가 함께 타는 말이 두 필씩이나 있으니 원없이 말을 타겠구나 부러워할 처지다. 그런데도 나 자신은 말 관리나 관계자들과의 관계 등 이런저런 문제를 시시콜콜 고민하면서 말을 타는 순수한 기쁨을 스스로 훼손해오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요즘 들어서 나는 자신에게 늘 주문을 걸고 있다. "나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 말을 타는 거야." 주문 탓인지 온갖 잡스런 생각에 골몰하지 않고 칸타나 아마르가 주는 기쁨을 고스란히 전달받고 있다. 삶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지리멸렬함 투성이지만 그 안에 섞여있는 보석같은 기쁨을 주워서 놓치지 않겠다고 마음 먹으면 분명 기쁨의 총량은 늘어나게 마련이다.

 

 어제 오후 나는 칸타 등에 올라앉아 있었다. 말 등에서 주변 풍경을 내려다보니(?) 코스모스는 한들한들, 배추의 푸른잎은 흐드러지고 ,논은 노랗게 물들었고, 하늘은 파란 가운데 떠가는 구름 모양이 아기자기 다채로웠다. 순간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나니, 내가 이 순간 무탈하고 건강하여 칸타 등에 앉아 가을의 한가운데를 걸어다니는구나 싶어서,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가을을 좋아하므로 가을 내내 나는, 말과 더불어 즐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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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월에, 졸음에 겨운 아마르)

 

 지난 7월 31일에 아마르는 6세 생일을 맞았다. 엄마 뱃속에서 세상빛 아래로 나온지 만 6년이 되었다. 5세까지는 지인과 함께 생일축하를 했었지만 올해는 하지 않았다.작년까지는 한 해 한 해 생일을 맞을 때마다 ,'또 무사히 생일을 맞았구나' 하는 심정과, '아직도 말은 커가는 중'이라는 보호자의 심리적 태도에서 놓여나지 못했었다. 그러나 올해 생일에는 '이제 다 컸구나' 하는 안도감과 '어디 내놔도 말구실은 하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 마방의 여느 말들이 생일축하를 받지 않는 것처럼 그냥 생일을 지나치기로 해서 그렇게 됐다.

 

 김애란 작가가 <두근두근 내 인생>이란 책에서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쓴 구절이 있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그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누구도 본인의 어린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니까, 특히 서너살 이전의 경험은 온전히 복원될 수 없는 거니까,자식을 통해 그걸 보는 거다. 그 시간을 다시 겪는 거다. 아,내가 젖을 물었구나. 아,나는 이맘때 목을 가눴구나. 아,내가 저런 눈으로 엄마를 봤구나,하고.자기가 보지 못한 자기를 다시 보는 것.부모가 됨으로써 한번 더 자식이 되는 것.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윗 구절을 읽고서 백 배 공감할 수 있었는데, 아이를 낳아 길러본 부모 입장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아마르는 내 배를 아파가며  낳은 생물학적 자식은  아니다. 아마르의 생물학적 엄마는 칸타이지만 칸타가 제 새끼에게 석 달 젖을 먹인 것 외에는 양육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건 없어서 그 책임은 고스란히 나와 남편에게 떠안겨졌다.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화자의 부모는 십대여서 아이를 낳은 후 자신들이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깨달았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 아이를 안는 법부터 해서 -  그 부분도 읽으며 웃음이 나왔다. 우리 부부 역시 난데없이 출연한 망아지에게 뭘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 아는 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부모가 되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서너살 이전의 삶을 ' 아이 기르기 '를 통해  다시 살 수 있는 까닭은 사랑의 힘이다.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의 마음은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아이가 매개가 되어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전의 삶과는 결코 다른  감각들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타인이 되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연인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 순간 이 상황을 어떻게 느낄까에 자꾸 빠져드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상태 아니겠는가.

 

 망아지는 시시각각 자라면서 나에게 새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망아지가 자신을 둘러싼 별별 시시콜콜한 사물이나 상황에 대하여 호기심을 발휘하여 살피고 놀라워 달음질칠 때 ,순수한 감각이 닫히지 않고 활짝 열려있는 상태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 내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망아지가 환희에 솟구쳐오르고,슬플 때 눈물을 떨구고,공포에 사로잡히고,화를 내는 다채로운 감정의 변주를 드러낼 때 ,순수한 감정이 억압받지 않고 물 흐르듯 흐르는 상태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 망아지를 스승삼아 바라보았을 때 ,망아지는 나로 하여금 사십여년 세상 살아오는 동안 닫히고,막혀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했다. 그 결과 자연스러운 본성을 회복해나간 시간이 아마르를 키워낸 시간이 아닐까 한다.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자꾸 '아마르 키워낸 일'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 ,잃어버린 나를 서서히 되찾아가는 과정이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자연과 분리된 사람이 ,자연과 연결되는 조짐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함이 아닌 것 같다. 승마를 하는 한 여성이 들려준 말이다. 평소에도 무척 깔끔한 그녀가 여름휴가지에서 변한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식사를 하는데 파리가 음식주변에 날아다녔다. 파리를 본 아이가 기겁을 하며 "으악,파리다!" 하고 난리를 쳤다. 그녀는 "뭘 그래? 그냥 휘휘 쫒으면 되지." 하며 대충 손으로 휘저으며 아이에게 식사를 하라고 했단다. 옛날 같으면 엄두도 못낼 일이라고 했다. 파리는 자연스러운 생태계의 일부라기보다는 존재하지 말아야할 공공의 적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파리도,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도, 마분도 자연스러운 존재로 느끼고 있으며 승마를 마치고 한 줄기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씻는 달콤함을 즐기게 되었다. 말의 시선을 따라다니면 풀줄기의 아름다움과 꽃향기, 새소리의 고혹스러움에 매료되는 감각의 풍요로움 뒤에 충만한 감정도 느끼게 된다.

 

 8월에 비가 제법 많이 내렸다. 흐린 날이 대부분이다. 요사이 한강을 따라 차를 타고 지나가다보면 시야가 확 트여서 흐린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먼데까지 볼 수가 있다. 세상이 마치 회화로 변한 것처럼 보인다. 예민한 감각으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볼 때 내 안에 말이 들어앉아서 ,말의 눈으로,오감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구나 싶어진다. 그럴 때 도시를 누비며 걸어다니는 나는 그 세상이 삭막하고 황폐할지라도 얼마든지 헤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힘을 내면에서 느낀다.

 

 엊그제 아마르 등짝에 앉아봤다.(평소엔 거의 남편 차지임) 평수가 너르고 안정감이 느껴졌다. 탄성좋은 스프링 침대에 걸터앉은 느낌과 비슷하달까. 든든한 것이, 말 등짝이 내 엉덩이에게 말 걸어왔다.' 언제든 여기 앉아서 세상 살 힘을 충전해가세요! ' 참으로 듬직했다. 이제 내 나이는 부모가 등을 토닥여줄 나이가 아니다. 외로울 때가 많다. 이때 앉아 쉴 편한 말 등짝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떠올려보았다. 아마르도 망아지 시절에 보채며 뭘 요구할 때에 기꺼이 들어주고 안아주던 나에게 든든함을 느낀 적이 있었겠지.

 

 6세 아마르 카테고리를 열었다. 앞으로 이 카테고리에 어떤 인생의 그림들이 담길지 그 훈훈한 광경을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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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들 지내고 계신지요? 저도 잘 지냅니다. 마지막으로 글을 올린 지가 한 달이 넘었습니다. 할망이 이토록 오래 글을 올리지 않은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지인들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더군요. 어디가 아픈지, 무슨 일 있는지, 어디 먼 곳에 여행이라도 갔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제가 해외 오지에 여행을 가서 인터넷이 터지지 않아 글을 올릴 수 없었다는 거였죠. ㅋㅋ~  제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고요,  단지 좀 쉬어가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 할 수 있겠네요. 애마들과 보내는 시간은 여전히 의미 있고 행복하답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기를 ,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얼마 전  남편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차창 밖을 무심히 바라보는데 현수막에 적힌 '애마'라는 단어가 확 눈에 들어오더군요. 전체문구는 <당신의 애마를 성심껏 돌봐드립니다>. 문구를 봐선 승마클럽에서 내건 자마회원 유치 광고인 것 같으나 실제로는 차 정비업소가 내건 문구였어요. 사회적인 통념으로 '마이카' 와 '애마'가 의미의 동일시를 이루고 있는 셈이죠. 뭐 탄다는 점에선 그렇습니다. 일전에 클럽을 방문한 어떤 분이 이런 저런 말끝에 "저 사모님은 말이 두 대래요." 라고 일행에게 하는 말을 듣고 웃었지요. 겉으로 웃기는 했으나 그런 말을 들으면 언제나 속으로는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어떻게 기계와 생명을 지닌 존재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다는 말인가. 말을 '한 대' '두 대'로 여기는 사람은 필시 말도 차처럼 감정도 없고, 가격에 따른 기능이 있으며, 쓰다가 휙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지요. 그런 사람은 말을 타는 '도구'쯤으로 여긴다는 반발감이 제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던 겁니다. 언제부턴가 '말 = 도구'의 개념에 거부감을 가졌지요. 하지만 '도구'라는 말을 더욱 넓은 의미로 확장해 본다면 꼭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계기가 생겼어요.

 

 

 

인기 티브이 프로그램인 <무르팍도사>에 소개된 유명 첼리스트 장한나 씨의 일화입니다. 장한나 씨는 한국을 빛낸 세계적인 음악가 중에 한 분이죠.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다 보니 그녀는 비행기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고 합니다. 바로 그 시간 속에 우리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장한나 씨는 꼭 비행기 티켓을 두 장 산다고 합니다. 한 장은 당연히 본인이고, 나머지 한 장은 누구 것일까요? 바로 '첼로'의 자리였던 겁니다. 비행기 좌석에 장한나 씨와 나란히 앉은 첼로 장면을 상상하니 , 첼로에서 인격이 느껴지고 존재감이 증폭됩니다. 사실 해외여행 갈 적에 여행가방을 수하물 맡기는 컨베이어벨트에 올려 떠나보내는 심정은 어찌할 수 없이 애잔해지더군요. 나의 체온과 체취가 아직도 남은 채로 어딘지 모를 미궁으로 실려가는 모습이 애처러워서지요. 찾을 때도 마찬가지 심정입니다.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아무렇게나 내던져져서 벨트에 실려 이동하는 짐들을 보면 빨리 내 가방을 찾아서 구출해야지 하는 심정에 가까운 마음이 됩니다. 예전에 한 번은 지인들과 비행기 타고 승마여행 가는데 안장을 가지고 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결론은 '가지고 가지 말자'로 났지요. 소중한 안장이 수하물로 당할 '취급'을 생각하니 차마 그리 할 수는 없다는 쪽으로 손을 들어줬던 겁니다. 개인 안장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장한나 씨에게 첼로는 비교불가능한 '소중함' 그 자체일 테지요.

첼리스트의 영혼의 울림을 기교적으로 완성해주는 실체는 바로 악기, 첼로이니까요. 그래서인가 유명한 음악가가 연주하는 클래식 악기는 뭔가 영혼이 깃들어있는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바이올린이나 첼로가 그렇습니다. 연주할 때 모습이 머리를 악기쪽으로 기대고 감싸안은 모습이어서 그런 느낌이 듭니다. 특히나 첼로는 연인과의 포옹을 연상케 합니다. 우아함, 격정, 떨림,부드러움의 혼돈에 서로의 몸을 내맡긴 연인들 말입니다. 첼리스트의 역량은 당연한 얘기지만 악기를 다루는 그의 손놀림이 어땠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첼로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의 떨림' 그게 다입니다. 음악가가 발휘하는 예술적 역량은 '도구'인 첼로라는 악기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승마인이 가진 말을 다루는 역량은 그가 타는 '말'에서 구현됩니다. 승마인 사이에서 승마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일컬을 때 관용구로 '저 사람 말 참 잘 탄다'라는 말을 씁니다. 제 귀에는 '잘 탄다'라는 말이 '악기를 잘 탄다'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들리기도 해요. 흔히 악기는 '탄다'라고도 표현하니까요. 승마경기에서 점수는 말에게 주어지는 것이니까 '말'은 '악기'와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제가 이전까지 거부감을 가졌던 '도구로서의 말'도 의미가 성립한다고 하겠지요. 장한나 씨가 자신의 첼로에게 한 장의 비행기 티켓을 제공하는 것은 그 악기가 낼 수 있는 소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프로 뮤지션의 마인드입니다. 말을 타는 사람 역시 자기 말이 최선의 기량을 펼쳐보이도록 아끼고 돌봐주어야 하는 마인드가 겸비되어야겠지요.

 

어제 늦은 오후에 승마장에 가서 칸타를 타고 목욕시키니 6시가 되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가며 뿌리는 비가 사나워서인지 승마장에는 회원이 없었는데 승마선수인 젊은이 한 명만이 말을 운동시키고  목욕시키더군요.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말과 인연을 맺고 뼛속까지 엘리트코스를 밟아온 그 젊은이가 말 목욕시키는 광경을 몇 번 보았는데 역시 프로스러운 면모였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샴푸를 할 때 보통 말 머리는 남기고 샴푸하는데 이 친구는 말의 온 얼굴에 샴푸범벅을 했고 말도 오랜 세월 익숙해졌는지 거품속에서 눈만 껌뻑껌뻑하며 얌전했습니다. 한바탕 '비누거품난리'가 난 후에 닦을 때도 온 정성을 다하는 바람에 관리인이 지나가다가 '너는 말 목욕 한 번 시키는데  무슨 수건을 그리도 많이 갖다 쓰느냐' 고 폭풍잔소리를 퍼붓기도 하더군요. 어쨌든 보기좋은 광경임에 틀림없어요. 이 젊은이 뿐만 아니라 기승 전후로 말 돌보기에 정성을 다하는 승마인의 모습은 참으로 멋져 보입니다. (특히 남자는 더더욱! ) 그 모습은 말과 함께 파트너십을 이루어 최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겠다는 (꼭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의도에서 비롯되는 행위니까요.

 

첼로와 애마가 닮았다?

 

각각 악기와 동물이지만 다루는 사람의 기량을 눈앞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같다 하겠지요. 뿐만 아니라 형태에서도 닮은꼴이라는 점을 아시는지. 말들을 방목시켜놓고 건물 2층에 올라가서 구경하다가 발견했던 사실이지요. 위에서 말을 내려다 보면 머리로부터 꼬리에 이르는 몸통의 윤곽이 꼭 첼로를 닮았지요. 색깔까지도 어쩜 그리도 닮았을까요?

 

장한나 씨가 부럽습니다. 왜냐고요?

완소 첼로 군과 전 세계 어디든 함께 갈 수 있잖아요.

저도 애마에게 비행기 티켓 사주고 싶다고요 잉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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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승마 - 굿호스맨쉽 ( 지은 이 : 케이트 박 / 펴낸 곳 : 분홍개구리 )

 

 

 

     저자 케이트 박 님과 장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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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ressionism manet.jpg 

 

상단 첫번째 그림이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1863,캔버스에 유채

 

 

 

  오후 6시 무렵이 되니 햇살이 부드럽게 대지를 어루만진다. 아이들과 남편과 풀밭에 나왔다. 말과 인연을 맺은 후로 우리 아이들이 누리는 최고의 풀밭이다.  승마클럽 부지 옆에 딸린 땅을 클럽측에서 임대했는데 가운데는 밭, 가장자리는 승마트랙으로 용도가 결정됐다.

 승마트랙은 곧 풀들에게 점령당했다. 풀의 영토, 날벌레와 기어다니는 벌레가 신도시를 개척했다며 살아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은 지극히 문명인스러운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풀밭에 나와 칸타와 아마르가 풀을 뜯는 모습을 무심히 보다가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벌써 십 년이나 말과 풀밭에 산책 다녔는데 왜 이제서야 이런 생각이 떠올랐나 의아할 정도다. 말과 사람이 함께 풀밭에 나와 즐기는 모습에 , 그 유명한 명화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가 겹쳐졌다. 

  학창시절, 미술책에 나와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림이다. 풀밭에서 신사 두 명이 나오고, 그보다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구도의 핵심은 알몸의 여인이다. 이 그림이 전시되었을 때 당시 사회에 일파만파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 전까지는 여신의 누드는 그렸어도 사람의 누드는 그리지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누드여인이 당돌하게도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거리낌도 없이 관객을 당당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불붙은 듯한 충격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거기에는 탈의와 착의, 자연과 문명, 남자와 여자라는 대립항이 들어 있다.

  이 그림이 발표된 시기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중심의 세계관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빛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던진 여인의 시선은 강렬했기에  ,이 그림은 근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미술사에 새겨지게 되었다.

 

 

 

  풀밭에서 우리는 사람과 동물, 자연의 시간에 머무는 존재와 문명의 시간에 머무는 존재, 탈의와 착의 상태로서 구분지어진다. 우리는 이 순간을 함께 머무는 상태다. 사람이 초식동물을 기르기 시작한 이래 모든 시간을 망라하여 , 사람과 초식동물은 함께  풀밭에 머물러왔다. 풀밭에 삶이 있었다. 그 모습이야말로 <풀밭위의 점심식사> 오리지널 이미지가 아닌가?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에서 '옷을 입었다' 와 '옷을 벗었다' 는 당대성을 표출하는 첨예한 문제였다. 근대 이전은 신의 세계다. 종교야말로 절대의 가치를 담고 있었고, 그 다음으로  종교와 맞잡은 귀족들의 계급이 뒤를 이었다. 자연이나 인간 자체는 하잘 것 없었다. 종교지도자나 귀족은 곧 절대권력이었다. 권력은 속성상 권위를 내세우기 마련이다.  도덕이나 관습,규율을 앞세울 수밖에 없다. 옷은 그러한 장치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도구이다. '옷을 벗어던지다'는 것은 도덕,관습,규율을 깨뜨린다는 혁명적 사고와 다를 바 없다. 그런 시대상황에서  마네의 그림이 센세이션의 다이너마이트 작용을 했다. 당시의 기득권층은 그때껏 가려왔던 종교나 권력의 허울이 찬란한 빛을 받고 색바래버릴까봐  두려워하여, 여신의 누드는 봐도 여인의 누드는 불가하다며 찌질한 아우성을 징징거리지 않았겠나.

 

 

 풀밭에서 식사(?)하는 말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편안함이 내몸의 혈관을 고루 돌고 있는 것만 같다.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테헤란로 거리를 바삐 걸어가는 신사가 있다. 신사복 정장에 안에는 빳빳한 와이셔츠와 넥타이, 발에는 딱딱한 구두를 신었다. 보기만 해도 답답하고 내 목을 옥죄는 것 같다.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삶은 알몸으로 태어난 이후로 내내 부자연스럽다. 옷을 벗지 않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학교에 가면 교복, 군대에 가면 군복, 직장에 가면 유니폼, 뿐만 아니라 운동할 때, 데이트할 때, 비지니스 계약할 때 입는 옷이 다르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보이고 싶은 모습에 따라 옷을 골라 입는다. 그러다 보니 상대가 옷 입은 모습이 그의 본모습이라 착각하고, 스스로도 특정한 옷입은 자신이 진정한 자기자신이라  믿고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옷 벗은 상대나 자신을 대면할 때 큰 혼란에 휩싸이고 급기야 지독한 불안에 시달리기도 한다. 연애할 때 장밋빛 환상에 사로잡혔던 남녀가 결혼식 끝나고 석달 열흘간 생애 최고의 전쟁에 휩싸이는 것도 옷 입을 때는 몰랐던 낯선 타자와 대면하기 때문이다. 엄마 그 자체에 충실하게 살아온 중년여인이 자식이 떠나고 빈둥지 증후군에 빠지고 평생 몸담던 직장에서 퇴직한 가장이 인생의 허무를 느끼는 것도 옷입은 자신 외에는 대면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르가 풀밭에서 알몸인 채로 식사를 한다. 자연스럽다. 음식은 복잡한 요리과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뭘 먹나 메뉴를 고민할 필요도 없다. 풀밭에 나있는 놈들 중에서 입맛 땡기는 대로 뜯어먹으면 된다. 아마르가 풀 사이에 당근풀이 숨어 있어서 고몸을 쏙 뽑아내면 주홍빛 당근이 딸려올라오는 것을 알았다. 녀석의 입에 손가락만한 당근이 대롱거리다가 쏙 딸려들어가는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칸타의 기호는 당근보다 그냥 긴 풀이다. 입에 당근 이파리가 걸리면 퉤 뱉고서 딴걸 찾는다.

 

 

 

 

  내가 말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아무런 가식도 위선도 체면도 필요없이 그저 자연과 하나가 되어 머무를 수 있어서다. 정치고, 종교고, 가치관이고, 신념이고 풀밭에서는 가녀린 풀대궁 하나만한  가치도 없다.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를 재음미해보니, 내가 말을 따라서 풀밭에 풀시중 나온 일이 매우 혁명적인 행위로 여겨진다. 근대 이후로 종교나 계급사회가 타파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세상은 어떤 권력이나 세력이 암암리에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니체가 '신은 죽었다' 선언하고 성난 프랑스 시민들이 왕을 단두대에서 처형한 후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여전히 힘들다. 가장 힘든 것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일 것이다. 옛날에야 신의 뜻대로, 왕의 뜻대로 살면 되었지만 지금은 내뜻대로 살라 한다. 민주주의 자유국가 시민이므로 그리 살라 한다. 내가 고민해서 결정해야 하는 어려움은 고단한 삶을 불러온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가 좋다하는 대세의 물결을 따르는 게 차라리 편하다. 오늘날 대중문화, 소비문화의 발달은 이 지점에서 탄생하고 번성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내 욕망이나 감각이 무엇인지 외면하고 살게 되기도 한다.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지...

 

 

 

 

  강렬한 파문을 일으켰던 마네의  <풀밭~ > 그림 이후로 수많은 유사작품이 그려졌다. 조르지오네, 티치아노, 피카소, 존 드안드레아 같은 화가가 그들이다. 마네 작품도 사실 이전에 원본이 있었다고 한다. 16세기 화가인 마르칸티오니 라이몬디의 <파리스의 심판>에는 서로 분쟁하는 여신들 틈바구니에서 그들의 일일랑 무슨 상관이냐는 듯 태평하게 대화하는 바다의 신들이 풀밭위의 점심식사에 나오는 구도와 자세로 나온다. 역사가 유구한 그림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사실 우리들은 모두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를 동경하고 추종하는지도 모른다. 아웃도어 산업의 발달이 그 증거다. 핫트랜드인 캠핑이야말로 풀밭에서 밥 한끼 먹어보겠다는 열망 아니겠는가. 그 열망을 충족하려고 막히는 도로를 기어기어 다녀오는 일도 불사한다. 넥타이와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박한 열망이 현실에서는 힘겹게 이루어야만 하기에 눈물겹기조차 하다. 이래저래 살기가 힘들다. 일하랴, 쉬랴.

 

 

 

 

  말과 지내기 시작한 후로 나에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비행기를 탈지언정 절대 장거리 드라이빙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거다. 그 욕망을 잠재우는데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 진정한 오리지날 <말과 풀밭위의 점심식사>가 한몫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 아이들과 풀밭에 나갈 때 망사마스크를 씌워주는 것은 ,실제적 이유야 날벌레를 차단하려는 거지만 거기에 의미 하나를 덧씌워보자면 '내가 속한 문명을 존중한다.' 이다.

 

 

 

 

 문명과 자연의 평화로운 공존이야말로 이 세계가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 생각을 구현하기 위해 풀밭 위의 칸타와 할망은 보랏빛으로 소품과 의상을 '깔맞춤' 했나?

 

이 글은

말 아이들에게 최고의 만찬을 선사한

풀밭에게 경의를 표하는 '풀밭예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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