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마를 탄 엄마(로라 던 ,분)를 딸 셰릴(리즈 위더스푼 ,분)이 끌고 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일요일에 영화 <와일드>를 보았다. 상영관이 적어서 수소문한 끝에 이웃 시로 넘어가서 보아야만 했다. 그런 수고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영화는 내게 감동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안겨준 말horse이 나왔기 때문에 나로선 덤으로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가난했지만 사랑으로 충만했던 가족.셰릴,남동생,엄마

 

 

<와일드>라는 영화는 2012년에 출간되어 화제를 모은 셰릴 스트레이드의 실제 체험담이 원작이다. 이 원작을 비행기 타고 가다가 읽고 단숨에 사로잡힌 헐리웃 여배우 리즈 위더스푼이 판권을 사들여 제작,주연을 맡았다. 감독은 우리에게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으로 알려진 장 자크 발레.

 

영화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어려서 알콜중독 어버지의 폭력에 견디다못해 도망쳐나온 어머니,남동생과 살아온 셰릴은 세계의 전부와도 같았던 엄마가 척추종양으로 죽은 후 방황하다가 7년의 결혼생활에도 종지부를 찍고서 극한의 도보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바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이 트레일은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4285 킬로미터에 이르는 구간을 일컫는다.

이 구간을 완주하는데 대략 152일이 걸리며, 걷는 동안에 인간이 만날 수 있는 모든 자연환경을 체험하게 된다. 그렇기에 극한의 도보여행코스라 할만하고 '악마의 코스'라고도 불리운다. 여행자는 트레일을 걷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에 절대 고독의 공간에 머무르게 된다.

 

듣기만 해도 '나도 해볼까?'라는 엄두는 커녕 누가 돈주고 가래도 손사래를 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셰릴 스트레이드는 왜 여자의 몸으로 빈몸도 아닌 30킬로가 넘는 몬스터라 불리는 배낭을 매고 여정을 떠나야만 했을까? 삶이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사람이 그런 일을 결심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고행으로 자신을 내모는 의지는 감당할 수 없는 과거의 상처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엄마가 셰릴 삶의 무게중심이었고,안전하고 편안한 세계였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따뜻한 사랑으로 넘치는 엄마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살아갈 만했다. 그런 엄마가 세상을 떠나자 셰릴에게는 세상이 무너져버린 거나 마찬가지다. 무너진 세계속에서 셰릴의 삶은 방치되고,꼬이고,망가져버렸다. 하지만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엄마가 자랑스러워하던 딸'로 돌아가고픈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평생 사랑으로 맺어져있던 엄마는 저 세상으로 갔어도 딸의 내면에서 한줄기 빛으로 살아나 '아름다움의 길'이라 일컫는 밝은 삶으로 이끈다. 셰릴은 그러한 길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 길로 나아가고자 할 때 '내 삶의 상처'인 엄마를 잘 떠나보내지 않는다면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셰릴의 고행스러운 트레일 여정은 엄마를 애도하는 여행이자, 참다운 나를 찾아나서는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PCT)을 걷는 셰릴

 

 영화를 보면서 육체적 고통과 길에서 마주하는 풍경 안에 되살아나는 과거의 상처로 아파하는 셰릴에게 감정이입하며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과거에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 해 전 애마 바람이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슬픔을 맘껏 쏟아낼 수 없는 처지를 더는 견디지 못하고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그때 걸을 수 있었던 길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웠던가!

  인생을 살다가 몇 번 만나지 않을 커다란 상실감을 경험하게 된 건데, 그 상실감을 도화선으로 해서 과거의 모든 상처가 송두리째 올라오는 경험을 한 것 같다. 인생의 중간정산이라고나 할까. 걸었던 모든 길에서 나의 해묵은 상처와 조우하고 목놓아 울고 난 후 돌아와서는 인생이 리셋되어서 정서적으로 '초기화'된 느낌이랄까 그런 상태가 되어 여지껏 잘 살아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영화는 물론 주인공인 셰릴 스트레이드의 삶에 맞추어져 있지만 내가 눈여겨본 부분은 엄마의 삶이다. 영화 속에서 엄마는 45세까지 살았던 걸로 나온다. 항상 밝은 표정으로 인생을 긍정하며 늦깍이 학생으로 공부하던 모습의 엄마는 ,결코 팔자가 좋은 여자가 아니었다. 남편은 알콜중독에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었으니 최악의 배우자를 선택한 셈이다. 남편으로부터 생존의 위기(?)를 느끼고 아이들 손을 잡아끌어 자동차에 올라타고는 도망치듯이 싱글녀가 된 엄마. 그녀는 아빠의 빈자리가 아이들에게 결핍이 되지 않도록 헌신적인 사랑으로 돌본다. 그러느라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적인 삶이 그녀의 몫이었겠다. 경제도 책임져야 했기에  집은 늘 가난했다.

 

힘들었던 그녀에게 삶의 커다란 위안이자 힘이 되어주었던 부분이 바로 , 말horse이다.

병원에서 척추종양 진단을 받은 후 그녀가 가장 먼저 의사에게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앞으로 말을 탈 수 있을까요?"

 

  그 대사를 통하여 엄마인 그녀에게 승마가 얼마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짐작해볼 수가 있다. 영화에 나오는 엄마와 남매가 사는 집은 변두리나 전원의 허름한 집이다. 그곳에서 말을 키우며 승마를 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라면 저소득층인 이들이 말을 소유한다는 일은 현실적으로 가당치 않은 일이지만 미국이기 때문에 말 키우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지 않았겠나 싶다.

엄마는 살면서 남자옷의 지퍼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다는 대사가 나온다. 그만큼 엄마는 자신의 욕망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자식을 돌보는 데만 맞추고 살았다. 그런 엄마에게 기쁨과 생기를 부여한 것은 말이라는 존재였나 보다.

 

 

 

 영화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엄마의 유언도 말horse에 대한 것이다.

엄마가 떠나고 나면 "저 아이(말)를 편안하게 해줘." 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한다.

 

하루하루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덜어내는 순간조차 엄마가 걱정했던 것은 주인을 잃고 남겨진 말의 여생이었던 것이다.

 

 엄마가 떠나고 세상에 남겨진 엄마의 애마는 셰릴의 새로운 상처로 남게 되었다.

말은 병들게 되었고 마지막을 편안하게 지켜주려면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서 안락사를 시켜야 했다. 그러나 남매에게는 그럴 만한 비용이 없었다. 결국 집에서 남동생이 총으로 쏴서 말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그나마 말의 고통에 종지부를 찍는다. 엄마의 유언과 다른 모습으로 끝난 말의 최후는 셰릴의 상처가 되어 그녀의 기억속에서 엄마와 함께 번갈아가며 나타나 괴롭힌다.

 

그 기억이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고 소멸한 사건이 길에서 일어난다. 비가 철철 내리는 여행자 대피소에서 셰릴은 말울음 소리를 듣는다. 그곳에서 키우는 백마가 있었던 거다. 그 백마는 누가 돌봐주지 않아 밤새 비를 철철 맞고 있었다. 셰릴은 백마를 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 건초를 주고 편안히 쉬게 한다. 그 순간 그녀의 오래 묵었던 말에 대한 상처도 치유가 이루어진 듯하다.

 

와일드 촬영중

 

 

영화에서는 여러 동물이 등장한다. 뱀,여우, 굴레를 쓴 낙타 등등.

동물은 주인공 내면의 상처와 치유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이미지로 쓰였다.

 

비록 짧게 등장했고 보통의 영화관객이라면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말이란 존재에 대하여 이토록이나 길게 다루어쓴 까닭은 나 자신이 셰릴의 엄마 연령대 여성으로서 말에게 위안과 힘을 얻고 있는 사람이어서 그럴 것이다. 주변에도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어떤지는 알길이 없으나 말에게서 크나큰 기쁨과 의미를 얻는 중년여성들이 많다. 말은 고마운 존재다.

 

한편 영화 뒷이야기를 조사하다가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말의 사촌쯤 되는 당나귀들이 촬영스탭으로 참여했다는  내용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배경인 산악지대는 차가 오르내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런 곳 왕래하는 데는 당나귀만한 일꾼이 없다. EBS의 <세계테마기행>에서 왕왕 보았던 엄청난 짐보따리를 등에 지고 동료들과 줄지어 사람이 시키는 대로 의연하게 걸어가던 당나귀 말이다. 촬영장에 필요한 온갖 장비,소품,보급품을 날라서 영화제작에 기여한 당나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와일드> 책을 구입했다. 열심히 읽고 나중에 '문학과 말' 카테고리에 글을 올려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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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저자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출판사
나무의철학 | 2012-10-2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KBS [TV 책을 보다] 화제의 방영작 [뉴욕타임스] 베스트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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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영화를 본 후 여성의 자아 찾기를 심리학적으로 탐색한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책을 함께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저자
클라리사 에스테스 지음
출판사
이루 | 2013-09-28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월경독서]에서 목수정 작가가 세상 모든 여자들에게 권한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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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점들이 즐비한 역전 제과점의 아들로 자랐기 때문에 나는 자영업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그들에게는 일의 반대가 휴식이 아니라 손해다. 그래서 그들은 휴일에도, 심야에도 가게 문을 닫지 않는다.

.

.

.

  그러니 어머니가 평생 만든 단팥죽과 팥빙수의 양이 얼마나될지는 상상조차 못하겠다. 그 그릇들을 쌓는다면, 아마도 꽤 높은 탑이 되리라. 내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된다한들, 그 탑 아래에서는 고개를 숙여야만하겠지. 그러고보면, 어머니는 참 여러가지를 만들었다. . . . 단팥죽 맛이 특히 일품이었다. 돈을 받고 팔아야만 하는 것이니 잘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비법은 내가 물려받았으니 나중에 소설이 잘 안쓰여지면 단팥죽 가게라도 차릴까보다. 팥죽을 만들때면 꼼짝없이 잡혀서 나무주걱으로 찜통에서 끓고있는 팥죽을 저어야만 했으니까.

 

  몇 년 전에 몽골에 갔더니 사람들이 마유주라는 것을 마시고 있었다. 내가 신기하게 여겼더니 말젖을 짜서는 밤새 나무주걱으로 휘저으면 술처럼 발효가 된다며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더라. 그래서 따라가봤더니 술에 취한 아버지들 뒤에서 팥죽을 저을 때의 내 나이 또래의 소년이 말젖을 젓고 있었다. 그 방에는 전등도 없었다. 어른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 소년은 말젖을 젓고 있겠지.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으나 어디를 둘러봐도 사방이 모두 똑같은 풍경이라 그게 더 무섭고 절망스럽던 몽골의 평원에서 나는 그 소년을 붙잡고 두 마리 망아지처럼 울고 싶었다.

 

                                                        

                                                                                   '소설가의 일'중에서

 

 

 


소설가의 일

저자
김연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5-01-13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매일 글을 쓴다. 그리고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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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의 밤은 깊다. 반구의 하늘은 별들로 가득 차고, 광활한 초원의 점 하나처럼 찍혀있는 게르 의 촛불은 아늑하고 호젓하다. 빙 둘러 앉으면 그 중심에 술병 하나쯤 놓이게 마련이다. 둘러앉은 여행자들이 한 점을 응시하며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밖에서는 모래바람이 울부짖고, 밤이 칠흑처럼 깊어갈수록 게르 안은 방주처럼 아늑해진다. 술잔을 나누며 지나온 길들을 되새기노라면, 누가 시키지않아도 각자가 가슴에 차곡차곡 접어두었던 삶의 수첩들을 펼쳐 놓게 마련이다.

 

  취기에 못이겨 게르 밖으로 나서면, 끝모르게 깊은 어둠이 사방을 둘러싸고, 세상의 중심에서 덩그러니 선 자신을 만나게 된다.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모래바람만이 원귀처럼 울부짖는다. 무어라 악을 써도 그 소리는 이내 바람에 날아가버린다.

.

.

.

 

  세상의 모든 소리를 앗아가는 모래바람과  깊은 어둠에 기대어 여행자들은 자신의 가슴 속에 꽁꽁 쟁여놓았던 말들을 토해내게 마련이다. 바람은 세상의 어떤 비밀스럽고, 부끄럽고, 저주스러우며 참혹한 소리들일지라도 한 도막도 남김없이 빨아들여 어디론가 날려보낸다. 언제 어디에서 그렇게 가슴 속에 쟁여 둔 말들을 통렬히 외쳐볼 수 있었던가. 언제 어디에서 마음껏 비틀거려보고, 가슴을 쥐어뜯어가며 울어보고, 큰 소리로 악을 쓰고, 취해 볼 수 있었던가. 대개 그러한 절규의 끝은 울음이다.

 

  모래바람이 부는 고비사막의 밤은 모든 걸 허용하며, 그 광포한 바람으로 모든 걸 너그러이 받아들인다. 소리도 소멸하고, 형상도 사라진 황야에서 누구도 들을 수 없으며,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나를 만나게 된다. 고비의 벌판에서 모래바람이 부는 밤이면 , 술잔을 내려놓고 게르 밖으로 나가보라. 걷는다는 생각마저 느껴지지않는 깊은 밤의 중심에 서서,

 

자신의 가슴 속에 꿍쳐 두었던 말들을 바람에 하염없이 날려 보내보라

 

                                                                                             '당신에게, 몽골' 중에서 

 

 

 


당신에게, 몽골

저자
이시백 지음
출판사
꿈의지도 | 2014-07-04 출간
카테고리
여행
책소개
더는 물러날 곳이 없을 만큼 끝까지 와버렸다면, 이제는 몽골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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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은 말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원'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살다가 한번쯤은 몽골의 끝도 없는 초원을 밟아보고, 그 땅에서 태어나 자란 말을 타고서 바람처럼 달려보는 꿈을 꾸어본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아직 몽골땅을 밟지 못했다. 언젠가는 가봐야지 하는 생각만 책갈피에 끼워둔 나뭇잎처럼 마음에 묻어 두었다. 그런 내 앞에 몽골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 자꾸 나타나는 것을 보면 언젠가

몽골에 간다는 그 마음을 잊지 말라고 재촉하는 것 같기도 하다. 몽골에 가면 뭔가를 만나게 될 것 같다.

  위에 소개한 김연수의 산문과 이시백의 글은 모두 몽골에 갔던 경험담이 소재다. 각각 글의 장르나 다루는 이야기는 달라도 어떤 공통점이 느껴졌기에 한데 모아본 것이다. 공통점이란 바로 내면에 아로새겨진 맺혀있던 감정과의 대면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김연수의 산문에서 필자는 유년의 기억 한자락을 들추어낸다. 역전 제과점 아들로 자란 탓에 일손이 모자랄 때 고사리손이라도 필요했던 그 시절 말이다. 솥단지에서 끓는 팥죽을 젓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젓는 일을 게을리 하면 금세 죽이 바닥에 눌어서 탄내가 피어오른다. 어린 팔 근육으로 고단한 노동을 하면서 아픈 것은 팔뿐이 아니었을 터. 고단한 삶이 무엇인지 일찌감치 엿보아버린 후에 남겨진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 감정은 잊혀진 채 지나가버렸나 했는데 몽골에서 밤새 마유주를 젓는 아이를 보며 작가의 가슴에 되살아났던 거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두 마리 망아지처럼 울고 싶었다.'

 

  이시백 작가의 사색의 공간은 몽골 중에서도 고비사막에 지어진 게르 안이다. 게르는 유목민의 전통적 이동식 가옥이다. 이런 가옥에서는 바깥의 소음, 자연의 음향이 생생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어서 바깥에서는 바람소리 요란한데 그와 대조적으로 게르안은 사위가 조용하다. 그럴 때 사람은 차단했던 이성의 빗장이 저절로 풀어짐을 느끼게 된다. 자연의 소리는 내면으로 접속하여 들어가는 암호나 마찬가지다. 평소 겹겹이 두르고 살았던 거추장스러운 생각들이 사막의 바람에 훠이훠이 날려간 듯 마음이 가벼워졌을 때 필자가 만난 것은 역시나 울고싶어지는 맺힌 감정이었다.

특히나 한국땅에서는, 그것도 남자로 태어났다면 쉽게 울 수 없는 법이다. 남자는 평생 세 번 우는 것이고, 아무 때나 울면 고추 떨어진다는 삶의 지침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박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면서 울고싶어지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나와는 달리 남편은 이미 몇 차례 몽골에 다녀왔다. 다녀올 때마다 엄청난 얘기보따리를 풀어놓았었다. 듣고 지나간 얘기 중에 이런 대목이 떠오른다. 비가 오고 강물이 불었는데 몽골 말몰이꾼이 모는 말무리가 강물 앞에 다다랐고 그 강을 맨몸으로 건너야 했다. 몰이꾼의 노련한 신호에 따라 말들은 하염없이 몸에 차오르는 거친 물살을 마다않고 강을 건넜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했던가. 그때는 "울었어? 왜?" 했던 것 같은데 지금에야 그 마음자리가 조금이나마 짐작이 된다. 언젠가 나도 몽골에 간다면 몇 배는 더 울음바다를 쏟아내지 않으려나.

 

'데려다 준다.'

 

 말은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다주는 존재이다. 물론 옛날에야 아주 오랜 세월 말이 제 등에 사람을 태워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데려다주었다.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많이 옮겨주는가가 말의 효용가치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빠르게 ,많이 옮겨주는 일에서 다른 대체수단이 생겼으므로 그 일에서 말은 해방되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을 찾아나서고 말에게 빠져들곤 한다. 그 이유를 하나 알 것 같다. 사람들이 "뭐지? 뭔데 묘하게 빠져들게 만드는 거야?"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비밀 같은 거 말이다.

 

 말은 우리를 깊숙하고 은밀한 내면의 감정과 만나도록 안내한다. 말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가보면 내가 말라죽으라고, 숨막혀죽으라고 가두어두었던 내면의 지하실이 열려서 그 안의 것을 두려움 없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몽골로 여행을 떠난 감수성 풍부하고 예민한 작가 두 명이 전하는 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이 글에 실은 사진은 몽골의 사진작가 Oktyabri Dash 님의

' The beauty of mongolia' 에 실린 작품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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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17일 밖에 나온 칸타네 가족. 날은 화창하여 햇빛이 따뜻하게 말 몸을 감싸주었다. 아이들은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칸타와 아마르가 다리가 아팠던 탓에 거의 한 달 동안 밖에 나오지 못했다. 아픈 후 일주일 지날 무렵 ,실내마장에는 내보내주었지만 바깥 넓은 공간에 나왔을 때 지나치게 뛰다가 다시 아플까 싶어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아픈 동안 아마르의 모습은 어땠을까? 점점 끓어오르는 압력밥솥의 상태를 상상하면 된다. 곁인대염 진단 받은 후 닷새 마방에서 안정 취할 것, 수의사의 권고에 따라 아마르는 차분히 면벽하는 수도승이 되어야 했다. 천하의 장난꾸러기 아마르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조치였다. 처음 얼마동안 아마르는 제 할아버지에게 뿔이 나서 귀를 뒤집고,눈을 부라리고,앞발로 바닥을 긁고,머리를 흔들면서 화를 냈다. 그 다음에는 할머니에게도 분통을 터뜨리며 제 억울한 신세를 항의했다. 급기야 마필관리사가 똥 치우러 들어왔을 때도 신경질을 냈다고 한다. 이 녀석의 속이 점차 부글거리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예정된 기한 닷새가 지나고 실내마장에서 평보부터 서서히 시켜야 하는데 해방감에 앞발을 들고 난리를 피우려해서 겨우겨우 진정시켜야 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발병 후 처음 칸타,아마르를 함께 실내마장에 풀어놓으니 광복이 되어 환호의 물결에 휩쓸리듯 좋아서 난리가 났다.

 

 

햇빛과 바람, 넓은 공간이 선사하는 기쁨을 느끼며 세레모니를 한 후 건초를 먹다가 다른 말 하나가 미니마장으로 들어가니 '동료가 하나 나왔구나' 하고 무리를 만난 흥분으로 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다가가 염탐(?)을 하는 칸타와 아마르.

사진에 아마르 얼굴과 그림자에 비친 모습,그림자가 삼각형 구도를 이루며 마치 무리를 이룬 듯 보여 재미있다.

 

 

염탐질을 한참 하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할아버지가 "아마르 이리온 ,손님 오셨다!" 하고 불렀다. 아마르가 바로

 

 "아니 저쪽에도 좋은 일이?"

 

하고서 방향을 바꾸더니 빠른 속보로 달려갔다.

 

 

부름을 받은 아마르가 달려올 때 정면에서 바라보면 허겁지겁 바삐 부지런히 오는 모습이어서 볼 때마다 언제나 웃게 된다.

 

 

"어? 우릴 부르네. 가봐야지." 하는 찰라.

 

 

 

"예써얼~ ! 갑니다 가요~" 우다다다

 

(칸타는 '뭘 그리 빨리 가누' 부르니까 마지못해 가주겠다는 분위기로 꾸물떡~ )

 

 

 

부르셨어요?

 

뭔데요, 뭐?

 

(칸타도 더 재고 있다간 아마르가 맛난 거 혼자 다 먹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 후다닥 달려온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먹을 것만 바라고 달려오는 것은 아니다. 방목이 끝나고 마방에 가자고 로프를 들고 흔들어도 온다. 아마르는 적극적으로 아무나 앞에 있으면 맑은 눈으로 바라보며 걸어온다. 혹시 마장에서 아마르가 뚜벅뚜벅 걸어온다면 당황하지 마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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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헨릭 시엔키에비츠

 

<간략 소개>

1846년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출생.

 

1896년 <쿠오 바디스> (전 3권) 출간.

 

1905년 노벨문학상 수상.

 

<스웨덴 한림원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

 

헨릭 시엔키에비츠는 서사 작가로서 뛰어난 장점을 지녔다. 쿠오 바디스는 교양 있고 자존심 강하지만 타락한 비기독교도와 겸

손하면서도 자부심 강한 기독교도 사이, 에고티즘과 사랑 사이, 황궁의 오만한 사치와 카타콤의 고요한 집중 사이의 대조를 뛰

어나게 그려낸다. 무엇보다 로마의 대화재와 원형경기장의 피비린내 나는 광경의 묘사는 필적할 이가 없다.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에게 던졌던 이 절박하고 심오한 물음은 시엔키에비츠의 <쿠오 바디스>를 통해 혼돈의 시대를 향해 던지는 영원한 화두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동안 두 번의 밀레니엄이 지났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전쟁과 불신, 대립과 반목이 난무하고 인류는 환멸과 실의 ,고독 속에 함몰되어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단절되고 파편화된 인간관계 속에서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현대문명의 카오스에 휩쓸려 끊임없이 배회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삶의 지표를 제시해 주는 나침반을 갈망한다.

 

<쿠오 바디스>가 탄생한 지 1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작품이 여전히 불멸의 고전으로 손꼽히며,시공과 종교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독자들을 사로잡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최성은 / 작품해설 중에서 - p.536

 

 

 

 

 

작품의 배경은  폭군 네로황제 시대의 로마제국이다. 로마의 귀족인 비니키우스는 이방의 공주 리기아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그녀와의 사랑은 순탄치 않았지만 우여곡절을 거치며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도록 예정되기에 이르른다. 그 찰라에 로마에서는 대화재가 일어나고 황제를 따라 로마를 떠나왔던 비니키우스는 말을 타고 어둠속으로 폭풍같은 질주를 한다. 사랑하는 리디아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극한의 절박한 심경으로 오로지 말의 속도에 자신를 완전히 내맡기고 로마로 가는 상황은 압권이다. 말의 활약이 눈부시게 빛나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 42장 전체는 비니키우스가 로마로 가서 리기아를 찾아헤매는 상황의 전개로 할애되었다.

 

제 2권 p83.

 

 비니키우스는 두세 명의 노예들에게 따라오라고 명령하고 곧 말에 올라탔다. 그는 어둠에 싸여 을씨년스러운 안티움의 밤거리를 지나 라우렌툼으로 가는 컴컴한 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렸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끔찍한 소식에 그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정신을 가누지 못했다. 머릿속이 몽롱해져서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다만 '불행'이 등 뒤에 붙어 앉아 그의 귀에 대고 "로마는 불타고 있다!"고 소리지르면서,자기와 말을 채찍질하여 미친 듯이 불 속에 치닫게 하고 있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비니키우스는 투구도 쓰지 않고 튜닉 바랍으로 말을 몰았다.머리는 말의 목에 찰싹 갖다 붙이고 앞도 보지 않은 채, 가는 길에 일어날 수도 있는 위험이나 장애물은 아랑곳하지 않고,무작정 달렸다. 적막을 가르며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밤하늘에는 별이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말도,기수도 달빛을 받아 마치 꿈속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이두메아 산 종마는 귀를 늘어뜨리고 목을 앞으로 길게 뽑은 채, 사이프러스 나무와 그 사이사이에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하얀 별장들을 뒤로 하며 쏜살같이 질주했다. 돌바닥에 부딪히는 말발굽 소리에 놀란 개들이 잠을 깨어 도처에서 짖어대기 시작했다. 비니키우스와 그의 말은 속도가 매우 빨라 순식간에 사라져갔지만 ,그가 지나간 뒤에도 개들은 여전히 머리를 쳐들고 달을 향해 짖어댔다.(중략)

 

"로마는 온통 불바다입니다!"라고 외치던 레카니우스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리기아를 구출하기는 커녕, 온 도시가 잿더미로 변하기 전에 도착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니 눈이 뒤집히고,미칠 것만 같았다. 비니키우스의 초조한 마음은 어느새 질주하는 말보다 빠르게,마치 불길한 새떼처럼 그 자신보다 훨씬 앞서 날아가고 있었다.(중략)

 

…… 아아, 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가! 대화재와 노예들의 반란,살육! 그로 인해 시민들은 격분할 테고,어쩌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바로 그 혼란의 도가니 속에 리기아가 있다. 비니키우스의 탄식과 신음소리는 폭풍처럼 콧김을 내뿜으며 헐떡이는 말의 가쁜 숨소리에 뒤섞였다. 말도 사람도 모두 아르데아에서 아리키아까지 숨이 턱에 차도록 쉬지 않고 달려왔기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화염에 휩싸인 저 도시에서 대체 누가 리기아를 구출할 수 있단 말인가? 비니키우스는 달리는 말 등에 엎드려 갈기를 움켜쥐고,괴로운 마음을 참을 길 없어 말의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그때 반대편에서 안티움을 향해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그는 '로마는 멸망하고 있소!"라고 소리를 지르며 비니키우스의 옆을 스쳐 순식간에 멀리 사라졌다.순간 비니키우스의 귀에 "신들이여……."라는 외침이 들려왔으나,다음 말들은 말발굽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비니키우스는 그 낯선 사내가 던진 '신'이라는 말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고개를 든 채 별이 총총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중략)

 

 

 

 

연인을 구출하려는 청년은 캄캄한 밤중에 말 등에 올타타고 미친듯이 로마로 간다. 청년 비니키우스 눈에는 뵈는 게 없다. 밤중이어서도 그렇고 절박한 상황에 주변이 눈에 들어올리 없으니 장님이나 마찬가지다. 눈뜬 장님 신세의 주인 명령에 따라 달리는 말은 무슨 생각을 할 겨를이 있을 리 없지만 찰라에라도 자기 생각이 떠올랐다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주인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말은 말일 뿐이라서 주인이 가자는 곳으로 무작정 제 네발로 달려나간다. 그곳이 전쟁터이든 재난터이든 가리지 않는다. 비니키우스를 태운 말은 불바다 로마를 향해 달려갔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극한의 절망 그 자체였다. 비니키우스와 말은 지옥을 보았을 것이다. 비니키우스가 터질 듯한 심장으로 절망으로 몸부림친 자리는 바로 말 등이었다. 미친듯한 질주의 끝에서 도달한 곳은 낭떠러지나 마찬가지 아니었겠나!  그러나 말발굽 소리 속에서 비니키우스는 "신"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그의 내면에서는 신의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비니키우스는 새로 태어났다. 그는 처음으로 신에게 간절하게 기도를 올린다.  그 순간 나의 상상 속에서는 절벽에서 천마를 타고 날아오르는 비니키우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말은 주인을 불바다 지옥을 통과하여 천상에 이르러 신에게 데려다주었던 셈이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신을 받아들이는 장면 이후로 작품의 전개방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타락에 가까운 로마귀족이었던 비니키우스가 기독교도 연인 리디아와 진정한 연결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신의 가르침 '사랑'이라는 주제에 더욱 다가가게 된다.

 

 

 


쿠오 바디스

저자
헨릭 시엔키에비츠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5-12-1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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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바디스 도미네 (2004)

Quo Vadis? 
8.8
감독
예르지 카발레로비치
출연
파웰 델라흐, 막달레나 미엘카르츠, 보거슬라브 린다, 미칼 바요르, 예지 트렐라
정보
드라마 | 폴란드, 미국 | 144 분 | 2004-12-10

 

 

 

 

 

영화에서는 방대한 문학작품이 생략되어 있어 소설을 다 읽은 후 보았더니 싱겁기 짝이 없었다. 대화재 현장 로마로 말 달리는 장면은 소설과 다르게 대낮으로 설정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미친듯이 달려야했던 말의 괴로움이 연기가 아니라 실제 (real)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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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에서 발견한 말(馬)

 

 

 

 

'참다운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삶일까?'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인가?'

 

언제부터인가 이런 문제들이 마음을 온통 차지하게 되었다. 내가 온전히 젊었더라면 배낭 하나 짊어지고 운동화끈 질끈 동여매고서 세상을 향해 길을 떠났을 텐데 나이가 들고보니 형편이 허락하지 않는다. 여러모로 현실에 매이다보니 그렇다. 하여 나를 발견하기 위한 탐구의 방법으로 문학여행을 떠나보았다.

 

작년부터 고전문학을 하나씩 찾아서 읽는 중이다. 고전이란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낡지 않고 살아남아 사람들이 계속 찾게 되는 텍스트를 일컫는다. 거기에는 인간 보편성의 뭔가가 있기에 자꾸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전을 읽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는 초등이나 중등과정 시절에 '간추린 고전'으로 선행독서를 하게끔 만든다. 그러다보니 성인이 되어서 고전에서 다루는 삶의 문제를 현실에서 맞닥뜨리고 진정으로 읽어보아야 할 순간이 도래했을 때, 고전이란 이미 읽은 것이란 착각에 빠져 읽을 생각조차하지 않는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인생에서 뭔가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휙휙 지나가는 인생의 여러가지 국면을 그저 사진 보관하듯이 현상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현상적으로만 바라보니 해결이나 나아가는 방향도 바람부는 대로 몸을 기우는 갈대 같은 건 아닐까 싶었다. 인생을 깊게 꿰뚫어보는 심미안을 갖고 싶었다.

 

그 옛날 그리이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에 대하여 모방충동설로 바라보았다. 문학은 삶의 재현이라는 거다.

'재현'이나 '모방'이라는 개념에 잘 들어맞는 문학의 장르는 소설이다. 소설은  내가 좋아하는 장르다.

소설에 대한 여러 정의 가운데 루카치의 정의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의 문제적 개인이 잃어버린 정신적 고향과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동경과 모험에 가득찬 자기 인식의 여정에 대한 형상화'가 소설이다.

 

그러니까 나는 배낭과 운동화 대신 문학책을 도구 삼아 삶을 이해하는 '자기 인식의 여정'에 참여한 거라 볼 수 있다. 소설 안에서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체험할 수 있다. 그 동경과 모험,즐거움과 환희로 가득찬 여정에서 덤으로 얻은 전리품이 있다. 인간의 삶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존재인 말(馬)이 어떤 모습으로 녹아들었는가에 대한 성찰이다.

 

내가 아는 말의 삶이란 고작 마방이나 풀밭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문학 안에서는 말이 등장인물과 구체적인 사건에 개입하여 인간이나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데 기여하고 있었다. 그만큼 말은 사람살이에 긴밀하게 함께 해왔다는 증거이므로 문학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모습이 하나도 이상할 것은 없다.

 

나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보다는 말과 가깝고도 깊은 유대를 맺고 사는 사람이므로 '문학 속의 말'이 드러나는 부분을 추려내어 기록해보고 싶었다. 이 의미있는 새로운 여정의 첫출발을 시작하려고 하니 설레고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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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마다 눈을 뜨고 몽롱한 시간이 좀 지난 후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나면 가슴엔 새로운 희망이 차오른다. 그 힘으로 하루를 살고 또 살고 한다.

 

 실내는 찾아드는 겨울햇빛으로 넘쳐난다. 햇빛이 가득한 실내마장에 가족이 다 모였다.

 

 사진을 바라보니 그 순간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이날 이후로 칸타와,아마르는 동시에 똑같이 오른쪽 앞다리가 아프게 되어 붕대를 감고 쉬게 되었다.

 

 마방에서 안정을 취해야 하는 환자신세가 된 아이들을 보니 건강하게 뛰어다니던 때가 얼마나 행복했는가 간절하게 그립기만 하다.

 

 새해의 첫 이벤트가 수의사 방문진료라니 전혀 원하던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도 올해 좋은 일이 벌어지려고 액땜하는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해보았다.

 

 아이들은 아픈 부위의 고통도 있겠지만 운동도 못하고 견뎌야하는 상황이 괴로울 것이다.

나 역시 아이들이 낫기 전에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마음이 개운하지 못하리라.

지난 십 년 내내 겪어온 일이라 단련이 되었으련만 마음 아픈 질감은 다르지가 않다.

칸타와 아마르가 동시에 같은 다리가 아프고, 내 마음이 아픈 것을 보면 우리는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땐 이런 말을 떠올리곤 한다.  

살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견디는 일'의 의미를 불러와야 한다.

쉽사리 힘듦을 잊고자 다른 즐거움을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견디며 기다려야 한다.

이 상황이 지나가기를.

 

 겨울의 한가운데에 접어드니 한 달 넘게 목욕하지 못한 까닭에 칸타도 꼬질꼬질하다.

꼬질하면 어떠랴. 나비처럼 팔랑팔랑 걸어다닐 수 있다면야.

 

 칸타의 왼쪽 뒷다리는 과거에 코끼리만큼 부어올라 치명적인 위험에 빠진 게 아닐까 우려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하나도 붓지를 않는다. 얼마나 감사한가.  모든 상황은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칸타의 표정이 밝으니 좋다.

 

 아마르는 내가 칸타에게 집중하는 틈새를 노리고 어느새 한눈을 팔고 있다.

 

 그럴 때 다가가 눈짓이나,손짓을 보내면 아마르가 '압박'을 느끼고 '아,내가 조마 도는 중이었지!'하고  흐름에 따른다. 때로는 할머니라고 개무시하기도 한다.

 

 둘을 함께 조마시킬 때 나는 매우 섬세해져야 한다.

 

아이들은 쉽사리 기쁨에 사로잡혀 난데없이 질주하거나 어딘가에서 급정거하는 행동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활발한 걸음걸이를 재촉하면서도 과격한 달음박질을 하지 않도록 자극하지 않아야 하기에 압박의 강도를 조절하며 끊임없는 신호를 날려보내야 한다.

 

이 공간에서 나와 아이들 사이에 무수한 교신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그 흔적을 점으로 표시한다면 은하수와도 같은 별의 강이 흐르리라.

 

 아마르가 나를 개무시했을 때 나도 개무시하고 칸타에게만 집중하면 어느 순간 아마르는 '할머니가 엄마랑만 노네' 하고 소외감을 느끼며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랑 눈이 마주치면 얼시구나 하고 다가온다.

 

 그렇다고 내가 "어유 와쪄요!" 하고 받아주지는 않는다. 도도녀 할머니는 튕긴다. "너무 들이대지 말란 말이다!"

 

 돌아서는 도도녀 할머니를 졸졸 따라가는 아마르.

 

그 둘에게 유쾌한 시선을 보내는 듯한 칸타.

 

 

아이들 앞에는 난로가 있고 승마장에 찾아온 사람들은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불을 쬔다.

그러는 사람들 앞에 다가와 사교를 청하는 말들은 우리 아이들 뿐일 거다.

 

혹 이런 경험 해보셨는지?

 

말이 다가와서 사람에게 말을 건다.

 

말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은 말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

2015년 깐돌할망의 화두이자 말 탐구 주제는 바로 이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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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은 꽤 추웠다고 한다. 그런데도 나는 그닥 춥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추위에 단련된 세월 탓도 있겠고 다른 이유도 있다.

 

 

추위를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 몸을 난로처럼  달구는 거다. 이렇게  터득했달까.

간단히 구호화 한다면 '난로로 빙의하자!'

 

 겨울이 되면서 나의 승마장 일과는 이렇게 바뀌었다. 승마장에 도착하자마자 칸타와 아마르에게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넨 후 다짜고짜 옷을 홀랑 벗겨 던져놓고, 다시 한 번 다짜고짜  실내마장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런 후 잠시 기지개 펼 짬을 준다. 요때 칸타는 부랴부랴 뒹굴기를 하고 아마르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킁킁거리며 돌아다닌다.

 

 

"자 됐지? 이제 시작이다!" 하고는 장채찍을 들고  공중으로 띄우면 기다란 끈이 리듬체조 선수의 리본처럼 허공에서 춤을 춘다. 이것을 신호로 칸타가 앞장서고 아마르가 뒤따르는 식으로 자유조마는 시작된다. 아이들은 서두르지 않고 리드미컬하고 활발한 속보로 마장을 돈다. 나도 안쪽에서 작은 원을 그리며 성큼성큼 걷는다. 그렇게 20분 정도 함께 호흡을 맞추어 걸으며 달린다. 그러는 사이 내 몸은 난로가 되어 후끈후끈 열기가 가득하다. 이 열기는 다시 승마장을 나서기까지 3시간 정도는 유지되는 편이다.

 

 

20분 자유조마 후에도 나는 실내마장을 벗어나지 않고 칸타 ,아마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어슬렁거리며 생각도 하고 가끔 아이들이 똥을 떨구면 치우기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발견한 사실! 아마르가 자꾸 나를 스토킹한다. 문득 뒤가 캥겨서 뒤돌아보면 집채만한 검은 존재가 나를 향해 뚜벅뚜벅 ~ 그러다 장난으로 확 ! 덮칠 것 같은 불길한 느낌. 예전 같으면 저리 가라며 쫒아냈으련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예절을 지키며 사람과의 최소거리는 지킨다. 문득 나 스무 살 무렵엔 길에서 남자가 따라오는 일이 있었지 하고서 옛생각이 떠오른다. 그 남자도 내가  뭔가 좋다고  꽂혀서 따라왔듯이  , 아마르도 내가 좋아서 따라오는 것이니 기분이 나쁠 리가 없다.

 이럴 때 어울리는 영화가 있다.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아마르가 킁킁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어쩌다 내 눈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졸졸 따라온다. 다가와서 킁킁 조사도 하고,앞발을 긁으며 요구도 한다. 만일 내가 긁개나 채찍이라도 들고 있으면 "이리 줘봐!" 하는 것처럼 제 입으로 덥석 물고 내게서 물건을 빼앗는다. 어쩌면 아마르는 그 물건을 다시 달라고 내가 잡아당길 때 줄다리기가 오가는 그 다음 상황을 즐기려고  하는 행동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뭘까. 아무튼 사람을 따라다니는 행동은 올해 내내 이루어진 내츄럴홀스맨십 훈련의 기분좋은 후유증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나를 절친으로 여기는 탓도 있다고 본다.

 

 칸타는 적극적으로 따라다니지는 않아도 시선으로는 아마르보다 더 집요하게 스토킹질을 한다. 오래 함게 지내서인가 요즘에 칸타의 눈빛을 보면 꼭 그 안에 사람이 들었나 싶기도 하다.

 

 칸타는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커피도 홀짝거리니까 사람스러운 눈빛을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으니 칸타가 혼자 제적을 따라 워킹을 시작한다. 칸타의 '나홀로 하염없이 워킹'은 과거 칸타가 환자였을 때 재활운동 했던 후로 오랜 습관이 되었다. 덕분에 말 워킹머신이 없어도 스스로 잘한다.

 

 

 올해 나의 목표 중에 하나는 <말에게 집착하지 않기> 였다. 그러니까 말을 하루라도 안 보면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을 버리자는 거다. 구체적으로는 일주일에 사일만 승마장에 나가고 나머지는 인생의 다른 분야에 몰두하자, 대신 말을 만나러 가서는 최선을 다해 좋은 시간을 갖는다. 라고 행동지침을 정하고 실천했다.

 

 

옛날에는 아마르가 한창 자라고 있어서 늘 들여다보고 보살펴야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시절에는 아마르가 최대한 많은 시간에 무리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방목생활에 비중을 두었다. 지금은 날마다 만나지는 않지만 만나는 시간에는 자유시간조차 함께 걸어다니고 접촉을 하려고 한다.그러자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다.

 

 아마르는 올해  내츄럴홀스맨십과 마장마술 기초공부를 했다.

 몸도 더욱 튼튼해졌다.

 기른 사람에게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기쁨을 주도록 잘 자라주어서 아마르에게 고맙고, 그냥 무한한 감사의 마음도 샘솟는다.

 

 2014년에는 나의 개인적인 다른 활동이 있어 블로그가 개점휴업한 가게처럼 한가했다.

 2015년에는 다시 알차게 채워나갈 생각이다.

한층 깊어지고 말간 시선으로 말과 사람, 그들의 관계에 대하여 풀어나가볼까 한다.

 

 아마르는 공부중!

 

 실내마장에 어떤 무늬가 새겨져 있어 찍어보았다. 여러 마리의 말이 사람을 태우고 돌아다닌 시간의 흔적이 모래바닥에 응집되었다. 삶은 해마다 한 장씩 새로운 무늬가 새겨지는 그림 만들기가 아닐까?

 

 

알팔파와 티모시를 사랑해주신 모든 독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12월,겨울나무의 자태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구름낀 하늘을 배경으로 늘어선 나무의 우듬지도 바라보시구요.

올해 어떤 아름다움을 여러분의 삶속에 수놓으셨는지 떠올려보시지요.

크리스마스도 잘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2015년에 새로운 모습으로 좋은 인연 이어가지요.

 

 

 

<마필관리사가 찍어서 보내준 사진임>

 

칸타는 멋진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초록이 지천인 풀밭이라도 거니는 중일까요.

내게는 사진이 이런 의미로 읽힙니다.

 

"엄마,나는 잘 지내요. 우리 걱정 말고 엄마의 멋진 꿈을 꾸세요."

 

칸타가 간절하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기 때문에 요 사진이 나에게 전달된 것 아닐까요?

꿈보다 해몽이라구요?

그래도 매사에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손해볼 게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말 대표로 칸타가 전하는 메시지를 2014년 <알티>의 공식메시지로  삼겠습니다.

 

자신만의 꿈을 꾸세요!

꿈을 믿고 나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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